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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에게
- 아내를 만나서부터의 자서전-
1. 들어가는 말.
여보!
매일 당신과 함께 먹고 일하고 자면서 이렇게 글을 쓰니 좀 쑥스럽습니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당신과 처음 만나 연애하던 시절부터 쓰렵니다.
나는 1962년2월15일부터 초임 순경으로 남원읍 신정리 파출소에서 근무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해 크리스마스 날 나에게 카드를 보냈습니다. 1963년1월1일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눈이 많이 쌓인 그날부터 우리는 열열 하게 사랑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재미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입산수도를 하려고 했다면서, 우리가 서로 친구가 되자고 했습니다. 나는 결혼까지 하려고 마음먹고 남녀 간에 어찌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당신은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친구가 되는 것은 흔치않으니 의미가 깊고 좋은 일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나는 그럴 수는 없고 결혼을 하자고 했습니다. 당신은 결혼을 하면 지참금도 없고, 경찰관 월급으로 생활은 한다고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 공부를 시키기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우리 둘이 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했던 사람들이니 틀림없이 자녀도 머리가 좋아서 대학에 갈 때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을 테니 걱정 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가 44살에 당신을 잉태하였는데, 낳지 않으려고 독이 있는 장록 잎사귀를 갈아서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마셨어도 태아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때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만날 수 없었다고 생각하니 그 독초가 효력이 없기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부잣집 칠 남매 (남4여3)중 막내딸로 태어나서 귀여움 다 받고 잘 자랐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한번은 당신의 넷째 오빠가 나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다방에서 만났습니다. 내가 면접시험을 본 셈이지요. 그때는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오빠는 나를 만나기 전에 나와 함께 남원경찰서에 근무한 이리공고동창 친구인 P순경에게 나를 물어봤던 모양입니다. P순경은 당신을 좋아해서 그랬는지 나를 좋지 않게 얘기를 했습니다. 내종에 당신 오빠가 당신에게 하는 말이
“나는 누가 내 친구에게 나를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없도록 처세를 하였는데, 이순경은 동료 간에 처세를 잘못한 사람인가 보드라”
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오빠는 우리들의 결혼을 반대는 안 했습니다. 큰오빠가 반대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3년간 계속 연애를 했습니다. 나는 1964년에 경사로 승진을 하여 이리경찰서 수사과 수사계 서무반장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큰오빠가 결혼을 반대한 도수가 좀 낮아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1966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날 자 잡은 얘기가 또 재미있지요. 잡은 날은 2월10일인데 어머니가 잘못 알려줘서 내가 11일로 청첩장을 찍었습니다. 10일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11일은 날씨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택일이란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당신 집에서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첫날밤을 지내고 난 아침에 당신이 계란 노란자 두 개를 중발에 담아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참기름을 쳐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부엌에 가서 당신 올케언니에게 참기름을 쳐서 달라고 하니 당신올케가
“자네 시집살이 깨나 하겠네.”
라고 했었습니다. 요대기에 물이 들어 당신 큰 오라버니가 당신 올케에게 시집가는 처녀에게 그런 것쯤은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니냐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당신은 그렇다 치고, 나도 참으로 순진한 총각이었습니다. 수건이라도 한 장 가져오라고 할 것을 말입니다.
이리경찰서 옆 갈산동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1967년3월14일 이리H산부인과에서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해산을 도왔던 분은 내가 이리경찰서 수사과 수사계 서무반장을 하면서 알게 되어, 어머니 같이 지낸 분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결혼하기 전에 보내는 사성(四星)을 갖다 드렸고 당신이 장남을 낳을 때, 여자가 얼마나 힘들게 아이를 낳는지 보아야 한다면서, 나를 불러 당신의 허리를 안고 뒷벽에 기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라는 대로 하면서 당신이 장남을 낳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첫아들을 가진 것이 하도 기뻐서 친형님같이 지낸 이현수 형님에게 알렸더니 축하주를 사주었습니다. 한잔 하고 집으로 가니 해산을 도왔던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서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전기 불을 끄고 잠잘 때 켜는 빨간 불만 켜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수박이나 화채를 담아 마시는 큰 그릇을 주면서 쉬지 말고 단숨에 마시라고 해서,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마시고 난 다음에 장남이 뱃속에서 들어있었던 태를 막걸리에 넣고 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자기가 사위에게 해 주어 몸에 좋은 효과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장남을 보면서 그 생각을 하면 더 애착이 갑니다. 서울 형님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알렸더니 좋아하시면서 작명가를 찾아가서 재호(在濠)라고 이름을 지어 보냈습니다.
