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사람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의 사상은 철학에서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신학에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존주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칸트와 헤겔의 추상적 세계와 반대되는 현실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명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가 흥미로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존주의자이지만 같은 실존주의자인 니이체와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철학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적으로 간주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당시 네덜란드 국가교회였던 루터교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는 개인이 기독교 세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물었습니다. 이 말은 당시 덴마크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독교인이라 여겨졌던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기독교 세계였고 그들은 바른 정통적 신앙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인격적 관계를 맺는 실존적 신앙은 결여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바른 정통교리를 안다고 해서 진정한 신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그는 정통적 교리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정통적 신앙고백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소 혼란스러운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참된 개념을 알고 있음에도 그릇된 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것 자체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자가 비록 눈으로 우상의 형상을 바라보더라도 무한한 것에 대한 온전한 열정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것이 진실이 아닐까? 묻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오해와 혼란을 불러왔습니다. 그의 주장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해 어떤 해석이 가능하든지 간에 그의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긍정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명제를 무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그에 관한 다른 많은 것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아무리 깊은 철학적 식견이 있든 그렇지 않든 항상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화석화된 교조주의는 분명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버린다고 해서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균형을 잃으면 객관을 저버리고 주관화 되거나 반대로 죽은 정통만 남게 됩니다. 그래도 그 시대 상황에서 죽어 버린 교조주의에 반발해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실존적 관계를 추구하려 했던 그의 태도만큼은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