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作 관련하여 경주 동국대에서 발간하는 <동대신문>(경주판, 2016년 5월)에 실었던 글입니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로 보는 세상이야기-4
시작(詩作) 연습
불교학부 교수 김성철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국민 시’가 있다.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이 시로 인해 안도현은 ‘국민시인’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채 한 줄도 안 되지만, 메시지는 강력하다. 버려진 것의 숨은 가치, 전혀 몰랐던 그의 열정, 질타와 자책 …. 이렇게 지극히 짧은 글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용기를 얻어 수 년 전부터 시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전에는 연구와 관련하여 가끔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스마트 폰 노트에 메모하곤 했는데 요새는 그런 착상보다 시를 흉내 낸 글들을 더 많이 쓴다. 시상이 떠오르면 멈추어 서서 스마트폰 자판을 눌러서 문장으로 만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다. [하이픈(-)으로 제목과 내용을 가르고, 사선(/)으로 줄과 줄을 구분했다.]
“구름 - 맑은 하늘이 심심해서 떴다.”
“높이 떠가는 헬리콥터를 보고서 - 거기도 텅 비어 있는 걸 알겠다. / 네가 가는 걸 보니 …”
“낙엽 - 너 … / 결국, 떨어지고 마는구나.”
“가을 은행나무 - 그새 흠뻑 젖었구나. / 노랑에 …”
“초겨울에 - 다 떨어졌구나. / 은행잎 … / 계절의 힘을 어찌 이기랴.”
“모기 - 하! 고놈 참 / 조그만 게 맵다.”
안도현 시인의 짧은 시에 용기를 얻어 시작(詩作) 흉내를 내다보니, 작문의 호흡이 길어져서 좀 더 긴 시도 쓸 줄 알게 되었다. 산길을 걷다가 거대한 퇴적암의 줄무늬가 경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먼 옛날부터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수평 방향의 압력으로 땅이 기울었을 것이다. 길을 멈추고 시상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기울은 단층을 보고서>
너희가 대지의 호흡을 아느냐?
너희가 대지의 꿈틀거림을 아느냐?
억만년이 지나야 겨우 한 번 뒤척이는
대지의 잠을 아느냐?”
억만년에 겨우 한 번 뒤척이는 대지의 느린 움직임과 비교할 때, 하루 종일 사지를 흔들어대고, 머릿속은 오만 잡생각으로 분주한 내가 조잡하여 부끄럽다. 조금 더 긴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개같이 생긴 개>
오늘 개같이 생긴 개를 봤다.
참 오랜만이다.
진돗개를 닮았지만
주둥이가 좀 긴 잡종이다.
인형 같은 개, 사자 같은 개,
입이 뭉툭한 개, 거미 같은 개만 봤는데 …
오늘 참 오랜만에
개 같이 생긴 개를 봤다.
강남 고수부지에서
개는 늑대와 조상을 같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돗개 비슷한 황구가 개의 원형일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그런 개를 보기 힘들다. 서울의 강남에서는 더욱 그렇다. 털이 수북한 요크셔테리어, 수억 원대를 호가한다는 사자견 짱아오, 매끈함 몸매에 다리가 거미처럼 가는 도베르만, 입이 뭉툭한 찡 …. 이들 모두 ‘개의 이데아’인 황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개’ 같은 개를 만났다. 참으로 반가웠다. 그래서 쓴 시니컬한(Cynical) 시였다. [시니시즘(Cynicism)은 ‘개’같이 생활하던 견유학파의 냉소주의를 의미한다.]
