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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칭다오 여행기
시작
아내는 늘 피곤해 했다. 뉴머티스로 고생하다가 근래에는 당뇨까지 왔다. ‘국수나무’를 운영하며 얻은 병이다. 지난겨울에는 결혼 25주년을 기념해서 베트남여행을 계획했다가 아내 허리병 수술이 순조롭지 못해 나와 아이들 둘만 여행했다. 그래저래 아내에게 쉼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9일 간의 추석연휴가 다가왔다. 연휴기간 혼자 여행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내와 오붓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딸아이가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칭다오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선뜻 동의했던 아내는 날짜가 가까워오자 바빠서 갈 수 없다고 번복했고, 다시 열흘쯤 전에는 다시 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변덕스런 태도에 바빠진 건 나였다. 부리나케 항공편을 예약하고 비자를 발급받은 뒤 칭다오의 딸에게는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일정을 잡아보라고 일렀다. 새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국여행은 비자발급이 필요하다. 비자발급은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들었다. 아내에게 서울에 한 번 다녀오라고 했더니 돈을 더 주더라도 대행업체에게 의뢰하라고 한다.
첫째 날.
칭다오는 참 가깝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불과 1시간 20여 분만에 류팅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황해바다는 푸르렀고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형성된 칭다오시는 유럽의 여느 휴양도시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마중 나온 딸과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40여 분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2박에 16만원쯤으로 예약한 호텔은 가격 대비 깨끗하고 넓었다. 짐을 풀고 마음도 힐링하고 배도 채울 겸 호텔 근처 5.4 광장으로 나갔다. 5.4광장은 1919년 5월에 발생한 중국 5.4 반제국주의운동을 기념하여 조성된 광장이다. 1차 대전 후 승전국 일본은 패전국 독일과 중국정부에게 칭다오를 비롯한 칭다오를 비롯한 산동성 일대의 독일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라는 내용의 21개조를 요구했다. 이것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승인하려하자 이것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5.4운동. 이 운동의 중심은 베이징대학교 학생들이었지만 칭다오는 그 시발점이 되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5.4광장은 칭다오 관광의 필수코스다. 광장 안에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붉은 횃불로 타오르는 5.4광장 기념 조형물 ‘오월의 바람’ 앞에는 사진 찍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특이했던 점은 광장 안의 관광객들은 한국사람이나 서양인들 보다는 대부분 중국 관광객이라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칭다오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요트장을 가로질러 점심을 먹으로 갔다. 딸아이가 준비한 첫 번째 음식은 ‘선가어 만두’집의 산동식 만두다. 선가어만두집의 만두는 해양도시 칭다오에 걸맞게 새우와 게로 만두속을 만들어 감칠맛을 더했다. 하지만 맛있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선 양이 너무 적었고 독특한 향신료에 아내가 적응하지 못해 당혹스럽게 했다.
점심을 먹고 3시간가량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묵은 피로에 아내도 힘겨워 했고 새벽에 출발하느라 나도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피로에 치쳐 있는 우리 부부를 위해 딸아이가 준비한 프로그램은 ‘중국 맛사지.’ 호텔로 ‘북경오리’를 배달시켜 먹은 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맛사지 샵으로 향했다. 아내는 평택에서도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맛사지샵을 이용했었고 나도 동남아 여행 중에 두세 번 맛사지를 받았던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우리가 들어간 맛사지샵은 허름한 외부와 달리 시설도 준수했고 맛사지사들의 수준도 높았다. 나를 담당한 맛사지사는 작심한 듯 과감하게 몸 구석구석을 맛사지했는데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희열도 대단해서 끝내고 났을 때는 온 몸이 개운한 느낌을 주었다.
둘째 날.
아침 늦게까지 잤다. 아내도 늦잠을 잤지만 딸아이는 그동안 피로가 쌓였던지 아침 10시까지 쉬지 않고 잤다. 전날 사온 빵으로 아침을 때웠다. 아침을 먹은 뒤에도 계속 침대 위에서 빈둥댔다. 여행의 주목적이 아내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라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해양도시 칭다오는 마땅히 가볼만한 유적도 없어 답사에 대한 기대감이나 욕구도 일지 않았다.
