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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혁파비
- 종이가 뭐길래
그것은 오로지 종이 때문이었다. 목포에서 양산 통도사까지는 네 시간이 넘겨 걸렸다. 학예사 최창학은 통도사에 종이와 연관된 기념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숨에 달려갔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해서 나선 길이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열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역사와 문화는 물론 각종 회화론을 읽어야 했다. 그것도 번역본이 없는 경우는 한문으로 된 자료를 자전을 되지면서 더듬어 읽어야 했다. 그렇게 단련을 하지 않고는 학예사 간판을 내려야 할 판이었다.
“평생 관광해설이나 하고 살라면 몰라도....” 관장이 말끝마다 달고나오는 소리였다.
학예사 일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다. 일의 가닥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모이곤 했다. 작품을 감상하고 판단하는 일은, 말하자면 머릿속의 일이었다. 그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이해는 막노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림 속에는 온통 세계가 다 들어 있었다. 그것은 꿈의 세계였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에는 노동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학예사 최창학은 화가들의 작업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화가들이 작업한 결과, 그게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 그것만으로는 화가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림은 화가의 삶 전체이다. 그걸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신분상승을 꾀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했다. 그림은 때로 정치화되어 이념적 표상 노릇을 하기도 한다. 붓을 만든 사람, 종이 뜬 사람, 안료 채집한 인물 등은 잊어버리고 산다. 최창학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 그게 팔려야 화가가 먹고산다.
옛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도구들은 사실 간단했다. 이른바 문방사우라는 종이, 붓, 먹 그리고 벼루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색을 입히는 안료 몇 가지가 그림을 그리는 재료(마티에르)의 거의 전부였다. 이 간단한 재료로 산을 일으키고 물을 흐르게 하며, 구름의 일고 잦음을 그려내는 화가들은 가히 신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화면에 재생하는 솜씨는 혼이 빠지게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임금은 범접을 허용치 않는 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림을 그리자면 바탕이 있어야 했다. 비단폭은 값이 너무 비쌌다. 삼베는 거칠어서 섬세한 질감이 드러나지 않았다. 나무판자는 현판이나 주련을 써 붙이는 데 한정되었다. 값이 헐하고 다루기 편한 것은 역시 종이가 제일이었다. 그것도 ‘한지’ 넘어서는 게 없었다.
종이는 그 제조 연원이 깊었다. 전하는 말로는 2천년 전쯤 중국의 채륜이라는 환관 벼슬을 하는 이가 발명했다고 한다. 목간木簡이나 척독尺牘에 글을 쓰자면 손놀림이 불편했다. 그리고 양이 많아 운반도 어렵고 펼쳐 읽기도 불편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은 목간으로 된 책의 양으로 계산한 책의 분량이다. 지금 종이책 다섯 트럭이면 엄청난 양이다. 감당이 안 된다. 공자가 <주역>을, 그 가죽끈을 몇 번이나 바꿀 정도로 많이 있었다고 한다. 책끈은 죽간으로 된 책을 묶었던 가죽끈을 뜻한다. 채륜은 종이를 발명한 덕으로 일개 환관이 제후의 반열에 올라 신분상승을 했다. 채륜이 발명한 종이를 채후지蔡候紙라고 하는 것은 그의 나중 벼슬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종이는 생산이 제한적이었다. 화가 스스로 종이를 만들어 쓰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종이 만드는 시설을 해야 했다. 작업과정 또한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었다. 화가에게는 종이를 구하는 일이 큰 과업이었다. 종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종이는 그림의 텃밭이나 마찬가지였다.
종이는 그림은 물론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기본자료였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은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종이는 계층을 구분하는 하나의 표준이었다. 종이작업자와 비종이작업자로 신분이 갈렸다. 종이작업 가운데는 국가의 기록이 으뜸이었다. 당대 이념과 지식을 적어 보급하는 일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종이는 권력이었다. 그 종이는,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그 백짓장일 수만은 없었다.
종이는 한 인간의 생애를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 한 집단을 와해시키는 일도 했다. 조선조 왕실에서는 종이의 중요성을 알아 ‘조지서造紙署’라는 관청 부서를 두어 종이 만드는 일을 국가에서 관장했다. 일반에서도 개인적으로 종이를 만들어 돈을 장만하는 이들이 있었다.