하루는 당신을 언니라고 부른 친구 L양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이 세상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잉꼬부부처럼 다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내가 113전투경찰대로 발령이 나서 떨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재호가 태어 난지 6개월 되던 때에 설사병이 났습니다. 이리 평화의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나는 현수형님더러 1·21사태로 외박을 나갈 수가 없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어렵게 외박을 해서 가보니 링거 주사를 혈관에 꽂을 수가 없어서 허벅지에다 꽂고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나도 눈물이 났습니다. 현수형님 말씀이 아기도 귀중하지만 그렇게 서럽게 계속 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당신 혼자 아기를 데리고 이리에서 살라고 할 수가 없어 남원 처가로 보냈습니다. 내가 남원주천면에 잠간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친구들과 막걸리를 사가지고 위문을 왔었습니다. 전투경찰대 생활을 마치고 남원경찰서 수사과 수사계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남원읍 쌍교동에 셋방을 얻어서 살았습니다. 비록 셋방살이였지만 처갓집도 근처에 있고 귀여운 아들도 있어 이것이 행복이란 것을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의형제를 맺은 일 년 선배 K형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식사만 대접하고 보내려고 했는데 당신은 여비까지 드렸습니다. 그 형은 여비를 받고 당신에게 극장엘 가자고 해서 함께 극장을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 형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그 형은 고등학교 3학년이고 나는 2학년 때였습니다. 그 형은 부자 집 둘째 아들이었고 경제적인 면에 밝았습니다. 그때 수례를 끄는 말 한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돈을 벌고 자기 집에서 유산을 받아 부자가 되면 집을 보기 좋게 두 채를 지어서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사라지고 당신에게 여비를 얻어가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순천철도국 직원으로 근무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구례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2014.7.19.토. 구름)
2. 간부가 되다.
1969년2월6일 경위로 승진하여 전주경찰서 수사과 수사계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초임 간부로 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열심히 근무를 했습니다. 남원에 있는 당신이 둘째 아들을 낳게 되어 남원에 갔습니다. 그달 22일 당신을 손 수례에 태우고 남원도립병원으로 갔습니다. 날이 무척 추었습니다. 금방 해산을 할 것 같지 않고 날씨가 하도 추우니 의사가 관사로 들어갔습니다. 간호사 2명이 아기를 받았습니다. 나는 어찌나 춥던지 옆방 난로 가에 있다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가보았습니다. 당신은 추위에 떨면서 해산을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고, 감기에 걸렸습니다. 나는 간부로 승진하고 둘째 아들을 얻어서 1969년을 내 생애에 최고의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1970년4월20일 경기도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학교로 12주간 교육을 가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외출을 하여 전주로 왔습니다. 그때 나와 친한 Y라는 친구가 김포농협에 근무를 했습니다. 그가 김포에 사글세방을 얻어서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한동네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말고 언제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의 부인이 당신의 학교선배라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3개월간 김포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에 외출을 나와서 월요일 아침에 귀교하고 수요일에 나와서 목요일 아침에 귀교를 했습니다. 장남 재호는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면 놀라, 무서워하면서 엄마 품으로 피하는 아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 소리가 끝이지 않는 김포에서 살게 되니 비행기 소리가 나도 무서워하지 않고 나가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된다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가 봅니다. 교육을 마치고 전주로 오려고 택시를 탔는데 가방을 놓고 내렸습니다. 방송국에다 연락을 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가방 속에는 새 양복도 있고 많은 옷이 있었는데, 그 택시 기사는 나에게 가방과 옷을 선물 받았다고 자기 아내에게 자랑을 하였을 까요? 아내에게는 자랑을 했을지 몰라도 자녀에게는 자랑을 못하고 숨겼을 것입니다.
1970년9월18일 무주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먼저 부임을 하고 당신은 전주경찰서에서 내준 ‘닷지’라는 화물차에다 이사 짐을 싣고 무주로 갔습니다. 그때는 전주에서 무주까지 도로가 포장도 안 되고 자갈길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린 아들 2명을 데리고 무주까지 가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부터 차멀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있으면 차멀미를 안 하는데 혼자타면 차멀미를 합니다.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어야 하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천리(天理)는 거기에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무주에서의 1년은 재미있는 세월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냇가에 가서 낚시를 해서 초간장에 찍어먹고, 엽총을 가지고 논에 가서 뜸부기를 잡아서 먹었습니다. 나는 입만 가지고 가서 천어를 먹고 뜸부기는 집에 가지고 와서 삶아먹었습니다. 겨울에는 C교육장과 K한전소장과 포인터 개를 데리고 꿩 산양을 해서 중국음식점에서 꿩 만두 국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한번은 관내에서 농약 상을 경영하는 사람이 무주 천에 약을 뿌려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천인공노할 짓을 한 것입니다. 농약 상을 하는 사람을 처벌하려고 경찰서에 대기시켰습니다. 무·진·장 여당 K위원장이 선처를 요구하였습니다. 원칙대로 구속을 시켰습니다. K위원장은 두고 보자고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였습니다. 무주에서 일 년 정도 더 근무를 하고 싶었습니다. 인사발령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를 좋아하는 관내 유지 B사장과 택시를 타고 전주로 와서 전북경찰국 경무과장 관사를 방문하였습니다. 만나지도 못하고 무주로 돌아갔습니다.
