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arkantoss/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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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인 소설가 윤동수는 1960년에 출생하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 계간『사상문예운동』겨울호에 중편「새벽길」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쓸쓸한 오후」·「깊은 샘」·「살아있는 길」·「천변에서」·「첫 발자국」·「가을 그림자」·「내 안에 든
짐승」등과 중편「고백」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유인물을 거리에서 뿌리고 녹두서점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윤상원은 당장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도청만 남기고 시민들이 시내를 장악한
상태였다. 10만이 넘는 인파가 도청을 에워싼 채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투사를 자처한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민들의 확성기만으로 공수부대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청을 코앞에 둔 시민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했다간 공수부대의 무차별 총격이
가해져 엄청난 인명피해가 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시가지를 꽉 채운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지도부가 있어야
했다.
연락이
가능한 재야인사와 청년운동진영의 뜻을 모으자고 정상용이 제안했다. 그들이 모일 장소는 당연히 녹두서점이었다. 비로소 시민들의 항쟁을 이끌
지도부가 구성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흉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의 사병 특전단은 우리의 젊은 학생들을 총과 칼로 죽이고 처녀들의 귀를 자르고 부녀자들을 벌거벗겨 배를 갈라 거리에 널었으며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조차 개머리판으로 골통을 부숴 죽였다. ……처절한 광주! 핏빛 물든 아스팔트 위에 무참히 죽어가는 시체더미 위에 우리는
죽음으로써 함께 모였다.
애국
근로자여! 손에 닥치는 대로 공구를 들고 일어서라!
애국
농민이여! 손에는 삽과 괭이를 들고 일어서라!
삼천만
애국 동포여! 모두 일어나라!
승리의
그날까지 전 도민은 매일 정오를 기하여 전남도청 앞 광장, 공원, 금남로, 광주 신역으로 모이자.
1980년
5월 21일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회, 전남민주청년연합회, 전남민주구국총학생연맹〃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에 드러났듯 시민들의 피맺힌 분노, 죽기를 각오한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어떻게 한곳으로 모을 수 있을까? 저 투쟁의
물결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꾸린다면 공수부대를 물리치고, 전두환 일당을 타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불야학
강학들이 다 모이자 윤상원은「투사회보」를 발행하자는 제안을 했다. 신문과 방송은 끊어졌고 외부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광주지역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은 사라졌다. 도청만 남은 이 절박한 시기에 시민들을 끌어갈 지도부가 없다는 건 비극이었다. 오전에 시외전화를 개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간 전신전화국에서도 체계를 갖춘 지도부가 없음을 통감했다. 시민들은 전화를 개통하라고 아우성만 쳤다. 거리는 시위차량과 오가는 시민들로
혼잡스러웠다. 막대기로 교통정리를 하면서 지도부 결성을 앞당겨야 함을 윤상원은 절감했다.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시위대
맨 앞에서 계엄군을 향해 돌진할까? 마이크 잡고 목이 터져라 선동할까? 안타깝게도 우린 그런 힘이 없다. 10만이나 되는 시민을 이끌 조직을
갖추지 못했어. 지금은 시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싸우고 있다. 선전선동! 지도부가 없더라도 투쟁열기를 끌어올리고 싸움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어.”
자신들의
생계를 꾸리기에도 버거운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들이 보내온 쌀 3말과 12만원을 받은 윤상원은 감격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전두환 일당을
타도하고 공수부대를 몰아내는데 써달라는 그들의 간곡한 부탁이야말로 투사회보를 만들 수 있는
힘이었다.
선언문이나
궐기문을 더욱 알차게 찍어내기 위해 윤상원은 조직을 새로 짰다. 문안 작성은 윤상원과 전용호가, 등사는 김성섭·나명관·서대석·이영주가, 종이와
물자 보급은 김경국·정재호·신병관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유인물 배포는 강학들과 학생들이 함께 하였다. 거리에 내놓기만 하면 시민들이 불티나게
가져갔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다. 취사는 노영란·양숙경 등 야학 출신 여자들이 맡았고, 작업실은 야학 근처 빈집으로
옮겼다.
시민들의
항쟁지도부를 구성하는 문제를 가지고 윤상원은 녹두서점에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19일에 시위를 하다가 잡혀간 사람들은 석방됐건만
김상윤처럼 예비검속 때에 연행된 사람들은 풀려날 기미가 안 보였다. 자체적으로 꾸려나가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어찌했으면 좋을까 묻던 참이었다.
총성이 연발로 터지자 서점에서 북적대던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갔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윤상원과 더불어 회의하던 녹두서점의
식구들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실시한 것은 오후 1시쯤이었다.
“아,
놈들이 총을 쏘면 광주시민들도 싸움을 지속하기 힘들겠구먼.”
누군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녹두서점이 더 이상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린 윤상원은 서점을 정리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쳤다.
“지금부터
잡히지 말아야 돼. 각자 알아서 도피하라구!”
정상용과
이양현이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몸을 숨겼다. 정현애는 돈을 건네주며 남들처럼 시골에 가서 숨어있으라고 윤상원에게 신신당부했다. 윤상원은 그들과
헤어지면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님,
공수부대 놈들이 총을 쏴대는 데 이까짓 종이쪼가리나 만들어서 뭐합니까?”
투사회보
작업실을 박차고 들어온 서대석이 고함을 질렀다. 윤상원은 다짜고짜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
자식아, 유인물 작업도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흥분해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시민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겠어?
시민들을 이끌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선전선동은 생명과 같은 거야! 투쟁열기를 높이고 투쟁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일임을 명심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수부대의 학살만행을 고발하는 게 우리의 임무야!”
서대석에게
호통을 친 윤상원은 혼신을 다해 투사회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작업반원들을 다잡아나갔다. 녹두서점에서 동지들과 헤어진 윤상원은 차마 광주를 떠날
수가 없었다. 태극기를 덮은 시신을 손수레로 끌며 금남로를 누비던 시민들, 어느 동네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실어 나르던 시위 차량, 빵과 우유
음료수와 김밥을 나눠먹으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민들을 두고 시골로 몸을 숨길 수는 없었다.
공수부대가
본격적으로 무력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난국을 누구와 의논한단 말인가? 중간에 만나기로 한 장소인 보성기업이나 녹두서점에 전화를 거듭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다. 그나마 연락이 닿은 몇몇 사람들과 상의를 했지만 몸조심하라는 당부의 말뿐이었다. 일부 시민들은 총기를 탈취해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총격전까지 벌이는데 항쟁지도부마저 제대로 구성되고 있지 못하니 그저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무장투쟁의 거리에 투사회보라도 없다면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