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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극소설-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10>
8장. 영실은 비와 바람과 별과 만나기 시작했다
국제신문 2012-05-29
천민이라는 족쇄-장영실은 신분 제도가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관노비 출신의
천민 신분으로 주군 세종의 침소까지 관리하는 측근 중의 측근으로 상승한다.
그러나 장영실의 신분 상승은 재능과 관직에 제한되었고,
천민이란 족쇄는 영원히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장영실 역을 맡은 부산 출신 배우 강학수) 사진 제공=국립극단(촬영 심철민)
- 너는 천민 신분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조선의 천민은 인간이 아니다.
그저 개나 소처럼 부리다가 언젠가는 버려지는 물건이란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네가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차라리 드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라.
대마도 정벌은 주군의 의지와 무관한 전쟁이었다.
상왕 태종은 이백여 척이 넘는 병선과 2만여 명에 가까운 군사를 동원하고,
영의정을 위시한 대신들을 몽땅 배에 실어 대마도 정벌대에 보내었다.
대마도 앞 바다에 도착한 조선 정벌군은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함포 사격을 가하여 백여 명이 넘는 왜인들이 죽고 포구의 민가는 잿더미가 되었다.
왜인들은 모두 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이게 무슨 전쟁인가?
내가 만든 포에 맞아 죽는 왜인들의 모습을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은 참담했다
.
영실과 나는 아예 상륙하지도 않은 채 배에서 지냈다.
전공을 세우고 싶은 자들은 앞다투어 상륙하여
타다 남은 민가를 뒤지고 산으로 진군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접근전이 불가피한 산악 전투에 조선군이 능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사령부에서는 내 지적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산에서 기습을 당한 조선군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해변으로 줄행랑을 치다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뒤쫓아 온 왜구들에게 도륙을 당했다.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어서 포를 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그 모습을 배 위에서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별자리의 원리 발견- 장영실은 드넓은 자연에 인간의 깊은 이치를 개입시키면서
우주 순행의 원리를 발견한다.
그 난리법석에서도 영실은 밤이면 배 위에서 별을 관측했다.
남쪽 하늘 별자리는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영실은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쥐고 하늘 한 자락을 펼쳤다.
영실의 손바닥에서 펼쳐지는 별자리는 그대로 도면으로 옮겨지곤 했다.
"그냥 무심하게 바라보는 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의 손가락 사이로 가두어 버린 별은 내 눈에 포착된 나만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손가락을 모으고 가만히 서 있어 보십시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별자리가 바뀝니다.
이 도면을 보세요. 이게 새로 한시 별자리고, 이것이 두시, 세시, 네시….
이렇게 별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세요?"
"매시간마다 관측된 별자리를 가지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지."
"별자리의 이동 경로와 위치도 파악할 수 있지요.
하, 내 눈, 내 손가락 사이로 저 드넓은 우주와 천체를 가둘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의 사유가 이렇게 무궁무진할 수가….
저는 이제 하늘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을 읽어낸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을 하지.
그러나 하늘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닐세."
"내 손가락 사이에 갇힌 별을 주군께 드려야지요.
주군은 이제 조선의 산과 들뿐만 아니라 저 드넓은 하늘을 지배하실 것입니다."
영실의 발견은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여겨졌다.
그러나 대마도 앞 바다에 정박한 지 열흘 만에
영실의 별자리 관측은 놀라운 정보로 증명되었다.
"오늘 남서쪽 별자리가 모두 빛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조화이지요?"
"태풍이다!"
나는 급히 대마도 앞 바다에 떠 있는 군선들을 정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 말을 무슨 청천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냐고 코웃음 치던 사령부는
새벽녘에 밀려온 해일로 전선 열네 척을 잃었다.
태풍은 인간의 정복욕이 얼마나 하찮은 짓인가를 일깨우려는 듯
바닷가에 널브러진 집들과 시신들을 말끔히 쓸어가 버렸다.
새벽 해일이 밀고 가 버린 바닷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로 눈부셨다.
열흘 동안의 살육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선에서는 좀처럼 겪어 보지 못했던 태풍의 위력을 실감한 사령부는
그만 전의를 상실했다.
모두 밤 하늘 별자리를 올려다 보면서 언제 태풍이 오려나 전전긍긍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인간이 대자연의 조화에 무릎을 꿇게 된 셈이다.
결국 두 달 먹을 식량을 싣고 떠난 조선 전단은 보름 만에 서둘러 귀항했다.
춤추는 선기옥형-장영실이 감옥에서 즉석으로 만든 선기옥형을 들고 춤추는
선공직장 임효돈.
대마도에서 귀환한 조선 정벌군은 쉴 틈도 없이 북방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번에는 여진족이었다.
태종의 정복욕은 북방 6진 개척으로 이어졌다.
나는 영실을 서울에 내려다 놓고 홀로 북방 전선으로 떠났다.
영실을 더 이상 전장에 데리고 다니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영실은 이제 지상의 전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영실은 비와 바람과 별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북방 전선의 상황 또한 대마도와 별다를 바 없었다.
여진족은 웬 난데없는 전쟁이냐고 의아해했다.
지금까지 서로 어울려 잘 살고 있는데 왜 두만강 너머 쫓아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투항한 여진족에게는 자치구역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적도 아군도 없는 것이 왜구와 여진족의 특성이다.
가뭄이 들고 식량이 떨어지면 언제 적이 되어 공격해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전쟁은 명분이 없었다.
전쟁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후 십 년 동안 이 명분 없는 전장에서 악전고투하며 세월을 보내었다.
