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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소설창작론(4~6)
4. 소설을 다 써 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밑그림을 그려라.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에는 두 명의 소설 천재가 등장한다. 세상을 등진 채 고층 아파트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괴짜 소설가 윌리엄 포레스터와 그를 만나 잠재되어 있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16세의 흑인 고등학생 자말 월라스가 그들이다. 포레스터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타자기를 두드리라고 권한다. 생각하지 말고 의식하지 말고 내면의 충동에 따르라고, 춤추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충고한다. 자말은 포레스터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리고 천재를 증명한다.
이 영화는, 은연중에 소설 천재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고, 천재가 아닌(예컨대 내면의 충동에 따라 춤추듯이 자판을 두드린다는 걸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 한) 많은 성실한 문학 청년들을 절망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그와 같은 방법은 아마도 소설 천재들의 글쓰기 방법인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 신동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 했다. 다섯 살 때 작곡을 했다는 음악가도 있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다는 수학자도 있다. 그러나 열 몇 살에 걸작을 쓴 소설가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 했다. 소설은 신동이 없는, 있을 수 없는 장르이다. 소설은 풍부한 체험과 깊은 사유와 신선한 상상력이 조화롭게 섞여 이루는 하나의 몸이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술의 습득만도 아니다. 삶이, 삶에의 두껍고 깊은 참여가 소설을 만든다.
우연에 기대고 영감에 의존하는 소설쓰기에 대한 환상은, 당신이 천재가 아니라면,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가끔씩은 그야말로 우연히 그럴듯한 영감이 떠올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대개 영감은 단편적인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소설이란 지속적이고 입체적인 사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영감과 우연, 또는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 소설이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른다. 일단 이미지가 떠오르면 첫 줄을 쓴다. 그리고 영감에 맡긴다. 참 멋있게 들리는 말이다. 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 보면, 이 말은 마치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왜냐하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가 섬기는 신이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 줄 테니까) 설교대에 오른다는 신비주의적 종교인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이걸 쓰면 소설이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걸 붙잡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막연한 생각을, 어떤 형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는 일이다. 소설가는 신비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궁리하고 추리해야 한다. 소설은 막연한 생각이나 실체가 없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교한 조형물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정교한 조형물을 쌓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막무가내로 대들겠는가.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하다. 설계도는 축소되어 있지만 생략되어 있지는 않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역시 설계도가 필요하다. 소설의 설계도도 역시 축소되어 있을지 몰라도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그 역시 천재겠지만, 그렇게 하면 영감을 방해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감은 치밀한 설계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밑그림을 잘 그려 놓았을 때 영감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경험을 한다. 설교 준비를 치밀하게 열심히 한 사람의 입에 하나님이 더 좋은 말을 넣어 준다고 나는 믿는다.
쓰다가 중단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설계도나 밑그림 없이, 자신의 재능이나 우연한 축복만을 기대하고 무작정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발상은 떠올라서 출발은 하고 보았지만, 어떤 길을 통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 한 상태이니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미리 알고 출발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릴 수가 없다. 나에게는 쓰다가 도중에 중단한 소설은 한 편도 없다. 다만 아직 쓰지 않은 소설들이 있을 뿐이다.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설계도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다 써 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
5.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쓰다가 만 소설,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소설, 수습이 안 된 채 끝나는 소설, 앞과 뒤가 사뭇 달라서 혼란스러운 소설들은 대개 밑그림 작업을 거치지 않고 집필된 소설들이다. 설계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이 불안한 것처럼 이 작품들도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밑그림은 치밀하고 세밀할수록 좋다. 코가 엉성한 그물에는 작은 고기가 걸리지 않는다. 축소는 하되 생략해서는 안 된다. 가령 당신이 어떤 인물에 대해 밑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고려할 항목들이 얼마나 될까. 이름, 직업, 나이, 결혼 유무, 결혼했다면 자녀가 있는가 없는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독신주의자인가, 아닌가, 대학을 다녔는가, 안 다녔는가, 다녔다면 전공은 무엇인가, 운전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키와 몸무게, 시력, 고향, 부모들의 성향, 성격, 버릇, 외모상의 특징……. 할 수 있는 한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 생각해 두는 것이 좋다. 소설쓰기는 본질적으로 고상한 일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이다.
