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안토니오형제회 연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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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옥레지나 24.10.13 21:00
이 일정 중 강의 ( 사부님의 오상과 하느님의 선) 내용만 공유합니다
1. 제 1강의(이 시대에 주님을 따르기)
25년 동안 재속회 영보를 역임, 프란치스칸이 된 것에 늘 기쁨을 느끼고 있다. 서원을 한지 40년, 사부님의 제자로써 살아온 것도 40년이지만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노인자격증이 생기니 영육 간 의지도 약해지는 중이라 사부님처럼 사는 길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은 철모르고 살았고, 60이 넘으니 지금까지의 삶이 연습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60이 넘은 지금이 본격적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연습게임 60년, 이제 본게임 시작이라 생각하니 더 적극적으로 주어진 삶에 임하게 된다.
프란치스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이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이정표(모범적 삶)가 있는 길이라 우리는 그 길만 잘 따라가면 된다. 종신서약은 한 눈 팔지 않고 사부님과 함께 복음적 삶을 충실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서약하는 것이다.
산에서 조난당하는 것은 교만해서다. 앞서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루트만 따라가면 조난당하지 않고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정상이 어딘지 모르겠고 올라가는 자체로서도 많이 힘들겠지만 올라가서 정상에 서면 기쁨이 넘친다. 높은 산을 등반하는 산행에는 많은 동료들과 동행하게 된다. 혼자만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 한 동료들과 함께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형제적 삶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씨시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 프란치스칸적 삶을 살고자 하셨다. 21세기인 지금 이 시대에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프란치스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교회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프란치스코가 요청되는 시대이다. 프란치스칸적 삶이 급해진 시점인 시기, 이러한 시대에 나는(우리는) 프란치스칸이다. 자랑스러울 일이다(오상, 태양의 찬가, 선종 800주년) 교회와 세상을 쇄신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 800년 전에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변화시켰듯이 지금 그런 변화가 요청되고 있다.
사부님이 지금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부님과 그 동료들이 처음에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기억하고 그것을 따라하면 된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그들에게 있었을까?(그들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에게도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있었을까? 어리석어보이는 이들이었지만 세상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사부는 제자 12명이 모이자 로마로 갔다. 그리고 인노첸시오 3세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인준 받았고 성직자만 설교가 가능했던 시대에 회개의 설교권을 받았다.(머리 중앙을 삭발하는 삭발례로 교황의 인정을 표시) 회개의 설교권은 하느님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소명이다. 삭발례를 통해 설교권을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부는 설교하면서 먼저 평화의 인사를 했고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하셨으며 회개하라고 늘 촉구하셨다.
종신서약은 회개의 설교권을 받는 것이다. 교회가 우리에게 청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정신으로 살 것인지 질문, 보다 형제적으로 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것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종신서약을 했으니 교회의 소명에 적극 동참해서 보다 형제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신서약으로 프란치스칸이 되었으니 사부님과 동료들이 했던 것처럼 살면 된다. 세 가지만 잘 하면 된다. 프란치스칸의 3가지 소명은 “1. 평화의 인사를 전하라. 2. 하느님을 찬미하라. 3. 회개하라.”이다. 이는 교회의 소명이기도 하니 적극 동참해야한다. 보다 형제적인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제 2강의(평화, 찬미, 회개)
①평화의 인사는 누구나 좋아하는 인사이다. 가장 좋은 축복이다. 나는 평화의 사람인가 스스로 질문해보라. 평화의 인사는 감사로 연결된다. 내가 평화의 사람이여야만 평화를 전도할 수 있다. 우리 사부와 동료들은 평화의 사도였다. 평화의 사람이 되려거든 먼저 평화의 인사를 해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는 사랑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평화를 이루며 산다.
평화의 인사는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의 자녀로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평화가 상대에게 머물길 기도하고 인사를 전하면 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이 인사는 하느님께서 계시로 사부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사부는 모든 피조물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해셨다. 원수든(인간쓰레기일지라도) 친한 사람이든 아니든, 가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든지 평화의 인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의 인사는 예수님이 먼저 하셨고, 사부님은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그러니 프란치스칸인 우리도 당연히 따라해야 한다. 평화의 사도인 우리 사부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평화의 인사를 했다.
평화롭고 싶다면 평화를 빌어주라. 평화를 빌어주면 그 평화가 나에게 돌아온다. 복을 빌어주면 그 복이 내게로 돌아온다는 이치와 같다. 복이 전달되듯이 저주도 전달되니 끊임없이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자녀에게도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 평화는 나의(우리의) 소명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평화, 무조건, 시도 때도 없이 진심으로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고 하느님의 선물이다. 평화를 전하는 것을 나의 소명이라 여겨라. 하느님이 교회를 통해, 프란치스코를 통해 주신 가장 귀한 소명이라 여겨라.
