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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01 주일 낮예배 메시지
제목: 오는 세상 이야기(9) 마태복음의 종말 이야기9
성경본문: 마태복음 25장
천국에 대한 마지막 세 가지 비유(1) 열 처녀 비유
천국에 대한 마태의 이야기
마태복음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이라는 말이 37회 나옵니다. 그 중 디모데후서[1]에서 한번을 제외하면 모두 마태복음에만 36회에 걸쳐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다음 몇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를 할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첫 메시지를 전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들만 들어갈 것이요 다만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들어갈 것은 아니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이 빼앗을 것이라(마 11:12)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이 어떤 곳이며 무엇이기에 빼앗을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마태가 하늘나라라고 한 것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거슬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존(至尊)의 이름이나 직책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동양적 사고로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미국에서는 Mr. President라고 부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공무원들은 대통령을 부를 때 “각하”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합니다. 마태가 주로 만나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기 위해 가급적 하나님 나라라는 말보다는 하늘 나라 곧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를 환영하는 사람들이라야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돌짝밭과 같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심령에는 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온갖 탐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천국을 받아들이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처럼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마 13:33).
주님의 나라 곧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살 정도로 좋아합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그렇게 좋아하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한 제자들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손에 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마다 천국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니 그들이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는 것입니다(마 16:19).
천국은 부익부빈익빈의 차별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주님이 다스리는 곳이라 공평과 정의가 가득합니다. 주님의 공평은 포도원에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모두 같이 즐거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마 20장).
이 천국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세상 나라들은 그 권세를 가진 사탄의 통치 원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더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보려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돈, 명예, 그리고 쾌락에서 옵니다. 사탄은 이렇게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자의 힘과 그에게 굴복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알려주면 무엇이나 하려는 사람들이 지금 이 세상의 임금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귀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말합니다(12:31, 14:30, 16:11).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던 세상 임금에게 아부하고 충성하던 삶을 벗어나 참 임금이신 예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주께서는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모친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천국복음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고 새로운 왕께서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임금에게 고통 받던 사람들이 물밀듯이 그 나라로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侵擄)당합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다고 말하던 여인은 자신의 딸을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의 묶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도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천국의 권세를 빼앗은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라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그 밭을 샀던 사람처럼 이제도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새로운 왕이 오셨음에도 그분을 박대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책망을 가득 담아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준비했는데 종들을 시켜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 외면했다. 다시 왕은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것이 마태복음 22장의 이야깁니다.
천국을 외면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의 삶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알기는 하지만 순종하지는 않는구나! 겉으로 생색은 내지만 속은 거짓으로 가득하구나! 겸손하게 섬기기보다는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로구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같으나 진짜 중요한 정신인 사랑과 정의와 충성은 찾아볼 수 없구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는 결국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너희 조상들보다 더 악하여 메시아를 죽이겠구나! 너희를 일깨우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더냐? 암탉이 그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고 한 것처럼 다가오는 심판으로부터 너희를 보호하려고 얼마나 내가 손짓을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였도다! 결국 심판을 받아 망하리라!
그렇게 주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면서 함정에 빠트릴 질문이나 하는 교활한 이들에게 주께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습니다: 결국 너희가 사는 이 땅 그리고 너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성전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참으로 다니엘의 말한 바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모든 권세를 물려 받은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에는 이런 저런 징조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의 이야깁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을 통하여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그 나라를 믿음으로 받는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그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시고 심판을 선고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의 이야깁니다. 천국에 대한 그 세 가지 비유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이야기와 주인이 먼 나라에 가면서 맡겨준 큰 돈 곧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이야기, 그리고 목자가 들에게 양과 염소를 놓아 기르다가 다 불러 모아 우리에 들일 때는 양과 염소를 나눈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즉, 열 처녀, 달란트, 그리고 양과 염소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오늘의 설교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다룹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마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이 어떤 곳이며 어떤 나라인지를 먼저 다룬 것입니다. 그 흐름을 이어서 본문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 세 가지의 비유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이 비유를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마지막 세 가지 비유- 1. 열 처녀 이야기
우선 간단하게 이 세 가지 비유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처녀 열 명이 있었습니다. 밤중에 결혼을 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이 밤중에 오기를 기다리면서 등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오면 맞으러 나가서 혼인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은 등불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였고 나머지 다섯은 등불만 준비했습니다. 기름이 담긴 그릇을 준비한 다섯 여인들은 신랑이 늦게 오면 등불이 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준비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만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에 대한 준비는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가고 열명의 처녀들이 다 같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깊은 밤, 드디어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났습니다. 처녀들은 자신들의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다섯 처녀들은 환히 빛나는 등불을 들고 나가는데, 그만 다섯 처녀들은 다 꺼진 등만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갔다가는 신랑에게 외면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불이 살아 있는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 꺼진 등불을 가지게 될까 하니 어서 기름 집에 가서 사 오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 가지고 와서 보니 혼인 잔치는 시작되었고 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밖에 있는 처녀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 외쳐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문지기들이 결혼 잔치의 주인인 신랑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신랑은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누가 지혜로운 처녀들입니까?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마치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24~27).