처음 계획대로 소어산을 관광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소어산은 구도시(청양)와 신도시(청도)를 연결하는 중간에 있다. 산은 높지 않지만 칭다오 해안이 낮은 지형이어서 근처에서는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속한다. 날씨가 참 좋았다. 딸아이는 축복받은 날이라며 헤헤거렸다. 소어산에서는 근래 없는 맑은 날씨 덕분에 주변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소어산 동쪽 해수욕장에서는 초가을인데도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서남쪽은 외국인 거주지가 있어서 전형적인 서유럽풍의 풍경을 연출했다. 아내와 딸아이는 전망대를 오르내리다가 긴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수다를 떤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아이의 모습이 아내의 나이든 모습과 오버랩 된다.
점심을 먹으러 칭다오 시내의 유명한 백화점으로 갔다. 5층 식당가에 위치한 체인으로 운영하는 중국 백반집에 들어갔는데 점심시간인데다 음식 맛이 좋아서인지 손님이 많았다. 칭다오는 여느 중국 도시들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중국인 거리라고 하면 지저분하고 무례할 만큼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칭다오에서는 그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깨끗한 거리와 골목, 세련된 패션의 시민들,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거의 없는 거리풍경도 여느 중국 도시들과 달랐다. 메뉴를 고르는 시간이 길었다. 종업원들이 브레이크 타임이 가까웠다며 얼른 주문하라고 재촉한다. 사진을 보고 대충 먹을 만한 음식으로 너 댓 가지 주문했다. 음식들은 대체로 맛있었지만 아내가 고른 붉은 빛 나는 스프는 시큼한데다 독특한 향신료 때문에 많이 먹지 못했다. 나는 별도로 돼지 족발같은 음식을 시켰다. 양념이 배인 푹 익힌 고기가 입맛을 돋웠다. 음식값이 싼 것은 이 집의 미덕. 네댓 가지 음식을 시켰는데도 불과 96위안(1만 6천원)이다.
오후에 답사한 칭다오 맥주공장과 맥주박물관은 참 인상적이었다. 이곳의 특징은 칭다오맥주(청도 비주)를 스토리텔링하는 박물관과 함께 지금도 맥주를 생산하는 공장시설을 전시 및 체험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맥주박물관은 곧 칭다오시의 역사박물관이다. 19세기 말 칭다오를 점령한 독일은 이곳에 맥주와 붉은 기와지붕을 남겼다. 맥주공장은 1903년경부터 운영되었는데 1949년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한 뒤에도 발전을 거듭해서 1960년대에는 중국 2대 명주로 지정받기도 했다. 생산 공예 구역이라고 부르는 맥주생산공장은 중간쯤에서 땅콩 안주와 함께 방금 생산한 맥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한다. 마침 목이 컬컬하던 차에 마신 신선한 맥주한잔이 일품이다. 칭다오맥주 공장은 전국에 60여 개나 된다. 칭다오시의 것은 본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장마다 사용하는 물이 달라서 맥주 맛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이곳의 맥주는 맑고 구수한 맛과 깨끗한 목넘김의 조화가 일품이다. 맥주는 1층 상품매장에서도 한 잔씩 무료 제공되었다. 신기한 것은 널따란 홀에 관광객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다보면 자연스럽게 기념품 매장으로 발길이 간다는 점이다. 이것을 중국인들의 고도의 상술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관광객에 대한 배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크게 기분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한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밖에는 맥주거리가 형성되었다. 칭다오 맥주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성업하는 모양세지만 전략상 보기 좋았다.
아내는 중국음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만주답사를 할 때 나도 그랬다. 꼬치구이에 뿌리는 향신료도 역겨웠지만 고수나 청채를 넣은 음식들은 입을 대지 못했다. 아내도 그 때 나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아내의 부적응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딸아이였다. 자신을 만나러 중국까지 날아온 부모님께 멋진 여행을 선물하고 싶은데 엄마가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하니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결국 딸아이가 내린 처방은 한국음식. 딸아이 학교 근처에 평소 자주 가는 삼결살집이 있다는 거였다. 더구나 그 식당 주인은 딸아이가 뛰는 축구동호회 단장님이기까지 해서 개인적 친분도 두텁다고 했다.
식당은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었다. 중국 택시는 기본요금 1천원에서 시작하는데 20분 거리면 대체로 20위안(3,2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 딸아이는 일반택시보다 자가용택시를 애용했다. 1980년대나 볼 수 있었던 자가용 택시를 이곳에서 다시 본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이곳에서는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부르고 있어 시스템 면에서는 옛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한국식당 ‘화통’은 손님들로 바글거렸다. 딸아이는 사장님과 반갑게 인사하더니 오지랖 넓게도 아르바이트 하는 종업원, 한쪽에 앉아 밥을 먹는 학교 오빠와도 인사했다. 삽겹살과 김치찌개를 먹은 아내는 환호했다. 그동안의 음식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날아간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딸아이와 함께 기숙하는 한국학생들도 두 명 불러 고기를 먹이고 적으나마 용돈도 쥐어줬다. 그렇게 북적이며 함께 밥을 먹은 뒤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딸아이에 대한 걱정, 이틀 동안 쌓인 스트레스도 모두 날아간 느낌이었다.