②우리 사부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하신다. 현 시대의 하느님 찬미는 21세기인 지금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하다.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보살피고 보존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800년 전 우리 사부가 했던 것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현재를 살아주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 사부는 하느님 찬미의 전문가였다. 형제들에게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하셨다. 태양의 노래, 시간 찬미경은 사부가 만들어주신 하느님 찬미의 모델이다. 사부님이 권고하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 피정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해 주신 것도 감사, 좋은 날씨도 감사, 오상선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도 감사 등 감사할 것이 수두룩해진다.
우리 사부의 모토는 평화와 선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사부의 꿈이었다. 이는 프란치스칸의 모두의 모토가 되어야 한다. 포르치운쿨라는 천사들이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특별한 장소(전대사)로 인정된 곳이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내 꺼가 아닌 가난이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사부님은 좋은 것은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내 것으로 취하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셨다.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다시 전달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셨다. 감사와 찬미를 잘 드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궁핍함 자체는 싫어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알고 사는 것은 중요하다. 나누는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평화의 인사와 하느님 찬미는 우리가 꼭 해야 되는 사명이다. 핑계가 필요 없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프란치스칸의 이 행동은 세상의 변화로 연결될 것이니 자부심을 가져라.
3. 제 3강의(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그 자체가 곧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가난한 사람이니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감사의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 찬미로 초대된다. 항상 감사를 연습해라.
십자가의 영성이 우리 사부의 영성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수난 상처인 오상을 받은 것이다. 수난을 애도하며 대성통곡한 우리 사부(울보 프란치스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수난 당하고 죽으심을 극도로 슬퍼하신 우리 사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사부님은 매년 4번의 사순절을 지내셨다. 성모승천과 미카엘 대천사 축일, 모든 성인 대축일과 성탄시기, 주님공현축일 40일, 부활전 사순시기 40일 등, 십자가를 너무 사랑한 사부는 1년에 반 정도를 은둔소에서 40일의 사순절을 지냈고 반은 설교하면서 지내셨다. 사부의 삶은 끊임없이 주님 수난을 묵상하는 삶이었다.
오상은 생애 내내 주님 수난을 묵상하면 주님 고통에 함께 하고 싶어 한 열망의 결과였다. 십자가 위에 우리의 신앙이 만들어졌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일어났다. 사부님은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직접 겪어보고 싶어 하셨다. 내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사랑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다. 엄마가 되어야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버지가 5세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아버지와의 체험이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로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교만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라. 인간은 육으로나 영으로나 하느님과 유사하다. 그대는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랑거리는 예수님이다. 십자가를 매일지는 일,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오히려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부님이 십자가 앞에서 드린 기도(다미아노 성당- 나의 집을 고쳐라)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세상의 빛이시며 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시나이다. 제에게 올바른 신앙과 완전한 희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의 뜻을 알고 말하고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이 기도는 로마 미사 경본과 유사하다. 이 기도는 사부가 회개하기 전 길을 찾는 기도였다. 사부께서 길을 찾으며 드렸던 이 기도는 지금 성소를 찾는 이들, 막막하고 힘들 때 드리는 기도로 발전했다.
사부는 자신 안에 있는 어두움을 발견하고 길을 찾지 못하게 되자 기도하신 것이다. 내 안의 어둠은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는 어둠이다. 우리는 어둠을 스스로 만들고 자꾸 어둠이 짙어지게 만든다. 빛의 부재가 곧 어둠이다. 하느님의 부재가 어둠이다. 어둠을 없애면 빛으로 나갈 수 있다. 어둠 속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지만 빛은 길을 찾게 만든다. 거룩하고 참된 명을 실천에 옮기려면 믿음과 희망, 사랑의 덕이 필요하다. 영적인 감각, 깨달음이 필요하다. 어두움을 밝혀주시길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해야 한다.
십자가의 흠숭기도(성무일도 전 후 기도)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찬양하나이다.」
이 기도는 십자가의 길 공식 기도문이 되었다. 사부가 가장 좋아한 기도였고,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이다. 떼제공동체의 중심 기도이기도 하다. 왜 성체 흠숭이 아니고 십자가 흠숭일까?
모든 그리스도인들(개신교인들도 포함)에게 십자가 흠숭은 공통점이다. 일치의 도구로 작용한다. 성체를 중요시 하지 않았던 시대를 지나 성체 흠숭의 시대가 열리면서 교회는 성직화(성체 지상주의)가 되었다. 성직자의 권력이 강화된 것이다. 성체는 사제만이 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였으나 중세 이후 성체 흠숭이 강화되었다. 교회는 신앙적으로는 십자가가 중심, 감실은 항상 십자가 보다 옆으로 만들어 놓는다. 성체는 우리에게 좋은 양식으로 작용, 구원은 십자가로 이루어진다. 성체를 통해 예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도움을 받고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중심이 된다.
출처: https://cafe.daum.net/ofsseoul/ffNj/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