1971년9월8일 장수 경찰서 경무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장수군 소재지 천변에 있는 종씨 집에 셋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무주에서는 연탄을 때고 살았는데 장작불을 때고 살았습니다. 경찰서 청부가 장작을 만들어 주어서 연료비는 들지 않았습니다. 연탄을 피우지 않고 장작불을 피우니 옷에 이가 생겼습니다. 이를 없애기 위해서 빨래를 삶았습니다. 집주인 어른은 일제강점기에 전주북중학교를 나온 인물이 헌칠한 분으로 행정서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경주이씨 라고 우리 두 아이들을 무척 귀여워했습니다. 나는 모처럼 정복 근무를 하게 되어 출퇴근 할 때 정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정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끼고 걸어가면 큰길가에 사는 사람들이 해군사관학교 학생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장수에서 먹었던 장수 돌 판에다 요리를 한 추어숙회의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고 고스톱도 많이 치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장수로 발령이 났을 때 억울하다고 경찰국 경무과장에게 진정을 했었습니다. 진정서가 효과가 있었습니다.
1972년2월19일 군산경찰서 수사과에 신설된 기지촌전담반 팀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미8군사령부에서 미군이 주둔한 기지촌 주변이 무질서하니 정화를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내무부차관이 정화책임자가 되어 전국에 있는 기지촌을 정화하라고 하는데 내가 발탁이 된 것입니다. 군산의 기지촌 주변 정화 대상은, 옥구에 있는 미군 비행장과 미군이 외출하여 즐기는 실버타운 그리고 군산시내에 있는 영화동 3곳입니다. 해방직후부터 있어왔던 기지촌 주변의 무질서의 정화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업무를 원칙대로 처리해야만 되었습니다. 소신 것 열심히 일을 하면 다음보직은 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군산 영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당신은 세 번째 아기를 뱄습니다. 당신의 배가 어떻게 불렀던지 집주인 아주머니는 쌍둥이를 낳으면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H산부인과에서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의 어머니가 해산을 도왔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산부인과 원장의 첫마디가
“어! 이집에 또 얘기 낳아야겠네.”
라고 하는 소리를 당신은 확실하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들만 셋이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쌍둥이가 아니어서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한 아이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도 배가 많이 부르니까 하는 소리지 정말로 기대하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기 옷을 한 벌 사 주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아들욕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인데 얼토당토 아닌 소리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아들을 낳아서 고맙다고 하모니카를 사 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 하모니카를 자주 붑니다. 손녀 은수와 은오도 한 번씩 소리만 나게 불기도 합니다.
나를 군산으로 보낸 인사권자가 기지촌 주변이 잘 정화되면 다음 보직은 보장한다고 했는데, 전투경찰대에 갈 순서가 되어 110전투경찰대로 발령이 났습니다. 당신과 아이들을 군산 셋방에 두고 부안 격포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유(劉)명종 이라는 직원이 헤어지기 섭섭하다고 나에게 손목시계를 사주고 집에 연탄을 사주었던 일은 당신이나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일입니다. 그해 여름 당신은 세 아들을 데리고 격포에 있는 나에게 면회를 오면서 더워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셋째 재용이는 돌이 돌아오는데 격포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다름 질을 쳤습니다. 정말 누가 봐도 예쁜 아이었습니다. 당신과 아이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말은 전투경찰대지만 전투한번 안하고 매주일 외출을 하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2014.7.26.토. 구름)
3. 다시 군산에서 생활하다.