어떤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냈을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 악한 열매를 맺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비유를 통하여 천국을 얻을 자들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이 땅에 오신 신랑을 맞을 준비를 못하여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입니다. 뒤늦게 부르짖어도 그들의 부르짖음은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랑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만나 신랑이 베푸시는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 잔치에는 치유와 용서와 회복, 평안과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런 잔치를 예수님께서는 가는 곳마다 세리들과 낮은 자들과 더불어 나누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우리는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등불을 준비하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어떤 선지자가 나타나면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점검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서 메시아인지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 앞에 신랑 되신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의 등불은 이미 꺼져버렸습니다.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감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잔치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는 의혹의 눈길을 던지면서 바라보고, 또는 아예 저 거짓 선지자를 곤란에 빠트릴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잔치자리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그 기쁨의 잔치자리에서 함께 먹고 마셨지만 율법과 종교의 전문가들은 냉랭한 가슴을 안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왔으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의 모습을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이유는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신랑을 맞으러 갈 때는 등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대로 그렇게 임의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때는 이 세상의 왕인 마귀를 몰아낼 것이며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이미 성경을 통해 약속을 해 주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메시아는 이런 분일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해 놓은 메시아의 규정에 예수님이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갈릴리와 같은 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목수의 아들이라면 그는 좋은 가문은 아니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닐 것인데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아닌가? 로마인들도 그런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인데, 그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는 우리가 잘 지키는 율법과 성전을 존중하지도 않잖아? 그가 성전에서 어떤 행패를 부렸는지 생각해 보라고!
이 모든 생각은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을 육신적으로 대하면 안되거늘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어도 충분히 존귀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만한 직업이나 직위에 있어보지 못했을지라도 충분히 귀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행동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맙시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고 행동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합니다(고후 5:16~17):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이 부분을 좀 더 실감나게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Because of this decision we don’t evaluate people by what they have or how they look. We looked at the Messiah that way once and got it all wrong, as you know.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들이 가진 재산이나 외모에 따라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때 메시아도 그런 눈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 되신 참 메시아께서 자기 동네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것입니다.
환한 등불, 꺼진 등불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신랑 되신 메시아께서 서울에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에 갇혀서 우리 가운데 오신 신랑을 외면하지는 않을까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등불은 신랑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이를 메시지 바이블의 표현으로 살펴봅시다:
Your eyes are windows into your body. If you open your eyes wide in wonder and belief, your body fills up with light. If you live squinty-eyed in greed and distrust, your body is a dank cellar. If you pull the blinds on your windows, what a dark life you will have!
너희의 눈은 너의 몸의 창문이다. 만약 너희가 경이로움과 믿음으로 너희의 눈을 활짝 연다면, 너희 몸은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탐욕과 불신으로 사팔뜨기 눈을 가졌다면 너희 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과 같이 될 것이다. 너희 마음의 유리창을 닫아버린다면, 너희 인생이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한 소경이 나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와서 눈을 고침 받고 나서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Jesus then said, “I came into the world to bring everything into the clear light of day, making all the distinctions clear, so that those who have never seen will see, and those who have made a great pretense of seeing will be exposed as blind.”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모든 것을 대낮같이 환하게 드러나 분명히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볼 것이며, 뭘 좀 볼 줄 안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경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학식도 많고 존경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은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불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려서 눈 앞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는데 그들만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꺼져버린 등잔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누가 소경입니까? 어떤 사람의 등불이 이미 꺼져버렸습니까? 탐욕과 불신앙에 갇힌 사람이 소경이요 그들은 어리석어 꺼진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인사합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갑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 왕의 왕이십니까? 그분이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상을 준비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까?
어떤 일을 판단하고 선택할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선택합니까? 이제는 희망이 없구나! 이제 큰일 났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우리 곁에 과연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는데 과연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갑니까?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를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아람왕이 엘리사를 납치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성을 총공격합니다. 그는 밤중에 군대를 보내 도단성을 에워싸고 해가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일어나 자기 성을 에워싼 적군을 보고 기겁하여 엘리사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위로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6:16).”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불말과 불병거를 이끌고 와서 적군보다 더 많은 수로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한 것이 현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군대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까? 둘 다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현실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죽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이 승리할 것입니까? 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죽을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소경일 때 우리가 하는 생각입니다. 환경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열 처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여기서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닫히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탐욕과 불신앙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의 등불을 꺼지게 합니다. 그러면 깨어 있는 사람, 그가 들고 있는 등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 그의 혼인잔치에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다 믿지 않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올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여유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성도 여러분, 열 처녀 이야기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오는 처녀들은 누구일까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랑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때는 언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을 종말의 때, 또는 재림의 때라고 말합니다. 천국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즉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고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말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와 계시며,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께서 오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총을 맛보고 주님과 함께 잔치하며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박해와 어려움이 있었으나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났습니다. 병이 고침 받고 죄가 사함 받으며,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승천 하시고 난 이후,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자신들 가운데 일하시는 예수님을 인하여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통치하시면서 그들에게 이 세상의 임금에게 굴복하지 않으면서 환난과 핍박 중에도 기뻐하는 천국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役事)하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깨어 있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에 참석하면서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미련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세상 욕심과 불신앙으로 등불이 꺼져버린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감긴 소경입니다. 그러나 누가 지혜로운 다섯 처녀입니까? 그들은 기름을 준비하여 환한 등불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마다 매일 주님의 혼인잔치에 들어가 기쁨의 잔치를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언젠가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완전한 천국 잔치의 맛을 볼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