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불교문화가 잘 어우러진 토착문화
- 안동 문화권은 영남답사 일번지 -
안동(安東)과 하회(河回)마을
안동은 경상북도 북부 중심의 도시로 옛 이름은 ‘영가(永嘉)’이다.
‘두 물이 만나는 아름다운 곳’이란 의미로 낙동강 본류와 반변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안동이란 이름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상주 출신의 후백제 견훤과 힘겹게 싸울 때 병산에서 이 지역 호족 세력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도움으로 승리한 뒤 통일의 기틀을 다질 수 있게 되자, 이들 세 사람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지역 이름도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으로 안동이라 하고, ‘군’에서 ‘부’로 승격시켰다.
지금도 안동 시내에는 이들을 모신 삼태사묘가 있다. 이들 가운데 권행은 본래 김씨였으나 ‘능히 일의 기틀을 밝게 살피고 권도를 적절히 하였다’는 치하와 함께 권씨 성을 하사받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한겨울에 왕이 이곳으로 피난하기도 했는데, 이때 풍천 소야천에 이르러 노국공주가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자, 안동의 부녀자들이 개울 속에 들어가 줄지어 엎드려 등다리를 만들어 무사히 건너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정월 대보름에 하는 놋다리 밟기의 유래가 되었으며, 공민왕은 안동 지역의 인심에 감동하여 ‘안동웅부(安東雄府)’라는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지금도 안동 시청 제3별관에 붙어 있다. 또한 안동 지역은 조선 시대에 맹자와 공자의 고향이라는 ‘추로지향(鄒魯之鄕 )’으로 불릴 정도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4백여개에 이르는 전국 서원의 3분의 1, 2백여 사액서원(賜額書院)의 4분의 1이 있을 정도이다.
안동은 유교의 사림문화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신라로 가는 불교 전파 통로로 곳곳에서 유서깊은 불교문화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전통 도시이기도 하다.
그중 하회마을은 1988년에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인 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꼽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마을들은 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 강이나 내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인데 비해, 하회마을은 남쪽으로만 흐르는 낙동강이 하회마을에 이르러 잠시 동북쪽으로 돌아 흘러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자리했다.
주산인 동북쪽의 꽃뫼 곧 화산(花山)을 뒤로 하고, 남쪽의 안산인 남산이 화천 건너에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원지산이, 북쪽으로는 부용대가 병풍처럼 우뚝서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으로 물이 돌아나간다 하여 ‘물도리동’ 또는 한자로 표기하여 ‘하회(河回)마을’이라고 한다.
또한 하회마을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마을이 물 위에 뜬 연꽃과 같다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보기도 하는데 풍수학적으로 전국 최고의 길지(吉地)로 꼽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지리학자인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하회마을은 시냇가가 있고 큰 고개에서 멀지 않아 평시에나 난시에나 오래 살 수 있는 곳으로 도산과 함께 제일 길지로 꼽았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내다보고 철저한 대비책을 논한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풍산 류씨의 동족 마을로 알려져 있다.
본래는 이매탈의 전설을 갖고 있는 허 도령 곧 김해 허씨의 마을이었다가 광주 안씨에 이어 류씨 마을로 바뀐 곳이다.
양반들의 줄불 선유놀이와 백성들의 하회탈놀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류씨들은 하회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백성들과의 관계를 잘 다져, 오늘날까지도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회마을을 한바퀴 돌다보면 담장들이 모두 흙담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지세가 연화부수형이라 연꽃이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려는 풍수지리학적인 배려이다. 마을 중앙에는 수령이 6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삼신당(三神堂)을 중심으로 길들이 방사형으로 나 있으며 집들의 방향이 각기 다른 것도 눈 여겨 볼만하다.
양진당(겸양 류운룡의 종가)과 충효당(서애 류성룡의 종가, 보물 제414호), 한때 99칸이었던 북촌댁(경상도 도사를 재낸 류도성이 1862년에 지은 집), 남촌댁(1797년 형조좌랑을 류기영이 지음) 외에도 하동고택, 빈연정사와 원지정사 등이 있다.
