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榮州)의 유불(儒彿)문화 유적
영주는 조선시대에 영천(榮川)으로 불려 지금의 영천(永川)과는 구별된다. 경북의 최 북부에 있어 경북의 봉화, 안동, 예천과 강원도 영월, 충북의 단양과 접경하고 있어 삼도와 맞닿고 있다. 태백(太白)과 소백(小白) 두 산맥의 가랑이 사이에 끼여 있는데, 양백지간(兩白之間)은 구인지수(救人之數)라 하여 정감록에 제일의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1962년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면서 도시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풍기(豐基)의 깊은 산골에는 현대문명과 담쌓고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옛날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동내가 있었다. 일제시대 정감록 신봉파들이 평안도에서 집단으로 이주해와 정착하고 있어서 평안방언을 연구하는 국어학자들의 이곳에 와야만 그 연구가 가능하여 학자들의 방문이 잦았던 곳이었다. 영주는 유불의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흔히들 ‘뚜껑(지붕) 없는 박물관’ 이라고 부른다.
영주는 성리학의 비조인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셔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의상조사(義湘祖師)에 의하여 법성게(法性偈)가 이루어지고 화엄학(華嚴學)이 동방에 개창(開創)된 부석사가 있어 우리나라 사상의 양대지류인 유불(儒彿)이 시작된 곳이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의상이 당나라에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그의 독특한 화엄사상이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화엄일승의 세계, 다시 말해서 진리로운 세계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7언 30구 260자의 시로 표현하여 하나의 네모꼴 도인(圖印)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것을 흔히 '법계도'(法界圖)라 하고 그 시를 일컬어 '법성게'(法性偈)라 부르는데, 모두가 화엄의 대의를 밝힌 것이다. 여기서 그는 화엄의 진리를 터득한 경지인 해인삼매(海印三昧)를 한량없는 세계가 남김없이 비치고 있는 부처님의 삼매에 비유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화엄종(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도 부른다.
의상이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모악산 국신사(國神寺)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밖에도 불영사(佛影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또는亮元)·상원(相源,또는常元,相元,相圓)·능인(能仁)·의적(義寂)등 이들은 의상십대제자(義湘十大弟子)·의상십대덕(義湘十大德)·의상십성제자(義湘十聖弟子) 등으로도 불렸다.
영주지역의 문화유적 몇 곳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1. 수도리(水島里 : 무섬)
문수면 수도리의 전통마을인 무섬마을인데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의 우리말 이름이다. 이 동네의 모습이 보기에 그렇다고 한다. 풍수지리상으로는 매화꽃이 피는 매화낙지(梅花落地),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국이라 하여 최고 길지로 꼽힌다. 모두 48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들의 세거(世居)로 이루어진 반촌(班村)이다.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고, 안동 하회마을과 예천의 회룡포(回龍浦) 마을과 흡사한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대표적 고가옥으로 김규진가옥(金圭鎭家屋), 김위진가옥(金渭鎭家屋), 해우당고택(海遇堂古宅),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해우당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고종16년(1879년)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중건한 건물로 해우당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2. 사현정(四賢井)과 죽계별곡(竹溪別曲)
순흥면 읍내리에 있는 옛 우물과 그 내력을 기록한 비와 비각이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이 우물은 오래 전부터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았던 안석(安碩)의 집안에 있던 것으로,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산 덕분에 그 집안에서 여러 명의 명사(名士)가 나왔다고 전한다. 안석(文敬公 安碩)은 순흥안씨 시조(子美)의 5세이고 안향(文成公 安珦)의 재당질(再堂姪)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직 자제의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향리의 집에 묻혀 살면서 세 아들 축(軸), 보(輔), 집(輯)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한다. "나는 관(官)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너희들은 학문을 닦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일을 하여라." 안석(碩)과 세 아들 이 모두 한 집에서 한 우물을 마시고 등과했다 하여 사현정(四賢井)이라 불렸다.
3. 종놈 배점(裵店)의 향학열
순흥읍내에는 배점(裵店)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다. 초암사(草庵寺)로 가는 길 3.5㎞되는 곳에 세 그루의 수령 600년가량 되는 느티나무가 서있는데 사람들이 삼괴정(三槐亭)이라 부른다. 이 나무의 남쪽 도로변에 작은 규모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삼괴정은 원래 배점 초등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는데 학생들의 운동에 지장이 있다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정려각에 매년 춘추로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충신이며 효자인 배순(裵純)이란 분을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한때 안동에 살면서 퇴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존경심을 품었다. 제자가 되고 싶었지만 미천한 대장장이 신분으로는 어림없었다. 배순은 10여리 길을 매일같이 걸어와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읽는 소리를 듣는것이 공부의 전부였다. 어느 날 문밖에 숨어서 엿듣는 배순을 본 퇴계 선생은 그의 간절한 학구열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안으로 불러들여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였고, 신분을 초월한 퇴계선생의 특별 배려로 인해 배순은 성리학의 거성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된다. 그런데 이 전설이 일반에게는 더 알려진 친숙한 이야기이다.
배점에서 우측으로 가면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부석사(浮石寺)를 지을 때 띠집을 얽어 놓고 기거 하였던 초암사(草庵寺)가 있다. 성혈사의 나한전의 가운데 칸 양쪽 문에는 연꽃과 연잎이 소담스럽게 활짝 핀 가운데 물고기를 쪼는 두루미,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맨 아래 연잎 밑에 숨은 듯한 물고기와 게, 연가지를 쥔 동자상 들이 아기자기하게 새겨져 있어 여름날 한가로운 연못의 정경을 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 문살에는 모란꽃이 한아름 소담스럽게 피어오르고 있다. 양옆 문에도 규칙적인 빗꽃살이 단정하게 아로새겨져 있어 가운데 문살조각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300년여의 내력과 이 문살조각의 독특함으로 인해 성혈사 나한전은 보물 제8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기 비로사의 비문은 금석학의 소중한 자료가 되며, 희방사는 폭포가 유명하나 부처님 복장(腹藏)에서 석보상절 등 불경이 나와서 중세국어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희방사에서 죽령재로 조금만 올라가면 퇴계선생 형제분이 전별하며 아쉬운 정을 담은 시비가 서 있다. 이산면의 흑석사(黑石寺) 당우는 법당과 약사전, 설선당, 종각, 환희전 등이 있다. 유물로는 목조아미타불좌상 및 복장 유물, 보물 제681호인 흑석사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효령대군이 권선하여 세조 등 왕실에서 법천사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1458년(세조 4)에 조성되었으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목조 불상이다. 이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로는 금동사리합과 사리 등이 있다. 한편,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통일신라 때의 것이나 불상과 광배, 대좌가 분리된 채 서로 떨어져 놓여있다.
여기서는 불교중심 유적만 몇 군데 소개 해 보았다. 유교와 다른 문화유적은 다음 기회로 돌려야 겠다. 영주의 유적을 관심있게 살펴보려면 최소 4박 5일의 일정이 요구되는 곳이다.
아쉬운 마음만 두고 다음기회로 미루어야 하겠다.
박희(朴熹 : 문학박사. 수필가) 강동 문화원 부원장,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평생교육원 부원장, 한국 문인협회 전통문학 연구 위원장, 대림대학교 교수, 동국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수원향교 유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