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대왕 : 광해군 (1575-1641년. 재위 : 1608년 3월-1623년 3월. 집권 15년. 유배18년).
우여곡절 끝에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 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 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그의15년 재위 기간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623년 김류 ,이귀,김자점 등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인조)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 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었다. 이기간 동안 그는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 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쳐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 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 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토록 지탱시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1641년 귀양생활 18년만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유배생활 1년7개월 만에 화병을 얻어 죽고 만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폐 세자와 세자빈은 두 달만에 자살하고 만다.
● 김직재의 옥(1612년) :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 하기위해 어보,관인을 위조한 사건으로 대북파는 고문 과정에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이 대거숙청 당했다.
● 허균 (1568-1618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 그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 뛰어난 문장가이며 임란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 옴. 또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셈세 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 하기도 했다.
그는 26세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 급제함. 1613년 '칠서의 옥' 란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했으며,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1615년 승문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 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 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그는 그 즈음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 서얼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또 '북방에 오랑캐가 쳐들어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소문이 점차 미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 에는 황급히 피난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 한 것이다. 현응민으로 부터 모반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섯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게 그러한 부정적인 소견 을 대변해 주고있다. 『홍길동전』『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등 을 남겼다.
문성군 부인 유씨(文城君 夫人 柳氏);-폐세자(이지),
숙의 윤씨(淑儀 尹氏);-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