하회마을의 예스러움을 최고로 맛볼 수 있는 방법은 하룻밤을 이 마을에서 유숙한 뒤 이른 아침 식사 전에 화천이 만들어낸 는개(안개비)를 맞으며, 골목골목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교육기관:서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유교의 경전을 가르쳐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물형을 만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 제를 지냈으며, 지방의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에서는 선현의 사당을 두고 제를 지냈다.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었고, 농번기에 방학을 주어 농사일을 돕도록 하였으며, 농한기에는 기숙사인 재(齋)에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사액서원(賜額書院)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서원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써서 주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해 세금과 노역, 군역을 면제해준 지방사립대학을 말한다.
1543년(조선 중종38) 경상도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과 서적을 하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주세붕은 향교를 꺼리는 양반들을 위한 과거준비 기구로 서원을 생각하고 양반 자제들을 모집했으나 냉담한 반응 뿐이었다.
서원을 도학(道學)하는 곳으로 생각한 이황이 군수로 부임하여 국가의 공인을 받자, 지역 사족들이 서원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기를 띄어 갔다. 이때 이황은 서원의 학규와 교과내용, 운영 등은 지역 사림의 자율에 맡기고, 관에서는 경제적 지원만을 할 것을 요청하여 국가는 관학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며 허용했다.
이에 힘입어 이황은 10여 곳의 서원 건립에 관여하여 조선 서원의 전형을 만들어갔는데 이후 서원은 학문, 교육이라는 보호막으로 관청의 견제를 피하면서 유교적 향촌 질서를 확립하고 사림(관직에 나가지 않은 선비) 세력을 결집하는 기능을 확보해 갔다.
선조 때 사림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각지에서 사림을 중심으로 한 사족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붕당정치(뜻이 같이 사람들끼리 모인 당)가 사림에 의해서 주도되자, 자연스레 학파와 연결되면서 크게는 이황 계열인 영남 남인계 서원과 이이 계열인 서인계 서원으로 나뉜다. 두 세력이 점차 재야 세력과 집권세력으로 나뉘고 정권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조선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영주 순흥 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수 있는 소수서원은 풍기군수인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성리학의 선구자인 문성공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중종 37년(1542)에 숙수사(宿水寺)를 헐어내고 세운 백운동서원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5년(1550)에 진언을 올려 백운동서원이 ‘紹修書院’이란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한 자연발생적인 서원이라 건물 배치 등에 엄격함이 없고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인데, 서원 앞의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그 예이며, 뜨락에 놓인 숙수사지 발굴 유물들이 오히려 불교문화와 유교문화의 교차라는 자연스러움을 더하게 한다.
하지만 이면에 담겨진 문화 교차기의 갈등은 죽계천 바위에 붉은 글씨로 ‘敬’를 쓴 내력이 잘 말해준다. 숙수사를 폐찰할 때 불상을 모두 죽계천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 소리가 들려와 이황이 공경의 뜻으로 썼다고 한다.
한편 이 터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신령스런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다는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으로 이곳을 다녀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신혼부부들의 나들이와 예비부부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 근처에는 단종복위운동과 관계된 금성대군과 순흥유생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제단인 금성단이 있으며, 근처 ‘제월교’라는 이름의 다리는 ‘청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유생들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여 있다.
영주 부석사(浮石寺)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화유적지가 그렇듯이 유적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보다는 그 주변 경관과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가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찰의 경우 대부분이 산에 푹 안겨 있으면서도 앞은 탁 트여 속세와의 거리와 인연을 헤아려보는 맛도 절집을 답사하는 또다른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태백산 등줄기인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부석사는 석축과 계단으로 층층이 이어진 대표적인 사찰이다. 또한 일주문에서 걸어 올라가다 보면 그 위치가 별로 높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한눈에 사찰 전체 모습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석축위에 있는 안양루 계단을 올라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서 무량수전을 뒤로하고 앞을 바라보면 유려하게 펼쳐진 첩첩히 이어진 소백산 연봉이 한눈에 펼쳐진다. 갑자기 불쑥 드러난 장엄한 전망에 마치 극락세계에 들어온 듯, 아니면 도교의 신선 세계에 몸을 담은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676년에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들어온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1천3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화엄종찰로 위엄과 기품이 두루 배어 있다. 무량수전은 안동의 봉정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주심포 양식의 고려 건축물로 정갈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일주문에 들어서 사과나무밭을 양쪽에 끼고 천천히 천왕문을 거쳐 안양루와 무량수전(국보 제18호, 1376년에 원응국사가 고쳐 지음)에 들어서는 맛이 각각 다르다. 일직선으로 다가서다 우측으로 약간 비껴 서 정남향으로 자리잡은 안양루 아래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것은 바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해당한다.
