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ry! 영광 여행 선 승 언
지난 시월 말에 친구들과 짧은 일정으로 영광일원을 다녀왔습니다.
광주송정역에 내려서 택시를 대뜸 타고 기사에게 "광산구청 옆으로 갑시다"했더니 기사가 무거운 톤으로 "앞으로는 길 건너가서 타세요"했다. 사연을 듣고 보니 기사의 푸념이 조금 이해되었다. 어색한 분위기라서 서둘러 내려서 유명하다는 떡갈비집을 찾아갔다.
그 집으로 찾아드니 광주친구들이 서울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름기가 번지르한 떡갈비를 안주로 삼아 맥주를 두어 잔 마셨더니 속은 든든해졌고 머리는 아망해졌다. ‘하필 막걸리 상표가 아내 이름과 같아서’ 친구들과 한바탕 웃었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할 이야기도 많았지만 회장의 안내로 서둘러서 첫 방문지 불갑저수지 수변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섹스폰연주를 들을 수 있다'더니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그 놈의 바람이 어찌나 드세게 불어대던지 많이 추웠고 하마터면 내 나까오리 모자가 날아갈 뻔 했다. 날씨 탓인지 연주도 구경꾼도 없었고 靈光 金씨 始祖의 동상(조금 야릇한 복장을 한)만 찬바람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뀡 대신 닭으로' 바람찬 속에서도 물결이 넘실대는 저수지 뚝방 위를 걸으며 그 동안 밀렸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찬바람에 쫓겨서 ‘77인의 殉敎者가 났다’는 영광 염산교회'로 날았다. '순교'라면 카톨릭교 박해만 생각했던 터라서 改新敎 순교에 대해서는 조금 생소했다. 찾고 보니 ‘6.25무렵에 共産主義를 반대했던 신앙인 77인이 대창(竹槍)으로 찔려죽고, 배로 실려가서 수장당하고, 시궁창에 쳐박혀 돌팔매질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었다’고 전했다. 그 때 살해당한 분들을 합동장례한 무덤이 뜰마당에 있었고 당시 사용됐던 빛바랜 장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어서 염산교회로부터 멀지 않은 칠산타워를 찾아갔다. 타워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111미터 높이가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현수막에 향화도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이곳도 예전에는 섬이었던 모양이었다. 1층 활어매장 밖 야외공연장에서는 초대가수로 보이는 빨간 옷을 입은 남녀가수가 구성진 남도 노래를 불러대고 구경꾼 두 명이 나름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사람들이 더 섞여지면 한번 끼어들고 싶었다.
고속으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빙 둘러진 유리창을 통하여 멀고 가까운 수많은 섬들과 건설 중인 칠산대교도 보았다. 바로 앞 섬 목도에는 갈매기들이 거센 바람에 날개를 쉬는지 갯벌에 무리져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그 섬을 새 섬이라고 불렀고 그도 그럴 것이 섬의 모양이 부리며 모가지가 영낙없이 새를 닮았었다. 그런데도 목도라고 불리는 것이 한사코 궁금했다. 그러한 나에게 김학장이 "순수한 우리말이 漢字가 들어오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즉 '목이 좋은 곳에 있는 섬'에서 유래했을 거"라고 했다.
서해로 지는 해를 보면서 식사할 수 있다는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1층 수산물 활어매장에서 배달해 온 도톰한 광어회에 술을 마시니 세상 차~암 좋았다. 마침 TV에서는 야구 KIA팀이 OB를 이겨가니 고향이 남도인 친구들이 모두 신바람 났었다. 그런데 식당 주인 남자 혼자만 눈빛으로 OB를 응원하고 있었다. 결국 기아의 승리로 끝났을 때 얄궂은 친구들이 그 남자를 불렀다. 그리고는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아쉬움을 떨치시라”하고는 쏘주를 대클라스에 한잔 가득 권하니 그는 무안주로 '다음에 보자'는 식으로 단숨에 들이켰다.
