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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 친견제자와 만나다 / 성보영 전 원광여자중학교장 | ||||||||||||||||||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성안 가지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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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추모의 달을 맞아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한 제자와의 만남을 기획했다. 친견 당시의 심경과 에피소드를 듣고 그 후로 스승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왔는지 선·후진의 만남을 통해 들어보았다. 1주 예타원 전이창 종사와 김도준 예비교무, 2주 연타원 성보영 정토와 이성진 새내기 정토, 3주 노산 전성완 종사와 조상원 예비교무, 4주 융산 송천은 종사와 정현인 교무가 함께했다. (편집자 주)
- 대종사와 첫 만남은 어디인가요. 총부 구내에 가족들이 살아서 태어날 때부터 대종사를 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보영'이라는 법명도 대종사께서 내려 주셨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은 없다. 대종사 할아버지에 대한 첫인상은 체격이 매우 컸고,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어린 나의 입장에서는 때론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성안을 가지셨다. - 대종사님과 관계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대종사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놀기도 하고, 한편으로 꾸중도 칭찬도 많이 듣고 자랐다. 총부 구내에 살아서 또래 송전은, 전팔현, 송영지, 조개운, 이덕윤 등 전무출신 자녀들이 많았다. 아침 마다 조실에 인사드리려 가는 것이 습관이 됐다. 아이들끼리는 경쟁이 되어 어느 때는 대종사 할아버지가 기상도 하기 전에 조실에 들어가 큰 절을 했다. 아이들이 하도 극성이다보니 시봉하던 교무님들이 계단 아래에서 인사를 하라고 했다. 시봉진 교무님들에게 혼도 많이 났다. 대종사께서는 아이들에게도 공짜는 없었다. 구조실 근방의 잡초를 뽑게 시키시고 어느 정도 했다 싶으면 사탕을 주셨다. 또 대종사께서는 아이들과 산책을 나갈 때는 꼭 손을 잡고 위인 달사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말씀해 주셨다. 어린이회(당시 子供會=고도모가리)에 10가지 교훈을 내려줬다.'도둑질을 하지 말라, 악구를 하지 말라,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 하자, 거짓말을 하지 말라' 등 십훈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됐다. 총부 또래 아이들은 주산 송도성 종사와 묵산 박창기 대봉도의 지도를 받았다. - 가족들이 불법연구회로 입회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후 아버지가 영산성지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아버지(誠山 成丁哲 종사)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이다. 백모님과 그의 친정 조카 조철제(趙哲濟·일명 趙天子)와 인연돼 조모와 가족들이 낯설은 전라도 구 태인으로 이사를 왔다. 그 당시 보천교는 십일전(현재 서울 조계사 대웅전)뿐만 아니라 자가용을 굴릴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증산 선생의 뼈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광경을 보고 회의를 느꼈고,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환희심이 나 불법연구회 전무출신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아버지가 영산에서 20여년을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영산에서 3년에 한번 꼴로 총부를 찾아왔다. 당시 총부 생활이라는 것이 창립기라 궁핍한 삶 그대로였다. 시련과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 무거운 짐을 온전히 할머니(建陀圓 孫學敬 정사)와 어머니(忍陀圓 李七星 정사)가 지고 가셨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러는지 대종사께서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 대종사님과 또 다른 추억은 없는지요. 대종사 할아버지는 상벌이 정확하셨다. 학교 성적표를 갖고 조실로 가면 성적 좋은 친구들은 다락 속에서 사과 하나씩를 주셨다. 다만 성적이 안 좋은 친구들은 사과 대신 회초리를 때리기도 하셨다. 어떤 때는 남자 아이들이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여자 아이들도 들어가 보라고 핀잔을 줬다. 여자 아이들이 무서워서 못 들어가니까 남자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리면서 약을 올렸다. 내가 화가 나서 대종사 할아버지에게 고했더니 남자 아이들이 위험한 장난을 한다고 회초리로 혼내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남자 아이들의 잘못을 어른에게 일러 바치는 것도 법도에 맞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대종사 할아버지가 열반에 드셨던 날은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11세) 초여름,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 총부 정문에서부터 온통 울음 바다였다. - 할머니 회갑식도 대각전에서 했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대각전에서 회갑식을 진행했는데 이때도 영산에서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대종사께서 아버지를 대신해 주산 송도성 종사가 나가 할머니께 큰 절을 올리라고 하자, 주변의 남녀 교무들이 함께 나와 할머니께 절을 올렸다. 이 광경을 본 어린 내 마음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감동을 받았다. 나는 어려서 5~6세까지 아버지를 모르고 성장했다. 그래도 추억이라면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아사히(朝日) 운동화(당시 배급받음) 한 켤레를 선물로 주셨다. 아버지는 원불교 공가(公家)의 아버지로 나의 아버지가 아닌 듯 했다. 학교 행사에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이화여대 법학과) 졸업식 때 단 한번 참석하셨다. - 교육자로 일생을 살아온 것으로 압니다. 대학에서 전공은 법학을 했는데, 아버지가 대학 졸업식 날 와서는 나를 바로 익산으로 데리고 갔다. 법조인에 대한 꿈도 서울에서 미래를 개척하고자 했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익산으로 내려와 원광중학교 교사로 연구부장, 교감, 교장을 지냈다. 원친으로서 학교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일을 했다. 결국 학교가 내 집이고 내 살림 아니냐. 초기에는 봉급도 못 받을 정도로 열악했지만 주춧돌을 놓는다는 심정으로 학교 운영에 정성을 다한 결과 지금의 원광중학교가 됐다. - 후배 정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자녀를 다 키우고 나면 여러 가지로 여유가 있어서 공부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아니다. 나이가 드니 힘도 없고 눈과 귀가 어두워져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정토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에 정진하라. 성불제중의 대원으로 대원정각을 이루라'. 나는 그래도 대종사께서 남녀권리 동일을 주장해서 그 영향으로 간고한 살림이지만 대학까지 나왔다. 어머니가 나를 아들처럼 키워줬다. 뿐만 아니라 대종사께서 자력양성을 가르침으로 주셨는데 어머니도 정토로서 그 가르침을 잘 받들었다. 나도 스스로 정토의 길을 선택해 배운 대로 자력양성으로 가정을 지키고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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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경합니다~♡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