석등을 바라보며 올라서면 무량수전의 앞마당이고, 그 왼쪽 옆 뒤로는 의상대사를 사모해 ‘뜬 돌[浮石, 부석]이 되어 들어온 선묘낭자의 혼이라는 돌과 오른쪽의 선묘각이 신비함을 더해준다.
무량수전에 들어가 동향한 아미타여래(소조 좌상불, 국보 제45호)에게 절을 하며 1천 3백년 전의 절집 분위기를 한껏 느껴본 뒤 오른쪽 길로 난 산길을 따라 조사당(국보 제19호, 1366년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세운 집)에 오르면, 조사당의 단아한 건축물과 함께 철조망에 갇힌 의상대사의 지팡이 나무라는 ‘골담초’를 볼 수 있다.
봉화 북지리 마애불
부석사 못지 않게 삼국통일기 신라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으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깨져 제 모습을 잃었지만 거의 환조에 가까운 매우 훌륭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호랑이가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호골산(虎骨山)이라 부르는 산자락 끝인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암벽에 새겨진 이 불상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동북향으로 앉아 있다.
국보 제201호. 원통전 건물의 오른편 뒤쪽으로 보면 암벽에 얕은 감실을 파고 불좌상 네구와 탑을 돋을새김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애탑은 이 곳과 경주 남산의 9층과 7층 마애탑과 백률사의 마애탑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희귀한 존재이다.
닭실마을과 권충재유적, 석천정사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는 닭실마을은 ‘유곡(酉谷)’의 한글 풀이이다. 이곳 사람들은 흔히 ‘달실’로 발음하는데, 안동 권씨 중에서도 권벌을 중심으로 한 일가의 동족 마을이다.
이 마을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서남으로 뻗어 내린 백설령이 마치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고,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치는 모습이어서 마을 서쪽 산에서 바라보면 금계포란(金鷄抱卵) 곧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았다.이 마을에 충재 권벌(冲齋 權橃, 1478~1548)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권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균관 생원 권사빈과 파평 윤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7세 때인 연산군 10년에 대과에 급제했으나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내시 김처선의 ‘처(處)’자가 글에 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가 3년 뒤에야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중종에게 경종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조광조가 신진 사류의 대표로 왕도정치의 뜻을 펼칠 때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기호 사림파와 연결하여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거 밀어붙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여 어머니 묘소가 있는 유곡에 자리잡았다. 13년 뒤 복직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68세에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인종의 외할아버지인 윤임의 대윤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의 소윤이 대립하다가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이 대윤 세력을 축출하는 외척간의 싸움 과정에서 일어난 사화)가 일어나 윤임 등을 적극 구하는 글을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이후 1547년인 70세에 ‘양재역 벽서 사건’(을사사화의 연장으로 윤원형이 윤임 일파를 제거하려고 자신들을 비방하는 글을 조작하여 양재역에 벽서를 붙여 일으킨 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유곡의 유적들은 권벌이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로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택에 들어서면 서쪽으로 유물각과 더 안쪽으로 서재인 충재와 청암정이 있다.
유물각에는 충재일기, 중종이 하사한 근사록(近思錄, 고려시대인 1370년에 간행된 희귀본으로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인 주희와 여조경이 편찬한 일종의 성리학 해설서로 고려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수입되면서 들여와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충재는 1526년 봄에 자신의 집 서쪽에 재사를 짓고 다시 그 서쪽으로 사(榭, 대 위에 지은 정자) 6칸을 바위 위에 지어 물을 돌렸으며 이어서 동문 밖에 대를 쌓았다.