1974년 다시 군산경찰서 수사과 수사계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남원 손위 동서 고 손병호씨가 남원금동에 사둔 땅에 집을 두 채를 지어 나란히 살자고 했습니다. 그 분도 판소리 북을 치면서 풍류를 즐기는 분이었습니다. 한옥으로 짓는데 나더러 목재를 구입해 달라고 했습니다. 옛날 무주에서 근무할 때 친했던 B사장에게 집 두 채분 목재를 구입해 주었습니다. 손병호씨는 한옥으로 집을 짓는데 시장 통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동서지간에 살려고 이렇게 짓는다고 칭찬하는 말에 힘을 얻어 힘든지도 모르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1976년 경찰국 형사계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경감 승진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때 승진제도는 50%는 심사고 50%는 시험이었습니다. 나는 심사로도 바라 볼 수 있게 점수 관리를 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남원에 가서 근무를 하게 될지 알 수가 없고 전주에서 계속 셋방살이를 할 수가 없어서 남원에 있는 집을 살아보지도 않고 팔게 되었습니다. 팔 때 손병호씨가 팔지 못하게 했던 일은 그 당시 아는 사람만 알고 자세하게 말하지 않으렵니다. 당신을 만난 뒤 가장 못마땅한 일중의 하나였으니까요. 우리는 그 집을 팔아서 문화촌에 있는 집을 사서 이사를 했습니다. 당신과 나와 만나서 처음으로 우리 집으로 입주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결혼 한지 10년 만에 우리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수도사정이 좋지 않아 저지대에 가서 물을 받아서 살림을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당신의 넷째 오빠가 집을 보고 돈 많이 주고 좋은 집 샀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미국은 높은 곳에 있는 집이 값이 많이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 살 때 매일 아침 기린봉을 올라갔었습니다. 셋방살이를 할 때 승진시험을 보려고 옆집에 또 방 한 칸을 얻어서 공부를 하다가 내 집에서 공부를 하니 아주 편하고 좋았습니다. 당신 오빠는 우리더러 미국으로 가서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나는 승진을 하면 안가고 못하면 가겠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심사로 승진이 결정 되었으니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를 하라고 했습니다. 내 승진을 도와주려고 당신의 오빠(연애할 때 나와 면접했던)의 처외삼촌인 고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K전북경찰국장을 만나고 갔었습니다.
(2014.8.2.흐리다, 비, 태풍 나크리)
4. 경감 승진을 하다.
1980년4월10일 경감승진과 동시 경찰국 작전과 작전 2계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습니다. 그해 7월 17일 수사과장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전주북부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전주 팔복동과 완주군을 관할했습니다.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를 보내는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보낼 사람을 경찰서에서 선발했습니다. 심사위원회에서 보내고 안보내고를 결정했습니다. 범죄자가 아닌 사람도 토색적비리 범이나 평소 폭력배가 해당이 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은 검사, 보안사요원, 수사과장, 지방유지 들이었습니다. 우리 경찰서에서는 존속폭행을 하는 사람을 주로 보내는 등 공정과 원칙을 지켰습니다. 나는 협박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내종에 완주군청 과장을 했던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보내야 할 사람이 갔다고 했습니다. 그해11월18일 전주경찰서 수사과 조사계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초대 경감 조사계장 이었습니다.
1981년10월20일 이리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토막살인 사건을 해결해서 L경사를 경위로 특진을 시켰습니다. 비 간부가 간부로 승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L경사를 데리고 경찰국 수사과장 관사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전에 전주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아서, 당시 전주경찰서 수사과장과 형사계장이 고문을 해서 허위 자백을 받았다고 옷을 벗은 사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4년1월7일 군산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해 11월11일 제7공수여단 제35대대 하사 두 명이 무장 탈영하여 민간인 3명을 사살하고, 군산 약속다방에서 손님을 인질로 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찰서장실이 상황처리 본부가 되어 7공수여단장, 공수특전단 사령관, 경찰국장이 서장실에 위치하며 지휘를 하여 11월14일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방송 신문 취재 기자가 27명이나 된 이 엄청난 사건은 잊을 수가 없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탈영병의 부모더러 다방에 들어가서 설득을 하라고 했는데 그 부모들은 들어가자 않았습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공수특전단 사령관의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서해안 키조개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불법조업을 하는 사람과 그들에게 돈을 강취하는 폭력배들을 형사들이 검거하여 돈을 받고 묵인 하였습니다. 형사반장과 형사 2명이 사표를 냈습니다. 그중에는 내 생질도 있었습니다. 사표를 낸 형사들이 돈을 받은 데서 과장인 나에게 10만원을 상납했다고 전주지방검찰청에다 처벌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습니다. 나는 받은 사실이 없다고 무혐의 처리되었습니다. 생질과 대질을 하는데
“야! 천벌을 받을 놈아, 외숙을 처벌해 달라고 진정을 해”
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군산에서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은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제당 대리점을 하는 오남덕 사장과 서해주류 정길수 사장은 지금도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군산을 떠나온 뒤에도 추석과 설 명절에는 선물을 보냈습니다. 나는 오 사장에게 나도 선물을 보내야 하니 그만 보내라고 했습니다. 정 사장은 지금도 추석과 설 명절에는 맥주와 소주를 선물로 보내고 있습니다. 1986년 군산을 떠났는데 지금까지 28년 동안을 선물을 보낸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아다 시피 그렇게 되기까지는 낸들 받고만 있었겠습니까? 세상만사는 give 앤드 take 이고 공짜가 없다는 것이 나의 철학입니다. 정 사장은 시의원에 3선을 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선거사무실 오픈 할 때에도 가서 꼭 당선되기를 빌었습니다. 시의회 의장을 하라고 했더니 자기보다 더 다선의원이 있어서 운영위원장만 한다고 했습니다.