완성된 소설에 나올 내용을 미리 다 만들어야 하고, 완성된 소설 속에 나오지 않을 내용도
밑그림에는 들어 있어야 한다. 정작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정밀한 구조물로서의 소설을 완성시키고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인물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면서 몸무게와 키와 시력과 취미와 태어난 곳과 사는 동네와 자동차 운전 능력 여부 따위와 같은 자질구레한 내용들을 설정해 놓았다면,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직접 그런 내용이 서술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의 어떤 행동이나 그 행동을 하는 순간의 심리 상태를 그릴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예컨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의 움직임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움직임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밑그림은 치밀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밑그림은 작품을 추상적으로 만들거나 아예 작품을 완성하지 못 하게 한다. 소설가 전상국은 자신이 작성했던 밑그림 중에서 끝내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소개하고 있다.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그리고 그 이유를 추상적, 관념적 발상과 막연한 아우트라인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예컨대 ‘명분을 위해 사는 삶, 요령주의, 권모술수, 한국적인 것의 파괴’ 같은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밑그림은 언제 누가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했다, 는 문장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의 꼬리에 질문을 갖다 붙이는 끊임없는 질문의 연쇄를 통해 스스로 길을 터가는 방법.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대답을 만든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다시 다른 질문을 배출한다. 질문과 답의 되풀이가 일정한 회로를 만들면서 부분에서 전체로 확대되고,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다. 질문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고 하자. 어떤 죄수인가? 하는 질문이 곧바로 나온다.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이다. 교도소라고 다를 리 없다. 그 사람은 그곳에 왜 들어갔을까? 하고 물어야 한다. 살인을 했는가? 도둑질? 사기?…….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 답하는 순간 소설의 방향이 만들어진다. 그 범행이 우발적이었는가, 계획적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의해 다시 또 방향이 틀어진다. 그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가정하자. 그는 누구를 죽였을까? 친척이거나 친구, 동업자이거나 애인, 혹은 아무 상관없는 행인이 희생자로 선택될 수 있다. 그 선택에 의해 소설은 한 번 더 방향을 튼다. 그리고 희생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다른 사연이 만들어질 것이다. 예컨대 살인의 동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어디서 죽였는가? 아파트일 수도 있고, 길거리일 수도 있고, 산 속일 수도 있다. 어떤 아파트-길-산인지가 나와야 하고, 왜 거기 갔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살인이 일어난 시간은? 새벽일 수도 있고, 밤일 수도 있고, 한낮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날씨가 흐렸을 수도 있고 비가 왔을 수도 있고 바람이 몹시 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죽였는가, 하는 질문도 많은 가능한 길들을 펼쳐 놓는다. 흉기를 썼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흉기를 미리 준비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흉기는 칼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칼이라면 어떤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고, 누구의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고, 어떻게 구한 칼인지가 질문될 것이다. 상대가 반항을 했는지의 여부도 물어야 할 것이고, 목격자가 있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목격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꼬마인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그 목격자가 진술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고, 진술을 했다면 누구에게 유리하게 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질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다른 질문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튀어나온다. 튀어나오는 질문들을 소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대답이 멈추고, 소설도 멈춘다. 귀찮더라도 대답해 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윤곽도 잘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윤곽을 형성해가고, 선이 분명해지고, 선명한 부분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제 몸에 맞는 색깔이 칠해지고, 그리하여 하나의 큰 그림, 소설이 완성된다.
보르헤스의 소설 중에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비유하자면, 소설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을 만들며 미로의 정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은 미로의 정원과 같다. 肩寬?없으면 정원이 아니다. 밑그림은 정원에 미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6.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 현실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
흔히들 소설을 현실의 반영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소설도 그 시대와 사회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것들이 그런 것처럼 소설 역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소설을 씀으로써 작가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역사를 자연스럽게 그 안에 담는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씌어진 소설도 있고, 미래의 특정한 시간을 배경으로 하여 씌어진 소설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과거와 미래 역시, 엄밀히 말하면 현재의 시간과 공간(작가의 현재의 세계관)이 투사된 것에 다름 아니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 속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소설 속에 현실을 담는다. 현실을 그리기 위해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 소설쓰기를 통해 현실을 그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현실은 어떻게 소설이 되는 것일까.
