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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성경에 접근하는 자세
1.성경공부, “공부” 맞나
①긍정적인 측면: 우리 교회가 보여주는 성경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갈망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며 더욱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할 부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②부정적인 측면: 성경을 학창시절 때 경험했던 주입식 교육처럼 마치 교과서나 참고서를 대하듯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공부라는 표현 때문일까? 성경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생명과 구원의 통로가 아닌 학습과 탐구 대상으로 공부되고 있고 수강자들 사이에서는 내가 더 잘 아는가, 당신이 더 잘 아는가, 그럼 누가 일등인가, 라는 경쟁까지 병행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연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성경 자체의 위상을 붕괴시키는 교묘한 “성경주의”이다. 곧 성경(하느님)은 온데간데없고 성경주의와 성경에 대한 열풍만 남게 될 때 성경은 고상하고 품위 있어 잘 팔리는 브랜드상품으로 전락될 수 있고 성경사랑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종의 트랜드로 폄훼될 수 있다. 사회가 강요하고 주입한 세속적 공부 방법을 적용하여 그리스도교와 우리 종교의 핵심인 정경이 윤색되는 심각한 현상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2.성경 결코 완벽하게 정복할 수 없는 책
성경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탐구해야할 최종 대상은 성경이라는 책 자체나 하느님,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모세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속속들이 아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실존하고 고뇌하는 나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러한 지식은 나의 궁극적 삶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지 못하는 “그들만의 이야기”일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가 사도 요한이었는지 아닌지 계약의 궤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오동나무로 만들어졌는지 그런 질문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심하는 나한테는 아무런 구체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장된 지식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에 대한 잡다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곧 성경 공부의 주된 목적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성경은 천년이 넘는 장구한 제작기간과 여러 저자의 손을 거쳐 완성된 산물이다. 그러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느님은 그분의 속성상 절대로 인간의 인지기능을 통해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난해한 다른 책은 평생 연구한다면 통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씌여진 책이기에 아무리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 해도 인간의 지혜로는 천상의 언어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비란 “비밀을 여간해서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언어로 작성된 신비의 책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통달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있다 하더라도 또는 성경분야에서 10개의 이상의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남들보다 많이 노력한 결과를 칭찬해주고 감탄해 줄 만한 보기 드문 사건일 뿐이지 그것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완벽한 통달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우리 주변이 하느님나라가 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그리고 아무리 고학력 사회가 되었다 하더라도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이 사회의 교육이" information"(정보)만 있었지, 그것이 사람으로서 진정한 꼴을 갖추게 하는 "formation"(꼴을 갖추게 하는 것)으로는 승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완성은 정보를 통해 교육의 대상자가 형성, 양성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transformation(전이, 변화)이 이루어 질 때 이루어진다. 정보만 난무하고 그것이 삶의 진정한 지혜로 육화되지 못할 때 반쪽짜리 교육으로 남는 것이다. 우리말의 “아름답다”라는 말은 “앎답다” 라는 망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단순히 외적인 미모나 멋있음에 있지 않음을 잘 드러내 주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삶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깨닫게 되는 진리가 진정으로 나를 새롭게 형성해 갈 때 (formation),우리는 진정한 “앎”을 가지고 있는“아름다운” 존재로 변화(transformation)될 수 있는 것이다. 일생을 성경연구에 투신해 온 유명한 교수도 태평양의 물 한 모금을 조금 맛 본 듯한 그런 심정이라 하였다.
3. 그렇다면 무엇을 봐야 하나?
성경을 연구하면서 진정한 탐색 대상으로 삼고 분석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나 성경이라는 책 자체, 또는 성경 인물의 일생이 아니라 그 정보를 통해 성찰적 시각으로 반추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정리하자면 여간해선 보이지 않고 만나지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만남을 통해 좀 더 정화된 눈으로 내 현실, 내 가족, 내 사회, 내 공동체 안에 존재하시는 그분의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많은 인물의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정확히 외우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삶이 개선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읽으면서 탐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존재를 잘못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삶을 잘 아는 것은 내 삶의 질적인 개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그저 그들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 다만 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만났으며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했는지를 앎으로써 그것을 통해 내 삶에 존재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게 될 때 성경 인물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그 기능을 제대로 다 하게 되는 것이다.