1986년1월9일 전북경찰국 형사계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때 경찰국장은 청백리로 유명해서 전라남도 지사까지 한 백형조 국장님이었습니다. 그 국장님이 부임 할 때 내가 서울로 모시러 갔었습니다. 기자들이 나를 가리켜 왜 그 사람은 꽃길만 걷느냐고 시비를 했습니다. 백국장님은 나를 전주경찰서 경비계장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경비계장 자리는 경위 자리인데 위인설관이었습니다. 백국장님은 전주 서장더러 나를 위로해주고 잘 데리고 있으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전주서장님은 나에게 밥을 사 주면서 백국장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988년2월9일 경찰국 정보3계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자리는 승진이 보장된 자리였습니다. 경찰국 고(故) 박성보 수사과장님이 나를 전주경비계장으로 보낸 것이 미안해서, S경찰국장님을 만나서 그 자리로 보내달라고 하라고 코치를 하였습니다. 나는 수사과장님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정보3계는 학원, 종교, 문화, 언론, 의약을 담당했습니다. 학생데모 상황처리 등 할 일이 많아서 사무실에서 밤을 샌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사건은 임실 고추데모사건이었습니다. 임실에서 생산된 고추를 전량 수매해 달라고 시위를 하였습니다. 죽창을 들고 도로를 점거하기 까지 하였고, 신부(神父)가 경찰국장 면담을 요청하려고 상황실에 와서 농성을 하였습니다.
1990년2월9일 전국1위로 심사승진을 하였습니다. 도경 경비계장, 형사계장, 경제계장을 역임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시멘트 파동이 나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형사계장을 하면서 집을 짓는다고 내가 데리고 있는 J주임이 모함을 했습니다. 형사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지었습니다. 지하실을 파면서 옆집 담에 금이 가서 고발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여장부 같이 할 테면 하라고 하여 놓고 원상 복구를 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세 들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집을 지어 세를 내 놓을 때는 당신같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주어야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피부는 자외선에 강한 사람이라 모자도 안 쓰고 집 짓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2014.8.9.토. 흐림)
5. 장남 장가가다.
1993년6월13일 장남 재호가 김은주와 결혼을 했습니다. 형님과 자형 큰조카 에게 예식장에 입고 오라고 양복을 해 드렸습니다. 다음해 전주경찰서 경비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L전북경찰청장이 나이 많은 경정들을 전주경찰서로 좌천 시켰습니다. 경찰에 투신이후 교통 업무를 취급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원칙대로 업무를 취급했습니다. 백차를 타고 출퇴근 한 것은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지만 다중범죄 진압을 하기는 힘이 들었습니다.
1994년3월18일 손녀 영인(英仁)이를 얻었습니다. 당신은 딸을 못 낳았는데 우리집안에 공주가 태어났다고 아주 기뻐하면서 이름도 지었습니다. 나는 첫아들을 나아야 한다고 산부인과를 찾아 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손자도 태어나서 손녀를 얻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무척 예뻐합니다.
1995년4월16일 차남 재웅이가 신진숙과 결혼했습니다.
1996년4월15일 전주북부경찰서 경무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편한 경무부서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나와 경감교육동기인 김이섭 경찰서장에게 부임인사를 하였더니, 전주 경비과장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 편안히 쉬라고 한 말은 지금도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자서전을 내기 위해서 평생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8월28일 손자 대건(大鍵)이 태어났습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산부인과로 갔습니다. 지금도 당신은 손녀를 낳았을 때는 아무반응도 없더니 손자를 낳았다고 하니 쏜살같이 산부인과를 갔었다고 흉을 봅니다.
(2014.8.16.토. 맑다, 흐림)
6. 회갑 잔치와 정년퇴직.