셋째 날.
오후 4시 10분 발 비행기표를 끊었다. 딱히 가볼 데도 없는 칭다오에서 여유로운 시간은 오히려 짐이 되었다. 이틀 동안 고생한 딸아이에게서 몸살증세까지 나타나 난감함이 더했다. 얼굴도 씻지 않은 채 해열제라도 얻을까 해서 프런트에 내려갔지만 준비된 것이 없다고 했다. 겨우 물어물어 호텔 건너편 까루프라는 마트에 약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손짓 발짓으로 겨우 소통한 뒤 받아든 약은 중국 한약재로 만든 가루약. 약봉지를 들고 돌아서는데 건너편에 빵집이 보였다. 문득 보름 뒤에 있을 딸아이 생일이 생각나 케잌을 하나 사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아침을 굶고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식당에 들어가 테이크아웃이 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며 두어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10분쯤 기다렸을까, 음식이 나왔다고 해서 받아드는데 두 개가 아니라 무려 다섯 개나 되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다섯 개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대략 난감함. 보디랭귀지가 불러온 비극이었다.
아침 10시 30분이 넘어서야 호텔을 나섰다. 남은 시간 무엇을 할까 상의하다가 아내의 의견에 따라 맛사지를 한 번 더 받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맛사지 샵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이번에는 1시간짜리를 주문했는데 발 맛사지를 제외한 전신 맛사지를 해준다. 맛사지라는 것이 참 희한해서 첫날 받을 때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도 다시 받으려니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이걸 새디즘이라고 해야 할까. 점심은 첫날 저녁 맛사지 받고 왔었던 그 식당(이름은 까먹음). 가지튀김과 꿔바로우, 계란밥을 시켰는데 양도 많고 특히 가지 튀김 맛이 일품이었다.
후기(後記).
열이 오르는 딸아이를 병원으로 보내고 아내와 공항으로 향했다. 딸아이는 공항까지 배웅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우리는 딸의 몸살감기가 더 걱정되었다. 칭다오 시내에서 류팅공항까지는 택시로 대략 40, 50분 거리. 딸아이가 부른 자가용택시(무허가 택시)는 반갑게도 기아자동차의 K-7. 이럴 때 불끈 솟아오르는 민족주의적 감성이 우스웠지만 세계자동차박물관 같은 중국의 도시에서 당당히 우리나라 자동차가어깨를 마주한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분 좋았다.
딸과 아내는 나를 못미더워했다. 지난 2월 베트남여행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딸아이에게 공항수속을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모르면 찬찬히 살피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공항 직원들에게 물으면 되었다. 입출국 수속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중국은 기본적으로 ‘Welcom!’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이웃나라 관광객들에게까지 비자를 발급받게 하고, 1980년대 김포국제공항처럼 공항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검색하며, 검색대의 직원들은 관광객들을 무슨 죄인 다루듯 한다. 대국의 기질일까, 아님 근래 부활하고 있는 중화주의 탓일까?
내 배낭은 빵빵했다. 또 두 손에는 아내가 칭다오맥주박물관에서 구입한 땅콩상자가 세 봉지를 들었고, 면세점에서는 남은 중국 돈을 소비한다며 중국백주를 두 병이나 구입했다. 더구나 아내의 반대로 짐도 붙이지도 못하는 바람에 나는 흡사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장수 같은 행색이 되었다. 그 많은 짐들을 주렁주렁 들고 공항을 오가는 것도 창피했지만 선반에 올려놓기 위해 서둘러 탑승하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꾹 참았다. 아내에게는 신혼여행 후 처음으로 다녀오는 해외여행 아닌가. 그런데도 아내는 자기를 안 챙겨준다고 투덜댔다.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모두 당신 짐이잖아, 나도 우아하게 여행하고 싶어’....
한 시간 남짓, 비행기는 짧은 비행을 마치고 우리를 인천공항에 내려놓는다. 결혼 후 처음 가본 우리부부의 해외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참 아득하고 즐거웠다. (201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