개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개를 소재로 쓴 시 한 편을 더 소개하겠다. 재개발 붐이 일면서 대부분의 옛 동네가 사라졌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가 그런 모습이었기에, 옛날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끔 집사람과 함께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산동네 골목길을 걷는다. 옛날 대문, 왕모래 벽돌로 쌓은 담장, 담장 위에 박힌 방범용 유리병 조각 …. 사라졌던 과거와 만난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동네가 너무나 조용했다. 사람 소리는 물론이고 개 짓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어느 집 대문이 열리면서 개 한 마리가 보였고, 그 개가 우리를 향해 짖어댔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가래 뱉는 소리처럼 ‘컥컥’ 하며 짖었다. 성대가 없는 개였다. 다른 집 대문 안에서도 ‘컥컥’하며 짖는 시늉을 하는 개의 모습이 보였다. 추정컨대 개 소리가 시끄러워서 이웃 간에 다툼이 있었고, 결국 그 동네의 모든 개들이 성대 제거 수술을 받은 것이리라. 옛날과 만나기 위해 산동네로 갔는데 인정은 변해 있었다. 이방인을 향해 열심히 짖어대는 개에게서는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그날의 비감을 시로 옮겼다.
<성대 없는 개>
보문동 산동네
골목을 걷는데
성대 없는 개가 짓는다.
옷을 깁듯이 이어 붙인 지붕들,
비틀비틀 굽은 도로 …
분꽃, 나팔꽃, 유자, 봉숭아, 도라지 …
대문 앞 양지, 옹기종기 화분에는
동요 속 화초들이 자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옛날.
보문동 산동네 골목을 걷는데
성대 없는 개가 자꾸 짖는다.
최근에 지은 장시 한 편 더 소개한다.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탄생했다가, 늙어가다가, 병들어서, 결국은 죽고 마는데 이 모두가 고통스런 사건들이다. 부처님의 성(聖)스러운 가르침 가운데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괴로운 것[苦]’이라는 고성제(苦聖諦)의 진리[諦]다. 탄생[生]이 고통이다. 자궁 속에 10달 간 갇혀 있다가 좁은 산도를 통과하여 태어나는 갓난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몸의 기력이 떨어지는 늙음[老]이 고통이고, 아픔을 수반하는 질병[病]이 고통이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 죽음[死]이 고통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전체가 고통이다. 그런데 이런 네 가지 고통 가운데 뒤의 세 가지인 ‘노병사’의 괴로움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노인요양시설이다. 작년 말에 모 요양병원에 누워계신 노 은사님 문병 갔다가 목격한 장면을 엮은 시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노인 요양병원에서>
외간 남녀들이 혼숙을 한다.
여섯이 한 방에서 침대마다 누워있다.
방문도 활짝 열어 놓고 …
낯선 이가 드나들어도
몸을 일으킬 생각을 않는다.
입을 벌리고 물끄러미 천정을 보거나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한쪽 콧구멍에는 액상 음식을 공급하는 비닐 튜브가 박혀 있다.
튜브 말단으로 가끔 비닐 팩에 담은 음식이나 물이 공급된다.
링거액처럼 …
입과 식도를 생략하고
위장으로 직통한다.
신음소리,
거친 숨소리,
가끔은 힘겨운 기침소리 …
침대 난간에는
이름과 나이와 성별이 적힌
명패가 붙어 있다.
김 아무개 93세 남,
이 아무개 89세 여,
박 아무개 91 세 여,
강 아무개 94세 남 …
요양사들이 가끔
성기를 제치며 기저귀를 간다.
욕정이 빠진 성기는
그저 배설만 한다.
직업도, 지위도, 재물도, 권력도
모두 내려놓고
위트도, 성깔도, 감격도, 슬기도
모두 사라지고
식구든 친지든 그 누가 와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사연 많던 기나긴 인생이었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도
그저 아무개일 뿐이다.
내가 누군지,
뭘 하고 살았는지,
누굴 알고 지냈는지 …
아무것도 모르겠다.
원래처럼, 원래처럼
한 덩어리 핏덩이로 세상에 태어나
원래,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
사위는 촛불처럼 생명이 꺼진다.
그제는 옆방의 천식 앓던 노인네가 갔고
오늘은 건너 침대의 합죽이 할망이 갔다.
사위는 촛불처럼 생명이 꺼진다.
생명의 끝자락 …
내가 살아 있느냐?
내가 죽었는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도통 모르겠다.
(2015년 12월31일, 경희늘푸른노인전문병원에서 ○○○ 교수님 문병하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