1997년5월14일 전주관광호텔에서 나의 회갑잔치를 성대히 하였습니다. 나는 세 아들이 만든 말을 타고 입장을 하면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전북대학교공과대학 교수인 고향후배 유응교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명창 두 명이 판소리를 하고 나는 북을 쳤습니다. 유교수는 축시를 지어주었습니다. 축시에 나를 학(鶴)과 같고 청솔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호를 백학(白鶴)과 청송(淸松)이라고 지었습니다. 푸를 청자를 쓰지 않고 맑을 청자를 쓴 이유는 고인이 된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내가 깔끔하게 생겼으니 호를 지을 때 맑을 청자를 쓰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축의금을 받지 않고 경찰서에는 알리지 않아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1998년4월8일 그 서 보안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정년을 앞두고 한직으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10월1일부터 3개월간 연가를 냈습니다. 그때부터 당신과 함께 전주 모래내시장 근처에 있는 율계농악단에서 H라는 73세 노인에게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2월31일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나는 8명이 퇴직을 하는 정년퇴임사에서,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이 불에 타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 푸념을 할 때 당신이
“여보! 만물이 잠들어 있을 때 차를 타고 금산사를 가는 것은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 가십시오.”
라고 했던 말을 퇴임사에다 넣고, 내가 36년간 근무를 무사히 하고 정년퇴직을 하게 된 것은 당신의 덕이고, 단상에 앉아있는 7명의 사모님도 다 마찬가지로 내조를 하였을 것이라고 말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습니다.
(2014.8.23.토.맑음)
7. 쌍둥이 손자 태어나다.
1999년1월17일 둘째 며느리 신진숙이가 장건(長鍵)승건(昇鍵)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띠는 음력으로 따지니 호랑이 띠입니다. 소식을 듣고 우리는 서울에 있는 산부인과를 찾아갔습니다. 쌍둥이 외할머니가 딸더러 지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뱃속에 아이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소고기를 간도 안하고 먹었다고 했습니다. 힘들게 얻은 손자들이라서 정이 많이 가고 지금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그들의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185cm나 됩니다. 그 애들이 다녔고 다니고 있는 학교를 말해 볼게요.
(미국, 뉴저지 주)
Cresskill Middle School = 크레스킬 중학교
(가나, 아크라)
Lincoln Community School = 링컨중학교
(미국, 시카고)
Glenbrook North High School = 글린부룩 노스 하이스쿨. (2014년2월에 가서 다니고 있음)
시카고에서는 두 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국비유학으로 시카고 대학에 다닐 때인 2살 때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미국서부와 캐나다에 여행을 갔을 때 함께 갔었습니다. 지금은 키가 거의 다 커서 보기만 해도 든든합니다.
(2014.8.30.토. 맑음)
8. 판소리와 고법 배우다.
2000년1월3일부터 전북도립국악원에서 김미정 선생님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14년간을 같은 선생님에게 배운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14년간을 같은 길을 운전하면서 학원을 갔다 왔다 한일은 내 인생에 이 일뿐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할 때는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하지만 선생님 또한 제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나는 열심히 배워서 선생님이 판소리를 할 때 고수도 했습니다. 어느 눈이 많이 쌓인 겨울날 밤에 무주 티롤관광호텔 공연장에서 선생님이 판소리를 하고 내가 북을 쳤던 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2000년3월20일부터 인간문화재 고 홍정택님 으로부터 북[鼓法]을 배웠습니다. H선생님은 판소리 수궁가로 지방인간문화재가 된 분인데 북도 잘 쳤습니다. 그해 봄에 있었던 전국고수대회에 경험을 얻기 위해서 노인 부 출전을 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떨어져도 괜찮다면 두루마기를 맞추고 출전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출전을 해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습니다.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북을 배웠습니다. 그분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여자들과 C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C라는 사람이 배우는 수궁가에 북을 많이 쳤습니다. 홍선생님에게 배우고 C라는 사람의 창에 북 실습을 한 셈입니다. 홍선생님은 보청기를 끼고 있으면서도 판소리나 북소리는 잘 알아듣고 틀리면 바로 지적을 했습니다.
1991년4월6일 다시 전국고수대회 노인부에 도전을 하여 대상을 받았습니다. 상금 30만원은 관례에 따라서 선생님에게 큰절을 하고 드렸고 따로 사례비250만원을 N이라는 경찰후배를 통하여 드렸더니 50만원은 되돌려 주어서 받았습니다. 사례비는 심사위원들 식사비와 인사치레라고 했습니다. 돈을 주고 장원을 샀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아무리 잘 봐주고 싶어도 북을 못 치면 잘 봐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001년9월22일 전주관광호텔에서 당신의 회갑잔치를 멋지게 했습니다. 그때에도 물론 축의금은 받지 않았습니다. 서울 형님이 주신 100만원은 받았습니다. 우리도 형님 회갑잔치 때 100만원을 드렸습니다. 우리 경주 이(李)씨 집안과 당신 친정 장수 황(黃)씨 집안의 노래시합도 했습니다. 당신의 회갑연이라서 경주 이 씨가 저주기는 했지만, 당신도 아다 시피 노래실력은 이 씨 집안이 더 나았습니다.