서재인 충재에서 공부하다가 바람을 쏘일 양으로 지은 청암정은 넓적한 거북 바위위에 지은 丁자형 건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건물이다.
돌다리를 건너 들어갈 수 있도록 꾸몄으며, 주위에는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 철쭉 등을 어우러지게 심어놓았다. 정자에는 권벌이 당대 영남의 주도적인 학자들인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23세 연하의 이황 말고도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등과도 교류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글씨들이 있다.
특히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현판은 미수 허목이 88세에 마지막으로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종택에서 나와 논길을 따라 창평천과 가계천이 합해져 봉화읍으로 흘러가 내성천이 되는 양수 합수 지점 쪽으로 돌아가면 계곡을 옆에 낀 풍광수려한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있다. 충재의 큰 아들인 청암 권동보가 1535년에 지은 정자로 권벌이 동문밖에 쌓았다는 대 위에 지은 건물이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해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시냇가의 살 만한 곳으로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삼는다고 한 이유는, 시냇가이되 고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야 오래 살기에 알맞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큰 강이 가까이 있지 않기에 장삿배가 통하지 않으니 분주하지 않고 대신 작은 여울이 있으니 거룻배를 타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에 편하며 논밭이 멀지 않아서 농사짓기에도 적당한데다가, 머지 않은 곳에 소백산이 있어 난세에는 몸을 옮겨 살기에도 좋다는 것이다. (2005년 답사)
이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좋은 집터를 고르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역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나이 61세(1561년)에 이곳에 서당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제자들이 도산서당 뒤로 서원을 꾸며, 서당과 서원이 혼합된 복잡한 구조이나 위계질서가 매우 정연한 서원이기도 하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隴雲精舍)의 건축물과 뜨락의 설계는 모두가 퇴계가 설계한 건물들이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기거했던 건물로 서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농운정사는 유생들이 기숙한 건물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工’(공)자 형으로 지었다. 구체적인 건물 배치는 다음과 같다.
병산서원(屛山書院)
풍산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본래 풍악서당으로, 공민왕이 피난 시절 이곳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토지 8백 두락을 주기도 한 곳이다.
1572년 서애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존덕사를 짓고 향사(제사를 드림)하면서 서원이 되었는데 철종 14년에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설립 시기가 서원이라는 사립교육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때 세워진 만큼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 모습을 보여준다.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을 일직선상에 놓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놓았으며, 강당 뒤쪽에는 진사청과 장판각을 두었다.
외곽으로는 낮은 돌담을 둘러 감싸고 사당 공간에는 특별히 담을 더 둘러 출입을 통제했다. 만대루에 앉아 내려다보는 낙동강의 물이 세월의 흐름을 무상케 한다.
봉정사(鳳停寺)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산 기슭에 있는 고색창연한 봉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인 682년에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하였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날렸더니 이곳에 내려 앉아 절을 짓고 봉정사라 했다 하며,
천등산이란 이름은 의상이 기도를 드리려고 이곳에 오를 때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푸른 말이 길을 인도하여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에 영국 여왕이 방문하기도 한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 있는 곳이다. 고려 중엽의 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의 건물인 고금당(보물 제449호)과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계보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건축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극락전의 경우 한동안 최고(最古) 건축의 자리를 부석사 무량수전에 내주고 있었는데 1972년 완전 해체 복원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가장 오래된 건축물임이 밝혀졌다.
상량문을 보면 “신라 문무왕 때 능인 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안충⋅보조⋅신경⋅밀암 등 여섯 스님이 무려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에 용수사의 축담 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고 되어 있다.