2장 성경 연구의 목표: 복음화
1.복음화: 복음을 읽음으로써 그것을 마음에 담고 그 담아진 것을 통해 나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화이며 그것이야말로 성경을 공부하는 근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가 “문”으로 자신을 “화”하는 것이듯, “복음화”란 “복음”으로 자신을 “화”하는 것을 말한다. 곧 복음화란 띠 두르고 시장이나 거리에 나가 새 입교자를 많이 확보하여 세례를 주는 그런 일종의 “전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화”하는 것을 더 본질적 의미로 하는 개념인 것이다. 복음화란 새 입교자를 많이 불어나게 하여 하느님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측면에서만 강조되어야 할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안에서 부단히 노력해야할, 죽을 때까지의 과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복음화”란 “기쁜 소식”의 선포를 통해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화” 되는 것을 말한다. 곧 나 자신의 복음화를 통해 내 삶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되고 이를 통해 “내가 너에게 기쁜 사람이 되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기쁜 사람이 되고 기쁜 소식이 되어 공동체 전체가 기쁜 소식으로 “화”하고 이 사회 전체가 “기쁜 소식화” 하는 것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복음화의 일차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내가 먼저 기쁜 소식이 되고 그것을 통해 감명을 받은 타인이 또 다른 타인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일체의 과정을 신약성경 전통에서는 “지금”, “이 자리”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또 그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마태3,2)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자리는 복음((그)유앙겔리온 :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 자리이며 너와 내가 이런 기쁜 소식의 선포를 통해 스스로가 기쁜 소식이 되는 생명의 장, 곧 하늘나라를 구현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식적 탐구로는 절대로 완성될 수 없던 성경의 메시지가 오히려 아주 쉽게 완성될 수 있다. 복음화의 완성, 곧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때문에 모두가 기쁜 소식이 되는 구원과 해방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때 하느님 말씀 선포의 목적도 완성되는 것이다.
2.성경이 왜 기쁜 소식인가?
사실 아무리 읽어봐도 웬만해서는 행복하거나 기쁜 이야기를 찾기 어려운 책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엄청난 “사랑”을 담고 있어서이다. 수많은 결점과 한계 때문에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고 스스로도 사랑해 주기 어려운 나 자신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급기야는 그렇게 죄인인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다는 ,예수님의 바로 그 놀라운 희생과 사랑을 전해주고 있는 책이 성경이니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듣는 말 중에 가장 기쁨을 주는 말은 “사랑한다.”는 고백이라고 한다. 사실 사랑한다는 말 때문에 여인들은 누구의 딸에서 누구의 아내로 신분이 변하고 또한 사랑한다는 바로 그 말 때문에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게 되기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와 신분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곧 삶을 결정짓게 하는 중요한 단서요 고백으로 자리 잡는다. 하물며 이 고백을 하느님으로부터 전달받게 될 때 그 영향력과 파급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힘으로 작용한다. 그분이 사랑하신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모함한다 해도 그들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초월적 시너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도 크기에 나를 미워하는 그 어떤 존재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신적 능력이 우리 안에 자생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기적이 바로 “기쁜 소식의 정체”이고 “복음화의 비결”인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만 있다면 시편 23편의 표현처럼 어둠이 그늘진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않을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곧 “기쁜 소식”이며 충만한 “복음화”인 것이다. 사랑으로 무장된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과 역동성을 가지며 누가 어떤 태도로 반응한다 해도 끄덕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단 한사람만 있어도 주변과 공동체의 고통은 의외로 쉽게 극복된다.
성경은 기쁜 소식 곧 사랑으로 사람을 무장시키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저력을 통해 주변을 사랑으로 전염시켜 누구도 시기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에너지를 보급시킨다. 이렇게 복음화된 사회야말로 그 어떤 정치인도 실현하지 못했던 가장 완벽한 이상사회이며 또한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하늘나라”의 참모습인 것이다.
3.삶을 푸는 열쇠, 복음
21세기 현대사회가 사회의 현안과 나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은 전쟁과 투쟁이다. 너를 이겨야 내가 살고 그 나라를 정복해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전투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성경이 추구하는 복음화는 “사랑과 용서”로 풀어 간다.
그분의 사랑을 삶의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내가 굳이 너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경쟁의 원인이 되지 않으며 너를 파멸시키면서까지 그것을 획득해야 하는 병적 집착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 고유하게 받은 선물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고 자신만이 전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복음화이다. 이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겸손히 고백하고 그러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과 신뢰를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복음화를 위한 첫째 조건이다.
4.성경은 언제 기쁜 소식으로 느껴지나?