사찰에서는 종이를 대대적으로 만들어 썼다. 불경을 발간해야 하는 과업 때문이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승려는 팔천에 속하는 계급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팔천이란 노비, 기생, 백정, 광대, 공장, 무당, 상여꾼, 거기다가 승려를 포함한다. 그러나 승려僧侶는 독서계층이었다. 독서계층이란 지식인그룹에 속한다는 뜻이었다. 문자와 독서로 유학자들과 통할 수 있는 길이 트였다. 그리고 사찰에는 많은 토지가 분배되어 있었다. 이른바 ‘사원경제’의 바탕은 토지였다. 땅이 있어야 종이를 만들기 위한 닥나무(楮木)를 재배할 수 있었다. 원래 닥나무는 저포楮布라는 피륙을 만드는 재료였다. 닥나무를 종이 재료로 쓰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이후로 본다.
닥나무는 나라에서 재배 면적을 정하고 관리했다. 종이가 중국에 바치는 조공품에 들어가기 때문에 닥나무 식재를 권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에서 재배하는 닥나무는 규모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대규모 닥나무 재배와 조공품 공납에 도움이 되는 집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불똥이 사찰로 튀었다. 승려들은 종이 만들어 바치는 일에 모든 역량을 투자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말이 역량 투자지 수탈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탈을 지나 불교 멸살의 구체적 행태였다. 도무지 먹고살 방법이 없었다. 불경을 읽고 부처님 말씀을 염송할 시간이 없었다. 판각해 놓은 목판을 찍을 종이를 장만하기 어려웠다. 사찰 문 걸어맬 형편이 되었다.
종이 공납에 가장 시달린 사찰 가운데 하나가 양산 영취산 ‘통도사通度寺’였다. 통도사는 절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닥나무 기르는 데 여건이 좋아 종이 생산에 적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정에서는 통도사를 종이 공납 표적으로 삼아 과중한 공납 양을 결정하고 독촉했다. 승려들이 죽어날 판이었다. 종이 생산에 몰두하다 보니 사찰 운영에 다른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는 승려들이 먹을 식량을 준비하지 못해 기력이 떨어지고, 절에서 머슴처럼 일하던 승려 가운데는 절을 도망쳐나가는 이들이 생기기도 했다. 절은 폐사 직전에 이르렀다. 주지스님을 비롯해서 나이 높은 승려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러다가는 종이 때문에 천년을 지켜온 우리 절이 문을 걸어닫을 판이 되었습니다. 닥나무 밭 저전을 파버리고 절 규모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전楮田은 닥나무 기르는 밭이었다.
“한번 돌이켜볼 말씀이오나, 조정과 타협을 해서 우리 금강계단을 유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에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저들은 신앙에 관한 한 타협이 없습니다. 사서삼경과 주자류의 언설에 몰두한 나머지 다른 종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근간 서쪽에서 온 젊은 기독승려들을 목잘라 장대에 걸어놓는 만이 같은 행투를 보면 타협이 애초에 불가야입니다.” 만이蠻夷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었다. 사대부를 오랑캐로 명명하다니 누가 들으면 목 달아날 언설이었다.
“그래도 누가 나서서 조정에 끈을 대야 합니다. 우리가 잘만 접근하면 만이 취급이야 당하겠습니까.” 선뜻 손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 어려운 일에 누가 나선다는 말입니까?”
“덕암당 스님이 영의정 나리와 사연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주지스님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사연私緣은 사적인 인연을 뜻했다.
“승상을 만나자면 도성 안에를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먹장삼 입는 족속은 도성 출입을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부터 처결할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미친 척하고, 중노릇 잠시 벗어던지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하잔 말씀이신지요?” 덕암당 혜경스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웠다.
“머리 기르고 속인들 속에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한 대여섯 달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고 무명수건을 질끈 동인 다음, 물장사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물장사 잘 하면 문안에도 들어갈 수 있고, 소문이 잘 나면 대갓집 물 대는 일을 맡을 수도 있을 거란 안이었다. 덕암당 스님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껄껄 웃었다. 눈가에는 물기가 잡혀 보였다. 중질 힘들어 못 하겠으면 가사 벗고 자기 찾아오라던 곱단이 얼굴이 떠올라 눈앞에 어른거렸다. 곱단이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인연의 길이 그렇다고는 했지만, 그게 꼭 자기가 선택해야 하는 인연인지는 확증이 없었다. 주지스님의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번졌다. 덕암당은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다. 한양에 가면 곱단이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말고는 달리 사람이 없을 듯합니다.”
“보시라고 생각하시오. 인욕바라밀을 늘 상념하시오.”
