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의미에 부쳐
1월(January)을 서양식으로 그 어원을 찾아보면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Janus)'의 달이 됩니다. 라틴어 Januarius(야누스의 달)에서 유래된 달이라고 합니다. 야누스 신은 문의 신으로서 문의 이쪽과 저쪽, 즉 나아감과 되돌아봄을 관장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앞과 뒤 양면에 두 개입니다. 앞과 뒤를,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모두 다 볼 수 있는 신이지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짜르트의 유작이었던 레퀴엠과 함께 떠오르는 야누스 신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모짜르트에게 레퀴엠(장송 미사곡)을 의뢰하고 독촉하였지만, 결국 완성을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마치 죽음의 사신처럼 모짜르트의 아버지를 암시하면서 나타나던 사람이 바로 야누스 가면을 썼었지요. 모짜르트에게 한없는 애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의 양면성을 상징하던 모습이 야누스였다는 것은 얼마나 함축적이었던지.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한 얼굴에는 무한한 자부심과 또 다른 얼굴에는 치욕과 부끄러움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곤 합니다. 로마시대에 야누스 신전의 문은 전쟁이 시작되면 열리고, 평화 시에는 닫혀있었다고 합니다. 전쟁과 평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야누스는 그래서 양면성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지요. 양면성의 신 '야누스'를 뜻하는 새해 1월을 맞이하며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세상의 시작부터 양면성은 함께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령 나의 장점은 거의 대부분 나의 단점과 통해 있고, 위기가 또한 기회이기도 하듯이, 사이버의 매력인 익명성이 아주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큰 함정이 될 수도 있듯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장점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여는 모습이 때로는 푼수로 보일 수도 있고, 조심스러움은 때로 답답함으로 남들에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 사물의 양면성을 조금은 헤아리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지천명을 훨씬 넘기고도 너그럽지 못한 마음은 무엇을 고집하고 또 무엇을 배척하게도 되는데, 아마도 이런 마음의 운용들은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편견으로 사물을 대하거나 사람을 바라보는 결핍이기 때문일 겁니다. 삼백육십오일 중에 단 며칠이나 혹은 단 하루라도 1월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또 삶의 의미며 과정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인데 오늘은 1월이란 의미를 서양의 어원을 통해 생각해보면서 마음에 새겨보게 됩니다.
서양의 달력으로 보면, 1월은 물론 지난 것이 되지만 ‘설날’이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새해 첫날이기에 서양의 어원을 우리 전통에 맞게 차용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자신들이 쓰는 양력 1월 1일에 맞게 우리의 전통 명절을 강제적으로 바꾸려던 정책으로 신정이니 구정이나 하는 말이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남아있기도 하지만, 우리의 전통 속에는 신정이니 구정이니 하는 말은 없고 설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업화에 의해 급진적으로 변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부터 통일성이 강제되면서 우리의 설날은 잠시 구정이니 신정이니로 나뉘고는 했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전통을 회복하며 음력 1월 1일의 설날이 우리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통을 통해 보면 바로 오늘이 새해 첫날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서양으로 치자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신의 달에 우리 귤림문학회 모든 회원들께서 양면성을 모두 아우르며 이해할 수 있는 출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현의 전통으로 보면 귤림문학회의 전통은 일천하지만 선배와 후배가 마주 앉아 오현의 전통을 말하며 경외하고 문학의 진실을 나누며 깊어지는 출발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해 소망하는 일 하나씩 따뜻한 마음처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또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5년 2월 19일
귤림문학회
사무국장 좌정묵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