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3일(월)입니다.
그동안 구교에서 생활하던 Y형제님은 사역 후 나의 책 ‘십자가 중심 기도’(지금은 시중에 판매되지 않음, 십자가 중심 기도를 편집 수정하여 출간한 것이 “365일 영적 무장을 위한 성경중심의 생활기도”)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새로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언을 받을 때, 성경을 볼 때, 설교를 들을 때 예수님을 모시고 살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말씀을 들었고 성경을 보았고 예언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중심기도는 매일의 구국기도를 구체적인 삶 가운데 적용하려고 애쓴 믿음의 흔적들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영적인 삶을 살고자 늘 예수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다지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면 살고 하나님이 죽이시면 죽겠습니다.”는 순교사상을 마음에 새기며 하루하루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중심에는 자기포기가 항상 배여 있습니다. 자존심과 교만, 욕심이 죄의 으뜸이므로 그것을 버리는 것이 목표요 나는 죽어가면서도 예수님만을 붙드는 믿음, 사람의 칭찬을 바라는 외식과 조직에 따르는 구조 악을 배제하고 오로지 주님과의 직접적인 교통과 인도를 목표로 기도했습니다. 자기포기를 통해 말씀순종의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 용서의 십자가, 자족의 십자가도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영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 기도의 표현은 달라도 여러 각도에서 기도가 반복됩니다. 예언의 말씀을 명심하고 늘 중심을 다지면서 주님이 내게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한 순종의 노력이었습니다.
성경의 중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자기포기(자기 죽음)를 통해서 실천이 되는데 그것은 공의의 예수님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고 순교하는 만큼 하늘의 상이 크고 낮추어지는 만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자는 낮아질 수 있으며 원수까지 용서하며 축복하며 섬기는 자가 됩니다. 물론 그 사랑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영적이고 거룩한 십자가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은 영안이 열려 예수님의 인도받기까지 우리가 했던 것처럼 십자가 중심 기도만을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문자적인 말씀과 기도에 집착하는 사람은 살아계셔서 친히 내 삶을 간섭하시며 인도하시는 예수님, 영안과 대언을 통한 예수님의 인도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따를 때 더 많은 시험과 고난이 따르므로 책 속에서 자기 경건을 추구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수원 전도단 사람들에게 있는 책을 나누어 주어 보게 했는데 그분들이 영안과 예수님의 인도에 대한 생각이 약화되었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좋다고 그것에 집착했습니다. 구역모임에서 그것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의 생생한 인도와 현재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자적인 말씀에 매여 예수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고자 영안을 사모하지 않는 모습에 고통하면서 100권정도 되는 책들을 단호히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책보다 예수님의 인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영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 예수님의 인도를 직접 받지 못할 때 사람은 문자적인 말씀과 기도에 집착하게 됩니다.
십자가중심기도는 예수님이 방문하시기 전의 기도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십자가중심기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전 부단히 자기포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통치와 인도를 갈망했던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말씀 중심은 붙잡고 산 그때 우리의 삶은 고단하고 곤고하고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 중심을 다 행할 수 없는 한계에서 늘 고통 해야 했습니다.
자기포기라는 십자가중심사상은 예수님의 인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구별의 중심도 예수님을 의식하며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와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그 음성을 듣는 인도가 우선입니다.
예수님의 인도에 순종하므로 우리의 성품을 변화되게 하시며 사역으로 인도하시며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의 기도내용을 예수님이 이루시고 계시므로 예수님만 집중하고 따르면 됩니다.
자기포기라는 기도의 중심을 보시고 응답하여 오셨고 오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인도에 순종함에 있어 자기포기는 여전히 우리 삶의 내용이요 바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고 이끄시므로 우리에겐 문자에 매이지 않는 기쁨이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스스로 구별해야 하는 것과 예수님이 구별해 주시며 이끄시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십자가중심기도는 중심을 바쳐야 하며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중심기도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설교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설교와 기도를 전부 삶에 적용하면 우리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모방하고 삶에 적용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기도제목대로 살려면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약속을 받은 자라야 지켜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깨달을 때 고난을 이겨내며 순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유형의 조직이나 공동체는 지도자 중심으로 조직과 공동체의 연합과 화평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과 인도를 강조하는 십자가중심을 다 소화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그 구조적인 모순을 버리지 못하면 기존의 삶에 거룩을 모방한 외식을 덧칠하므로 영적상태는 더 나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교회의 틀에서 십자가중심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그 내용대로 다 행하며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조직과 형식이 우선하고 중심을 차지함으로 십자가중심의 내용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간섭을 수용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분적으로 기도의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적용하는 사람의 경우는 영적인 지식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므로 더 교만해 집니다. 거룩한 지식으로 인해 외식의 죄를 짓게 되며 고상한 마귀의 종노릇할 위험성이 아주 높습니다. 세밀한 분별력으로 자기의 흠을 보고 회개하기보다 남의 들보를 보고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의 죄를 지으며 경건을 가장하는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도 영안이 열린 사람을 통한 예수님의 인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믿음이 더 중요하고 우선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문자적인 말씀이나 기도에 매여 영안과 대언을 통한 예수님의 실제적인 인도를 등한시 하거나 거부한다면 십자가 중심의 말씀과 기도를 해도 영적 유익이 전혀 없습니다.
기도는 실제적으로 예수님과의 교통과 인도를 받기 위한 것인데 실제적인 기도의 응답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계속 혼자 기도의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의 계획으로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배척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섬기는 삶은 교만한 마귀가 주장하고 이끄는 삶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 떨어지다 나뭇가지를 잡아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다급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외치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나뭇가지를 잡은 손을 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 말고 그 누구 없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뭇가지를 놓았다면 안전하게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 밑을 보지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 발이 땅에 닿을 정도의 높이에 불과했습니다. 우매무지한 인간의 단적인 모습이 드러난 예입니다.
육신의 만족과 자기의 목숨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자는 예수님이 좀 힘든 요구를 한다 싶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다른 이를 찾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찾는 다른 이는 마귀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욕심으로 분별하여 살 길을 찾으려 하다가 고생만 실컷 하고 마귀를 섬기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으로 결단할 때 영적인 분별이 되며 예수님이 수고의 짐을 덜어주시므로 십자가의 길을 쉽게 가며 영생으로 예수님이 인도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