글로리(榮光)호텔에서 아침산책을 나갔다. 무물산 산책길이 잘 가꾸어졌는데 특히 화장실 세 곳이 모두 巨富의 별장 같았다. 팔각정에 올라 둘러보니 영광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로 옆으로는 거대한 태극기가 찬바람에도 휘날렸다. 나무로 그늘진 곳에는 의병장의 기념비가 찬 기운에 젖어있었다. 문화예술관과 도서관 사이에 파월장병들의 기념탑이 우뚝 서 있었는데 명단이 면별로 쭈욱 새겨져 있었다. 염산교회에 이은 거대한 태극기, 파월장병기념탑을 보니 Glory한 영광은 우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남다른 고장 같았다
아침으로 걸죽한 전복죽을 잘 먹고 천주교성당을 찾아갔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에 네 개의 하얀 기둥이 하늘로 향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 ‘이곳에서 순교한 네 분의 殉敎者를 나타낸다’고 했다. 성당 앞에는 순교당한 네 분의 이름 밑에 순교당한 방식이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ㅇ아무개는 斬首로 ㅇㅇㅇ는 絞首로 ㅇㅇㅇ는 기명으로 기록되어있었다. 그 바로 앞에는 이분들의 순교를 애잔하게 찬미하는 이해인수녀의 '피빛 사랑의 시'가 우리들의 발길을 잡았다.
영광대교를 넘어 백수해안도로를 찾았다. ‘전라남도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해안도로’라니 기대가 컸다. 한참을 달려 가다가 전망대가 있는 곳에서 차를 세우고 툭 트인 서해바다를 바라보았다. 욕심을 내어 365건강계단을 타고 바다로 내려가다가는 해안 절벽을 차오르는 파도 때문에 중간에 되돌아왔다. 이어서 노을전시관을 찾아갔는데 하필 월요일이라서 휴관이었다. 그래서 서로서로 "지금은 노을을 보는 시간대가 아니다"라고 그럴싸한 구실로 달랬다. 그 때 회장이 "포토죤에서 사진을 찍으면 노을진 바다배경은 내가 맹글테니 얼른 스소잉!"했다.
되돌아오는 길에 374년 백제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서 백제에 불교 들여왔다는 최초 불교유적지를 찾았다. 너른 광장 한가운데 인도 아쇼카왕이 세웠던 원주탑 모방이 하늘높이 솟아있었다. 그리고 광장 언저리로는 모전탑들이 어깨를 이었다. 안내를 받아 영상물을 보았는데 국왕이 친히 마라난타를 영접하고 있었다. 그 당시 백제는 불교의 호국사상을 받아들여서 중앙집권의 강한 나라를 만들고 민생안도에 힘썼던 것 같다. 불교와 함께 들어온 간다라미술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회장이 "영광에 왔으니 굴비정식을 먹어보자"고 해서 '유명하다는 집'을 찾아갔다. 가는 도중에 마나님들이 굴비거리로 가자고 졸라댔다. 단골집에 당도한 마나님들이 주인과 흥정하는 동안 나는 바다물이 완전히 빠진 법성포구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길가에는 조기판매상들이 십리나 주욱 늘어서있었다. 일행들은 "저렇게 많은 집들이 어떻게 장사가 될까......"하고 고향분들 걱정도 해주었다. 기어이 찾은 '00한 집'의 식탁은 말 그대로 풍성했다. 싱싱한 게장과 구운 조기와 조기탕이 '여기는 법성포요'라고 하는 것 같았다. .
마지막으로 불교佛자에 으뜸甲자를 쓴다는 佛甲寺를 찾았다. 주차장 주변에 650년 된 사장나무에 禁줄 대신 젊은이들의 사랑카드들이 달려있었다. 경내로 들어서니 사찰규모가 엄청났는데 석탑은 안 보이는 것 같았고 대웅전에 부처님은 서쪽벽에 모셔져 있었다. ‘이런 형식을 남방불교 영향’이라고 들었던 같다. 불갑사에 유명한 相思花는 꽃도 줄기도 없어지고 잎들은 아직도 싱싱했다. 상사화와 유사한 꽃무릇 안내에서 '자발없는 귀신은 무릇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말을 인자사 이해하게 되었다.
‘
산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였다. 친구들이 ‘구수재로 가면 쉽다’는데 나는 굳이 ‘멋지다는 해불암’으로 갔다. 가다보니 길성이 사납고 가팔라서 힘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 곳일 것 같았으나 모임 시간이 다가와서 되돌아왔다. 下山 길에 ’人生도 山行처럼 너무 힘들고 고집스럽게 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