내가 주변 사람들과 타인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 전제되는 조건은 “기쁜 소식(복음)을 마음에 담고, 품고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품을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다. 성경이 아무리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고는 하나 기쁜 소식으로 내 안에 품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말씀이 심장에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명을 충분히 못 받을 때,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의 어느 부분에 조응하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을 때 말씀은 심장에 새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이 심장에 기쁜 소식으로 품어지고 새겨지는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그건 극도의 고통 중에 있을 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건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스스로 획득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 차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다. 문제 해결이 어려울 때의 해법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길도 없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하게도 궁지에 몰렸을 때 우연히 듣게 된 성경 말씀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강한 생명력과 기쁜 소식이 되어 마음에 각인 된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심장에 새겨지고 새겨진 내용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만이 나를 무장시키고 그 어려운 상황을 대면하게 하는 힘이 되어줌을 깨닫게 되는 것, 그 체험을 하게 된 사람이라면 성경이 진정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기쁜 소식인지 뭔지 모르겠다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삶을 수월하고 평탄하게 살아온 때문이다. 반대로 너무 고통이 심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심정이라면 이제 성경을 정녕 생명의 말씀으로 , 살아있는 기쁜 소식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 때가 온 것이구나 직감하고 그 체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된다. 이겨낼 힘이 하느님 말씀을 통해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 31, 33)】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마음에 받아들이고 귀담아들어라. (에제 3, 10)】
5. 복음화의 근거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장에 새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창세1,26) 우리말 “닮다”는 “담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곧 내 안에 누군가를 “담았을 때” 그 누군가를 “닮을 수 있다”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닮아간다고 한다. 이는 서로를 “담고” 함께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며 결과이며 것이다. 마음에 돈만 담아두고 있어 모든 것의 척도가 돈이 되는 사람은 이미 비정한 자본 논리만을 자신의 모습으로 하게 된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도 우상숭배와 배신으로 죄의 역사를 계속했지만 결국에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다시 그분께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마음에 담겨져 있는 그분의 얼굴을 절대로 외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6. 복음화, 하느님을 담은 상태로 세상을 보는 것
서로를 담고 있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쉽게 이루어 지지 않는 근저에는 바로 악, 죄라는 인간의 본성적 한계가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도달하기 전에 내 안에 기생하는 부정적 요인이 나를 먼저 점령해 버리는 것인데 이렇게 죄와 악에 윤색된 시각으로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자기 식 이해”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화란 이와 본질적으로 반대 된다.악과 원죄로 손상된 시선에 의해 내 의식이 정복당하는 것을 불허하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시선과 의식”으로 내가 “되어짐(化)”을 말하기 때문이다. 곧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주관적 왜곡과 오해의 가능성은 붕괴될 수 있다. “하느님의 지혜”가 내 판단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소경, 또는 귀머거리 등의 모티브를 자주 등장시킴으로서 제대로 “보지 못함”과 “듣지 못함”을 경고한다. 하느님을 담고 있지 않는 우리의 눈과 귀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병들어 있는 지를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자어 “성인(聖人)”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한자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위인만이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듣고(耳), 잘 말하면(口) 평범한 우리도 모두 성인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동시에 잘 듣고 잘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대적으로 드러내 주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복음화”란 원죄로 인해 손상된 본성적 시각의 돌아섬(회개)을 의미한다. 곧 “자기식의 봄과 판단”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과 사건을 봄을 바로 “복음화”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내 안의 복음화가 이루어질 때 나는 더 이상 “누구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하느님”, 곧 내 안에 계시기에 정직하게 만나게 된 바로 그분을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타인과 세상을 보게 될 때 타인과 세상에 대한 오해나 아집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7. 이스라엘의 복음화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곧 누구누구의 하느님으로만 알려져 있던 그분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 직접 만나게 되고, 이를 통해 그분을 분명히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의 여정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고 절박한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누구의 하느님이 아닌 “자신들의 하느님”을 알게 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체험을 “원체험”이라고 하는데 이 체험이 없다면 신앙도, 구원역사도 없었을 것이기에 생긴 용어였다. 탈출기 3장처럼 이름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알려준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고 이러한 사건은 그분이 이제 더 이상 제3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의 하느님이 되심을 선포한다. 곧 이스라엘은 그분의 이름(존재)을 알게 됨으로써 이제 누구를 통해(매개자) 그분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단계를 벗어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통교 관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8.새로운 라이프스타일
①복음화의 결과는 무엇일까? :구원과 해방이다.