우선 인정해야 할 진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옮겨 적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실을 찾고 옮겨 적는 작업은 역사가들이 한다. 우리는 역사가들의 저술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현실’들과 만난다. 우리가 의자왕에 대해 알고,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알고, 6. 25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역사가들의 사실 그리기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 우리가 알고 있는 6. 25 전쟁은 실제 있었던 사실들의 전부일까? 그럴 리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또한 안다.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에 겪은 모든 일을 그대로 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특정한 공간에 있는 사물들을 그대로 베끼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소설을 통해 현실 전부를 있는 그대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 모조리, 충실하게 그려내겠다는 욕심이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소설을 통해 현실을 그린다고 할 때 그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 필요한 것은 경험의 충실한 베끼기가 아니라 그것의 적절한 가공이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는, 그 재료가 아무리 그럴 듯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예술이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자연이지 예술은 아니다.
우리가 소설을 통해 반영하는 현실은, 우리가 ‘보는’ 현실이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의식이 동반된 정신 활동이다. 귀 있는 자가 듣는 것처럼, 눈 있는 자가 본다. 누구도 자기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쓸 수 없다. 무엇이 보이느냐(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글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파들을 기억할 일이다. 그들은 자연, 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일의 불가능함을 포착한 이들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을 탄생시킨 것은 사진기와 휴대용 물감이었다고 한다. 휴대용 물감이 생기면서 비로소 그림 도구들을 가지고 야외로 나갈 수 있었던 그들의 눈에 비친 자연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면 어느새 풍경의 색깔이 바뀌어져 있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그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카메라가 순간의 빛을 포착하는 것처럼 한 순간의 인상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요컨대 사물에 고정된 불변의 모양과 색깔이 없다는 것. 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는 대로 존재한다는 것.
현실을 ‘있는 대로’ 베끼지 말고 ‘보는 대로’ 가공해야 한다. 현실 경험을 가공하지 않고 충실히 옮겨 적으려는 작가의 욕구가 장황하고 진부하고 지루한 소설을 만든다. 생각해 보라. 그 작가는 왜 모조리 다 쓰려고 하는 것일까. 자기만 따로 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있는 대로 쓰려고 하고,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차별화된 시선에 의해 ‘있는’ 현실의 어떤 것은 배제되고 어떤 것은 선택된다.
가을에 대해 쓸 때, 가을의 모든 재료들을 다 동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에 따라, 주제에 따라, 필요한 것만 취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령 가을을 감사와 접목시키는 경우와 고독, 또는 독서에 연결시킬 때 취사 선택될 수 있는 재료들이 같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다 쓰려고 하지 말고 필요한 것만 써야 한다. 어차피 다 쓸 수도 없는 일이다. 현실을 ‘있는 대로’ 베끼지 말고 ‘보는 대로’ 가공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이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무의미하기도 하다.
소설의 재료인 이 납작한 문자 매체를 가지고는 사물이나 사건 현장을 눈 앞에서 보는 것만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의 관심 역시 그런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문학의 문장은, 실용문과 달라서 정보의 직접적이고 빠른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문학은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호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다. 호수라는 우회로를 통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이 지연 효과가 사용 설명서나 신문 기사와 똑같은 문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문장들을 문학으로 만든다. 은유가 없으면 문학이 없다.
창세기의 신은 흙으로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 흙은 사람이 되었다. 흙은 재료이다. 일상과 현실도 재료이다. 흙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순간에도 아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일상과 현실 역시 비록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아직 소설이 아니다.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처럼,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은유, 또는 환상이 필요하다.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은유나 환상.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일상은 돌연 낯설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소설이라는 걸 썼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