덕암당은 손을 모아 합장하고 목례를 했다. 약사전에 가서 108배를 올렸다.
“바라밀은 경우에 따라 실천 방법이 다르오.” 그 말에 이어 주지스님은 혜가단비慧可斷臂 이야기를 했다. 불가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달마대사(470-536)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임금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어려서 불교에 입문했다. 당시 불교계에 선편을 쥐고 있던 반야다라라는 스승에게서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라는 소명을 부여받는다. 당시 중국은 양나라 무제武帝때였다. 낙양 인근에 있는 숭산 소림사로 갔다. 숭산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굴이 있었다. 그 굴에서 9년을 정좌수행을 했다. 이후 달마는 신격화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이적이 화재畵材가 된다. 달마가 갈댓잎 하나 잘라서 그걸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는 이야기 그림이 ‘달마절위도강도’였다. 달마대사가 면벽수도 9년을 했다는 이야기는 ‘달마벽관도’에 담겼다. 달마가 가죽신 한짝 끌고 서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척리서귀’라 요약되는데, 그 행적을 그린 ‘척리달마도’ 등이 그것이다. 행적이 산화가 된다는 것은 그가 영험한 이적을 보였다는 뜻이었다.
당시 혜가(慧可, 487-593)라는 스님이 달마에서 처음으로 입문을 청해온다. 혜가의 본래 이름은 신광神光이었다. 달마가 선정에 든 석굴을 찾아가 사흘을 눈을 맞으며 기다렸다. 사흘이 지나 달마가 내놓은 화두는 이런 것이었다.
“너의 마음을 내놓아 보아라.”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의 정처를 알 수 없었다. 정신을 모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몸과 마음의 경계를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묻건대 그대는 눈 속에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감로수의 문을 열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옵니다.”
“공덕은 미미하고 마음은 교만하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어찌하란 말씀이옵니까?”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그게 마음이니라.” 독수리 한 마리가 혜가의 정수리를 치고 지나갔다. 발가락으로 이마를 긋고 지나는 바람에 피가 흘렀다. 손으로 이마를 쓸어 보았다. 이마는 육신인지라 작은 상처로도 쓰리고 아팠다. 마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은 내놓을 수 없어 몸을 내놓기로 했다. 혜가는 칼을 들어 자기 팔을 잘랐다. 붉은 피가 눈 위에 흘렸다. 그 때 언 땅을 뚫고 파초 한 줄기가 널찍한 잎을 벌리고 올라와 혜가가 자른 팔을 감싸쥐었다. 혜가는 소리내어 읊었다.
눈속에서 괴로움을 잊고 팔 끊어 구하니 入雪忘勞斷臂求
마음 찾을 수 없는 데서 비로소 마음 편하구나. 覓心無處始心休
훗날 편안히 앉아 평온한 마음 누릴 이여 後來安坐平懷者
뼈를 부수고 몸을 잊어도 보답은 모자람이여. 粉骨亡身未足酬
“인욕으로 법을 이루시기 바라오.” 덕암당이 산문을 나서는 날 푸른 하늘에서는 흰눈이 내렸다. 덕암당에게는 그게 붉은 눈으로 보였다.
대감을 만나러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 아득했다. 영추산 아래 저전마을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덕암당 스님은 맨발로 돌자갈길을 밟고 다녔다. 처음에는 얼어 터지고 돌에 차이기도 하고 해서 피가 흘렀다. 멈출 만하면 진물이 나서 감발한 무명천이 누렇게 변색했다. 감발마저 풀어버렸다. 상처에 딱지가 앉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굳은살이 돋아나는 동안 머리도 자랐다. 비로소 속인의 꼴이 나기 시작했다. 수염도 길렀다. 가사 대신 중의적삼을 입고 지냈다. 마당에 나오는 석간수를 돌보지 않고, 저동 저전마을 저 아래 큰우물까지 물지게를 지고 내려가 물을 길어올렸다. 한양에 가서 물지게질을 금방 능숙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물장사의 말씨도 익혀야 했다. 우선 촌로들의 말을 익히기 시작했다. 견유불성犬有佛性이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따위의 말들은 나무아미타불 찾는 불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촌로들은 이렇게 말했다. ‘마아, 수캐가 암캐 만나먼 방맹이 내놓는다 아이가.’ 지나온 길인데 잊고 지낸 셈이었다. 옥빛깔 말에 시커먼 먹물이 들어 생활의 실감이 바래서 뿌연 먼지만 일었다.