그 십 년 사이 영실은 제 길을 찾았다.
영실이 제안한 선기옥형(혼천의) 제작은 주군에게 받아들여졌다.
궁에 선기옥형 제작을 위한 연구소가 세워졌고,
영실은 이듬해 금속 천문기구 제작법을 배우러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실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의주 압록강을 건널 때,
나는 경흥 주둔지에서 의주까지 영실을 만나러 갔다.
부산포 바닷가에서 열서너 살 된 소년 영실을 만나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내 자식처럼 키웠다.
이제 영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스승께서 여기까지 웬 걸음이십니까?"
영실은 반색을 하면서도 내 어두운 표정을 보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데 아니 올 수 있느냐?"
"마지막이라뇨?
저는 이 년 말미를 얻어 중국에 가지만,
기술을 익히면 내년이라도 바로 돌아올 것입니다."
"바로 돌아오다니?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지금 천민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네가 중국에서 천문 역법을 공부하고 나면 거기서 인간 대접 받으며 살 수 있다.
네가 조선에 돌아올 이유가 없지 않느냐?"
"저는 주군의 명을 받고 중국에 가는 것입니다."
"주군은 조선을 다스릴 뿐, 결코 너를 다스리지는 못할 것이다.
네 의지가 분명하다면 다시는 이 강을 넘어 오지 말아라.
여기는 네게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
"저는 조선을 위해 공부하러 떠나는 것입니다."
"이제 너를 위해 공부하거라."
"비천한 저를 위해 무슨 공부가 필요했겠습니까.
스승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므로 제 젊음은 스승의 말발굽을 뒤쫓아 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이제 주군이 저를 받아 주시므로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럼 너는 네가 없는 인간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아무리 높은 지식을 습득하고 깊은 사물의 이치를 깨우친다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조선의 천민은 인간이 아니다.
그저 개나 소처럼 부리다가 언젠가는 버려지는 물건이란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네가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차라리 드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라.
이 강을 넘는 순간 너는 자유로운 몸이 된다.
저 드넓은 세계에서 마음껏 네 재주를 뽐내면서 살거라.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재능이 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국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거라.
네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 많을 것이고,
너는 아무런 신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인간 대접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원래 원나라 사람 아니더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거라.
네가 만일 돌아오고 싶다면 중국의 고관대작이 되어서 금수레를 타고 오거라.
그냥 돌아올 바에는 아예 나를 만날 생각도 말거라."
나는 매몰차게 말고삐를 돌렸다.
내 수족을 하나 떼어낸다는 기분이 들어 울컥 했지만,
말을 세차게 달리면서 속으로 몇 번이고 뇌까렸다.
달아나라, 영실아. 되도록 멀리 달아나거라.
여기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영실은 한 해도 다 안 채우고 돌아왔고,
돌아온 그 해에 병조판서 조말생 대감의 추천을 받아 상의원 별좌 관직을 얻었다.
이태 후에 수동 물시계 '경점기'를 완성해 내었다.
이 공으로 영실은 천민의 신분에서 풀려나 첨지 신분을 얻었다.
그러나 영실은 중국에서 돌아와서도 내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중국의 고관대작이 되어 금수레를 타고 오지 않는 이상
날 만날 생각을 말라고 한 말이 영실을 서운하게 한 것인가.
그렇게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7년 세월 동안 나는 북방 6진을 쌓아 올렸고, 비로소 조선의 국경선이 완성되었다.
저 돌벽을 쌓는다고 그렇게 긴 세월 북서풍 칼바람을 맞아야 했던가.
여진족을 쫓아낸 땅에 경상도 밀양 사람 수백인이 맨 먼저 이주해 왔다.
토지를 거져 준다는 말에 혹해서 함경도로 이주해 온 밀양 사람 절반이
혹한과 풍토병에 희생되었다.
그래도 이주 행렬은 계속 이어졌고,
처음에는 싹을 틔우지도 못했던 박토가 삼사 년 지나면서 푸른 배추 잎을 내어 밀었다.
태종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주군의 직할 통치가 시작되면서도 북방 개척은 계속되었다.
주군의 토지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백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농산물 생산량을 높여야 한다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라면 어디라도 사람을 보내었다.
대신 생산량이 떨어지는 도서지역은 정반대의 정책을 썼다.
일컬어 공도(空島)정책이다.
돌덩이가 태반인 섬에는 농사 지을 곳이 없다.
설사 농산물이나 해산물을 수확한다 하더라도 수송 수단이 배에 의존하다 보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풍랑이라도 만나면 일 년 수확이 어처구니없이 물밑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이런 섬은 쓸모가 없으니 주민들을 전부 철수시켰다.
그러다 보니 다시 왜구가 동남 해안 지역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고작 왜구 칠팔 명이 타는 쪽배 하나 상륙해도
조선인들은 마을을 비우고 산으로 도망갔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는 북방에서 동남 해안까지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50대를 다 보내고 만 것이다.
어느날 문득 내 인생을 말 안장 위에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직상소를 올렸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다는 곳으로 여행이나 가 볼까.
그러면서 북방 생활을 접으려는 참에 궁에서 사직상소에 대한 답신이 왔다.
정인지 정초가 올린 간의대 설치안이 통과되고,
내가 그 설치 책임자로 발령이 난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내 밑에서 일할 기술 감독관으로 장영실이 임명된 것이다.
이런 매정한 놈, 이제서야 이런 식으로 나를 찾다니!
나는 울컥 눈물을 쏟았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영실이가 참을 수 없도록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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