이 글에서 ‘지금’이란 조선 인조 13년인 1625년이고,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으로 1363년이다. 이때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 있었으므로, 극락전의 중수에 공민왕이 관여했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건물을 새로 지은 뒤 중수(다시 고쳐 짓는 일)하는 것은 대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뒤에 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나이는 1363년에서 적어도 150년을 뺀 13세기 초 또는 200년을 뺀 12세기 중엽까지도 거슬러볼 수 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산동성 오대현에 있는 남선사(南禪寺)의 대전(大殿)과 비교하여, 그 건물과 비슷한 옛 방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8세기경까지 거슬러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요사채에서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가면 영산암이 있는데, 여기에는 극락전 앞에 있던 우화루란 누각이 옮겨져 와 있다. 이 누각 아래를 통해 들어가면 법당과 양쪽에 요사채가 있는데 여기에는 도깨비와 용 등이 마치 민화처럼 그려져 있다.
안동민속박물관과 민속촌
1976년 안동다목적댐의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있던 집들 가운데 민속자료로 가치가 있는 집들 12채를 옮겨 놓은 것이 지금의 안동민속촌이다. 여기에는 내륙산지라는 안동의 지역 특성이 빚어놓은 겹방집, 까치구멍집, 도토마리집, 통나무집, 토담집들이 있고, 선성현 객사(관아 건물로 외지에서 온 손님이 묵던 곳)와 석빙고가 있다.
안동민속박물관에는 안동지역에서 수집된 갖가지 의식주 생활과 종교, 의례에 관한 민속자료들이 충실하게 전시되어 있어 안동의 사대부 문화와 서민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신세동 7층전탑
법흥사 7층전탑이라고 해야 할 것을 1962년에 국보 제16호로 지정할 때 옆동네 이름을 잘못 붙였다고 한다. 철길 옆에 가려져 있어 잘못하면 지나치기 쉬운데 한때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법흥사의 영화를 일부나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전체 높이 17m에 이르는 장대한 이 탑은 전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매우 안정적인 탑으로 동부동 5층전탑, 조탑동 5층전탑, 임하전탑과 함께 안동을 ‘전탑의 고장’이라고 부르게 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탑 기단에는 팔부신중상과 사천왕상을 새긴 판돌들이 북면과 서면에 6매씩 있고, 남면 가운데는 계단이 있다.
기단 위로 시멘트를 비스듬하게 발라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옥개전돌 위에 기와가 조금 남아 있어 전탑이 목조탑 이후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전탑 바로 3m 앞으로 중앙선 철길이 나 있어 전탑의 보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근처에는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이 있는데 규모가 매우 크다. 중종 10년(1515년)에 형조좌랑을 이락(李洛)이 건립한 집이다.
한때 99칸 집이었다가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50여칸만 남았다. 신세동 7층전탑 뒤에 있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은 17세기 후반에 지은 고성 이씨 소종가로 중요민속자료 제185호이다.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
영주 시가지를 벗어나 예천 쪽으로 가는 길목 서천가 바위 위에 자리한 마애삼존불은 거의 환조에 가까울 정도로 돋을새김이 잘 되어 있다.
보물 제221호로 통일신라기인 7세기 무렵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쪽에 협시보살을 두고 있는 본존불 광배까지의 높이가 3m가 넘는데 북지리 마애불과 같은 시무외여원인 모습을 하고 있다.
삼존불 아래 쪽에는 청동기 시대 때 새겨진 것으로 짐작되는 방패 모양의 바위 그림이 있다.
제비원 석불
'영가지'란 기록에는 634년에 조성되었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다고 되어있는데, 고려 때 거대한 마애불이 많이 새겨져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제비원 석불은, 제비원이란 여관에서 일하던 연(燕)이란 아가씨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제비원[燕飛院]에서 ‘원’이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는 서울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었던 것이 제비원이다. 연이란 아가씨에 의해 제비사(혹은 연미사)란 절이 생기고 그 아가씨가 죽어 영혼이 석불로 화했다고 한다.
보물 제115호인 제비원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몸을 자연 암반에 선각으로 새긴 데 비해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해 얹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상인데 비해 몸체의 선은 풍화에 시달린 탓인지 그리 뚜렷하지는 않다. 이 석불의 얼굴은 안동 시내버스 정류소마다 표시판에 그려져 있어 더욱 강한 인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