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카피하다
20대 후반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 결혼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서른이라는 나이에 노총각 딱지가 붙던 시절. 몇 번의 소개팅을 한 뒤 대전사는 누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내 결혼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먼저 개신교인일 것과 처음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봤을 때 더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것. 두 번째 만났을 때의 느낌이 좋아 세 번째 만남에서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만남 뒤 결혼하기까지 6개월 동안 우리는 대전 시내를 누비며 데이트를 했다. 학사주점에도 갔고 두루치기로 유명한 광천식당, 두부요리로 유명한 진로집, 대전역 앞 원동의 칼국수거리에도 갔다. 그러던 그 해 겨울 대흥동과 은행동 사이를 오가다 아내가 유명하다고 잡아 끄는 은행동 어느 빵집에 들어갔다. 평택에서는 보지 못했던 3층짜리 거대(?) 빵집이었다. 아내는 대전에서 유명한 빵집이라며 단팥빵과 소보로를 사서 내 손에 들러주었다. 그 뒤에도 은행동에서 데이트할 때면 종종 그 집에서 빵을 먹었다. 빵집 옆 3층 건물에 있었던 라면전문점에 갔을 때도 빵만큼은 이곳에서 샀다. 그 집이 ‘성심당’이다.
‘2017년 평택시 한 책 읽기’ 심사도서에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이 올랐다. 그것도 기호 1번을 달고 있어 금세 눈에 띄었다. 책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정말 기뻤다. 빨리 읽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심의하는 시간 내내 아내와 만났던 25년 전의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심의 과정에 사심(私心)도 개입되어서 다음 차 심사도서에 넣어야 한다고 강변까지 했다. 내 호소가 통했던지 ‘성심당’은 살아남았다.
회의 뒤 나에게 배당된 책들 가운데 ‘성심당’이 빠졌다. 하지만 나는 최우선으로 이 책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책을 내보였다. 아내도 책을 보자마자 무척 반겼다. 그리고는 ‘성심당의 기부행위’, ‘6월 항쟁 때 학생들을 숨겨주고 빵을 나눴던 이야기’, ‘성심당 화재사건’과 같은 옛 추억들을 줄줄이 끄집어냈다.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은 잘 읽히는 책이다. 사실 지역 빵집 60년 이야기를 담은 책에 심오한 철학이나 사회학적 의미가 담겼을 리는 없다. 앞서 말했듯 책의 내용은 대전에 있는 빵집 ‘성심당’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읽는 내내 빠져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약간의 그리움이나 아내와 맺어준 보은(報恩)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고소하고 달콤했던 ‘튀김 소보로’에 대한 애착 때문도 아니었다. 성심당의 가장 큰 매력은 60년 동안 대를 이어 전승 발전된 ‘나눔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같이 일해서 모든 걸 독식하는 졸부나 기업의 이미지 재고를 위해 진정성 없이 나누는 재벌들처럼 살아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치지향적인 삶과 성실한 나눔으로 빵집을 운영했던 점이 영감을 갖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했다.
사실 ‘나눔과 섬김’은 우리 집 가훈이고 내 삶의 모토이다. 가훈(家訓)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도 거실 벽면에 글귀를 걸어 놓은 적은 없다. 다만 우리 아이들이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본받아 그렇게 살기를 기대했을 뿐이었다. 내가 평택지역사를 연구하게 된 것도 멀게는 대학시절의 체험과 공부에 있었지만, 가깝게는 교사를 시작하며 품었던 나눔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아무도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맨 땅에 헤딩하며 지역사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나눔에서 출발한 일 조금 힘들어도, 때론 강의료를 받지 않아도 마냥 즐거웠다. 그러다 연구 성과가 쌓이고 주위의 기대와 칭찬을 받으면서 점점 ‘나눔’의 가치를 잃어갔다. ‘나눔’을 잃은 삶은 무료하고 지치게 했다. 일의 즐거움과 열정도 빼앗아갔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며 살아온 날들을 반추했다. 초발심을 되새겼다. 그런 나에게 ‘성심당’은 처음 꿈꾸었던 발심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했다. 작지만 성실한 나눔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하려던 청년시절의 꿈 말이다.
(20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