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774]유하(柳下)홍세태선생시 견흥(遣興)
유하(柳下)홍세태선생시 견흥(遣興)
臥愛靑山起每遲(와애청산기매지)
浮雲流水亦吾詩(부운류수역오시)
此身却笑非仙骨(차신각소비선골)
滿腹煙霞未解飢(만복연하미해기)
푸른 산을 누워서 사랑하느라
날마다 느지막이 일어나느니
뜬구름 흐르는 물이 모두가 나의 시(詩)네.
우습구나, 이 내 몸은 신선이 아니라서
배 속에 안개와 놀 가득 차 있다 해도
내 배고픔은 해결이 안 된다네
遣興견흥= (글을 짓거나 여흥을 하며) 흥을 돋우(어 마음을 달래)다.
遲= 늦을 지, 기다릴 지, [본음] 기다릴 치(다른 표현: 더딜 지). 속자(俗字)遅.
却= 물리칠 각.
仙骨= 신선의 골격이라는 뜻으로, 남달리 뛰어난 골격과 생김새를 이르는 말.
煙霞연하= 안개와 노을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연하고질 [ 煙霞痼疾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몹시 사랑하고 즐기는 성벽(性癖).
연하지벽 [ 煙霞之癖 ]-안개와 노을을 심히 좋아하는 버릇. 자연을 사랑하는 병.
飢= 주릴 기.
원문출처-柳下集卷之十四 南陽洪世泰道長著 / 詩
遣興
臥愛靑山起每遲。浮雲流水亦吾詩。
此身却笑非仙骨。滿腹煙霞未解飢。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6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
본관은 남양, 호는 창랑(滄浪) 혹은 유하(柳下),
무관의 아들로 태어나 문장에 재능을 보였으나 어머니가 노비라 중인들끼리
낙사(洛社)라는 단체를 만들어 풍류를 즐겼다.
숙종 때 역관으로 일본에 가서 이름을 떨친 홍세태는 청나라 사신에게 준 시가
임금의 눈에 띠어 제술관에 임명되었으나, 평생 궁핍하고 불행하게 살다가
말년에 울산 감목관(蔚山 監牧官) 등을 지냈다.
홍세태는 48인의 위항시선집 '해동유주(海東遺珠)'의 서문에,
'사람은 천지의 중(中)을 얻어 태어났으며, 정(情)에서 느낀 바를 시로
나타내는 데는 신분의 귀천이 없다'라는 위항문학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사대부의 문학 독점에 저항하였다.
위 시에는 홍세태의 풍류와 시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나타나 있으나 가난을 어쩌지 못하는 서글픔을 한탄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 올라가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 끓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되새긴 기백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