덕암당은 과천에서 발길을 멈췄다. 말죽거리까지 단걸음에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다. 한양이 무섭다니까 과천부터 긴다는 말을 그대로 수행하기로 했다. 잘났다고 설칠 일이 아니었다. 물장사의 세계는 돈을 매개로 해서 움직였다. 자리를 사고팔았다. 도성 안으로 들어가자면 집 한 채 값은 착실히 들어가야 했다. 덕암당은 그럴 수 없었다. 우선 이름이 나 있는 물장사를 알아보았다. 이름은 모르는 채 장가라고 불리는 물장사의 하수로 들어갔다. 덕암당이 물지게를 지고 겅정거리면서 걸어가면 장가는 뒤에서 곰방대를 물고 어정거렸다.
얼마 지나자 아예 덕암당 따라나서기를 그만두었다. 문안으로, 그리고 대감들 집이 몰려 있는 북촌으로, 물지게를 지고 드나들 수 있었다. 대소 집안일을 거들어주었다. 어떤 때는 막힌 굴뚝도 뚫어주고, 뚫어진 솥바닥도 때워주었다. 막힌 수채를 뚫어주고 빨랫줄도 매 주었다. 덕암당의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드디어 영의정 권돈인의 귀에까지 덕암당의 이야기가 들어갔다. 경상도사람이라고 해서 ‘겡상인’으로 통하던 물장사스님은 영의정 권돈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답답하오. 종이에다가 몇 자 적어 보내면 해결될 일은....”
“이 어려운 부탁을 어찌 편지로 한답니까.”
“알았소. 위로 오르시오.”
물장사로 들어간 대감집을 나올 때는 통영갓을 쓴 선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첩지牒紙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전국 사찰에 내려진 지역을 면하거나 감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감 권돈인을 만나, 통도사에 내려지는 극형과도 같은 지역紙役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학예사 최창학은 수행의 방법이 일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퇴지 사설의 한 구절이 훅하니 떠올랐다. 성인은 일정하게 정해놓은 스승이 없다, 왈 성인무상사聖人無常師란 구절이었다. 덕암당이야 말로 누구누구 가리지 않고 배움을 이루어간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꼭 팔을 자르고 남근을 베어버려야 얻을 수 있는 지혜라면 그게 어디 진정한 지혜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도전으로 내려갔다.
고승대덕들의 사리부도, 공적비들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 한 구석에 모서리를 잘라버린 평판 비석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한가운데 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비석 한가운데 세로로 이런 비명이 각자되어 있었다. 德巖堂 蕙璟 紙役革罷有功碑 덕암당 혜경 지역혁파 유공비라는 비석이었다. 비면에는 이런 시가 각자되어 있었다.
我師之前 累卵之團 아사지전 누란지단 우리 스승님 이전에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었는데
我師之後 泰山之安 아사이후 태산지안 우리 스승님 이후는 태산과 같이 안정되었네.
千里京洛 單獨往還 천리경락 단독왕환 천리나 되는 서울 혼자 다녀오시고 나니
春回覺樹 蔭陰葳蕤 춘회각수 음음위유 보리수에 봄이 돌아오고 초목은 무성했다네.
其儷不億 可止可居 기려불억 가지가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워 머물고 거할 만하거늘
樹此豊功 有寺無之 수차풍공 유사무지 여기 큰 유공비 세웠는데 절만 남고 스님은 안 계시네.
지역에서 풀려난 후인들이 공덕비를 세울 정도로 ‘지역’은 혹독했다. 덕암당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누란의 위험에 처했는데, 스승께서 한양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사찰이 태산과 같이 안정되었다니. 그런 공덕을 세우고 스님은 세상을 떠서 절만 남아 있다는 심회가 사뭇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덕암당이 찾아갔던 영의정 권돈인은 추사의 절친이기도 했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추사와 권돈인 둘이 똑같이 ‘세한도’를 그렸다. 그리고 초의선사와 추사를 통해 권돈인을 만난 소치 허련이 당대의 화가로 이름을 날린 데에는 권돈인의 각별한 우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학예사 최창학은 화가의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했다. 종이의 역사를 쓰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날이 저물고 주막에 지등紙燈이 밝혀졌다. 자신이 근무하는 낭양문화박물관 한켠에 종이역사관 같은 특별실을 하나 마련하고 싶었다.
ㅡ우한용
#우한용 단편
* (2023.4.18. 손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