나는 그 뒤로 고수대회일반부 대상(장관상)을 받기 위하여 대전, 순천, 해남, 완도 고수대회에 출전을 했습니다. 완도 일반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상을 받지 않아도 어디 가서 북을 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출전은 안했습니다.
2005년12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전라북도경찰청과 각 경찰서 포럼 시간에 판소리 강연을 하였습니다. 강연 방법은 내가 30분간 이론 강의를 하고, 대동한 명창 천명희, 김미정, 박미선, 윤소영, 김민숙 등이 판소리를 30분간하고 내가 북을 쳤습니다. 공연비는 경찰당국의 예산 범위 내에서 주는 만큼 받았습니다. 송동기 교장선생님의 요청에 의해 정읍정일여중학교 학생600명과 전주 평화중학교 졸업 예정자 3학년학생 400명에게 판소리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 모든 강의에는 당신이 매니저로 함께 다녔습니다.
2006년8월18일 한국 인삼공사 체험수기 모집에 1등(최우수상)을 하여 상금10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내가 모든 모임 하는 데서 밥을 사고도 남았습니다.
(2014.9.6.토.맑음)
9.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의 학생이 되다.
2006년9월6일 고향후배 류응교 교수의 안내를 받아서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에서 수필공부를 시작했습니다. 2007년2월21일 KT문화재단 재1회 1004에세이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그 글에 댓글을 잘 달았던 친구 임병규가 댓글 상을 받아 이런 재미있는 상을 받기는 처음이라고 나에게 밥과 술을 사주었습니다. 나는 본상을 받은 내가 사야지 이치에 맞지 않게 되었다고 했지만 기분이 짱이었습니다.
2007년5월 계간종합문예지 대한문학18회 수필 신인상을 받아 등단하였습니다. 2008년 봄에 수필1집 《노래하는 산수유 꽃》을 출간하였습니다.
전주 JTV방송국에 출연하여 정년퇴직한 뒤 이야기를 아나운서와 대담을 하였습니다. 그 TV를 보고 나처럼 경찰 경정으로 정년퇴직한 동료가 노년기를 황금기로 바꾼 이수홍 이라는 영상물을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브레이크뉴스 전북판에 판소리 칼럼을 1년간 연재하였습니다.
2008년3월29일 막둥이 재용이 은(殷)화연과 류응교님의 주례로 혼인을 하였습니다. 혼인식장에서 내수필집을 하객들에게 드렸습니다. 300권을 준비했는데 모자라서 늦게 참석한 하객에게는 우편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2009년3월27일 참 정형외과에서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파열상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유증으로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하는 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의료사고였습니다. 수술했던 의사가 폐암에 걸려 미국으로 떠나서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도 묻지 못했습니다.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전북대학병원에 2주간 입원을 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받은 고통에 대하여는 우리가족만 알고 여기에 기록하지 않으렵니다. 막둥이가 레조 차에다 나를 태우고 소낙비를 맞으면서 서울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게 하고 한약을 지어왔던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당연히 해야 할 효도라고 하지만 생가하면 생각사록 감동입니다. 전주 효자동에 있는 재활의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게 했던 장남, 언제 생각해도 든든합니다.
4월1일 손녀 은수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정형외과에 입원하고 있으면서 산부인과에 가서 은수를 보았습니다. 기분이 좋다고 통닭을 사다가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날 밤 잠은 안 오고 밤을 새면서 은수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성은李 이름의 가운데 자는 어머니 성을 따서殷 그리고 끝 자는 姬자로 지었더니 너무 흔한 자라고 아빠 엄마가 빼어날 秀로 고쳤습니다.
2010년9월20일 두 번째 수필집 《춤추는 산수유》를 출간하였습니다. 발문은 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교육장을 지낸 조카 이덕진(둘째 형님의아들)이 썼습니다.
“아름다운 황혼은 가슴 뛰는 청춘을 꿈꾸게 합니다.”
라고 글을 잘 써서 보는 사람마다 칭찬을 많이 하였습니다.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어도 정말 잘 쓴 글입니다.
2012년1월31일 손녀 은오가 태어났습니다. 은오 이름도 내가 지었습니다. 은수처럼 어머니 성 殷자와 밝을 오(晤)자로 지었습니다. 큰아들의 딸 손녀 영인이의 이름을 당신이 지을 때 항렬을 따르지 않고 지어서 은수 은오도 우리집안의 항렬을 따지지 않고 지었습니다. 여자들은 시집을 가면 아이를 낳아도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어 당신이 영인이 이름을 질 때 그런 것 까지 알고 지었나 봅니다. 그래도 은수와 은오는 이름의 첫 자라도 어머니의 성을 내가 넣어주어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의 성을 다 따르고 있으니 참으로 합리적이고 멋지게 지은 이름입니다.
2012년5월30일 세 번째 수필집 《북장구 치는 산수유나무》를 출간 하였습니다. 세 번째 수필집의 발문은 큰조카(큰형님의 큰아들) 준수가 썼습니다. 전에 서울에서 학원원장을 하고 학원 강사로 있을 때 논술을 지도해서 서울대학교를 많이 입학시킨 사람답게 잘 썼습니다. 나는 본문보다 발문을 더 잘 썼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잘 썼다는 이야기지 본문이 없었으면 발문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을 잘 쓴 것입니다. 책이 348페이지가 되어 약간 크게 느껴집니다. 네 번째 수필집의 원고가 다 되어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발문을 당신이 썼습니다. 책이 발간이 되면 읽는 사람이 저자의 아내가 발문을 쓴 색다른 책이라고 칭찬을 많이 할 것입니다.
(1914.9.13.토. 맑음)
10. 맺는 말.
여보!
다시 생각해봐도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앞에 내가 한 얘기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부자 집 막둥이로 태어나서 재산을 많이 가지고 당신을 만났으면 당신을 고생시키지 않았을 터인데, 경찰공무원 월급만 가지고 당신을 만나 고생을 많이 시켜 퍽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없이 만나서 모으면서 산 재미가 더 컸다고 한들 누가 시비를 안 할 것입니다. 고생이라고 생각 말고 재미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이사 다닌 경력을 말해 볼까요?
1) 익산시 갈산동에서 살림 시작 2) 남원 쌍교동 3) 전주 교동 4)무주읍 읍내리 5)무주읍 주계리 6)장수읍 장수리 7)군산 죽성동 8)군산 중앙로2가 9)전주 교동 경기전 앞 10)전주 중노송동1가255번지 처음으로 우리 집 마련하여 전적 11)전주 인후동 2가 모래내 12)전주 금암동 전북일보사 뒤 13)전주 중화산동 동원맨션 아파트 14)전주 중화산동 오성 은아 아파트 15)전주 평화동 코오롱아파트 16)전주 효자동 삼성아파트 17)전주우아동 3가 726-8 현재 살고 있는 집입니다. 이렇게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나는 공무에 바빠서 도와주지 못하고 당신이 혼자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사를 할 때면 버려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버려야 할 것 들을 버리려고 이사를 다녔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당신은 집세를 받고 있습니다. 나의 20년 연금과 당신이 받은 집세 9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2년4월2일 아침 8시10분에 우리 집에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1층이 두 칸인데 한 칸에서 불이 났습니다. 당신과 나와 은수는 옥상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재산상의 피해는 있었지만 인명에 피해는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불난 곳 새로 입주한 사람은 의류판매업을 하고 있는데 잘 팔리고 있습니다. 불이나면 불같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다. 당신은 집세 받는 일에 선수인가 봅니다. 미국 시카고 총영사관에 있는 둘째 아들 내외에게 집세 30만원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추석 전날 재웅이 한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 추석명절에 어머니 아버지 맛있는 것 사 잡수시라고 30만원 보냈습니다.”
“오냐 고맙다. 너희들 형편도 어려울 텐데 뭣 하러 보냈어.”
“여보 재웅이가 돈30만원을 보냈다 네요.”
“당신은 우리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집세를 30만원씩 받더니 미국 시카고에도 집을 사서 세를 받는가 보네요.”
둘이 함께 웃었습니다.
마신 숨 뱉지 못할 때 까지 이집에서 살게 될 것인데, 그도 또한 앞날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나는 도립국악원에 가서 판소리 공부하고,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에 가서 글공부 하고, 당신은 전도하러 나갑니다. 일요일에는 당신은 회관에 가고 나는 목욕탕에 갑니다. 평일 오후 5시20분에는 유치원과 어린이 집에서 오는 손녀 은수와 은오를 받아서 밥 먹여서 그들의 부모에게 인계하는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평화동 H병원에서 양쪽 무릎 수술을 하라고 할 정도로 아팠는데, 우리 집 건너편 D정형외과에서 약 1주일분을 먹고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손녀 은수, 은오를 보기 때문이라고 자랑을 많이 합니다. 내가 봐도 당신은 아프고 싶어도 아플 시간이 없어서 못 아픕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100세 시대라고 하니 목표는 100살까지 살기로 정해놓고,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4년(나와 4살차이) 뒤에 나를 딸아 올 것을 부탁하면서 줄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이수홍 드림.
(2014.9.20.토.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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