②사실 우리가 이토록 열심히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그리고 여러 제약을 받아가면서도 굳건히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이유는? :구원과 해방을 궁극적으로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평생을 바쳐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③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 자리에서 사는 구원과 해방체험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과 해방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은 구원과 해방이 ‘하느님과의 구체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려주고 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성경에서 각양각색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각자가 추구하고 염원하는 삶과 그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성과 다원성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제시되는 특성이 있으니 바로 구원과 해방의 실현은 그것을 체험한 존재를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시켜 놓는다는 점이다. 180도 달라진 삶의 방식이야말로 구원과 해방이 그 사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된다. 자캐오: 루카 19, 1-10 참조 :
①예수님을 만나기 전- 지독한 이기주의,
②예수님과의 만남 - 전적인 이타주의로 변화
이것이 복음화 또는 구원, 해방체험의 결과인 것이다. 이 체험이 구원이고 해방인 것은 지금까지 자캐오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던 것은 돈이었으며, 동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구원의 매체라고 믿어왔던 실체(돈)가 사실은 자신을 옭아매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 궁극적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만남은 그 어떤 특별한 훈계나 가르침 없이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여기에서 빠져 나와 진정한 생명의 삶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자유와 해방,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첫째 조건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3장 성경의 속성
1. 성경, 하느님의 자기소개
①계시 : 열 계(啓) 보일 시(示): 열어서 보여주다; 레벨라시오(라)
: 가려지고 감추어져 인간의 감각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마치 연극무대의 막(베일)을 젖히듯 열어 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계시가 전달되는 통로: 성경과 성전
②여러 방법을 통한 계시:
구약시대: 모세오경을 통한 계시, 시편을 통한 계시, 신탁을 통한 계시
신약시대: 복음서를 통한 계시 등 다양한 문학유형이 총망라되어 있다.
계시사건의 절정: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다. 구약시대 내내 온갖 문학 양식을 동원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표현해 왔지만 여전히 그분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던 인간들에게 드디어 보고 만질 수 있으며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가시적 존재로서 또 다른 자신을 보내신 것이다(히브1,1-2) 그러나 그렇게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주었음에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인식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무지함과 유한함은 성경을 현재의 책처럼 두꺼운 책으로 산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들려야 소통이 가능한 인간에게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설명하다 보니 그렇게 많은 내용이 수록된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성경의 무류성(無謬性)
①무류성: 성경에 제시된 모든 말씀은 진리이며 “오류가 없다”는 개념이다.
②그러나 혹자는 성경 초두에서부터 오류를 지적할 지도 모르겠다.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읽다 보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말이 오히려 분명한 오류임을 즉각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잇는 과학지식과 창세기에서 제시하는 창조의 역사가 다를 뿐 아니라 성경 자체도 창조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전승(창세기 1장과 2장이 제시하는 창조가 서로 다름)을 제시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다르게 보도하는 두 전승 가운데 하나는 틀리거나 , 둘 다 틀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의 관점으로 성경 본문을 본다면 이 관점의 주인공은 “창조” 또는 “인류”, “지구”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성경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고 따라서 이 책의 주인공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성경은 일종의 “신학 보고서”인 것이다. 이는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주인공이 되는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며 또한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나를 제시하는 “과학적 보고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만약 이스라엘을 주인공으로 하는 문헌이 성경이라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모순적으로 보도하는 본문 중 한 본문은 분명한 오류로 판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인공이 되는 신학 보고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어찌 되었건 이들의 에피소드를 서로 다르게 보도하는 본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곧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를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지만 본문의 주인공이 창조가 아니라 창조를 이루어 내신 하느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창조 과정이 다르게 보도되어 있다 해서 이를 충돌된 본문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 특히 구약성경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본문의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머리 좋은 성경의 저자 또는 편집자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내용을 담은 본문을 그대로 함께 공존시켜 두었던 이유는 그 본문들의 모순됨을 발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라는 신학적 목적에 잘 부합되는 본문이라면 부차적인 부분이 다소 충돌을 일으킨다 해도 문제 삼지 않고 계시된 진리를 절대적 경외심을 가지고 받아들인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화책을 볼 때와 자연과학 관련 논문을 읽을 때 같은 마음자세로 그 문헌을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설을 볼 때와 신문을 읽을 때도 독자들은 그 본문이 제시할 내용에 대하여 매우 다른 기대치를 전제하고 내용을 읽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산출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문헌의 속성을 전제하고 글(만화는 만화의 고유성, 신문은 신문의 특성)을 읽어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성경의 속성에 대한 물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보도하기 위한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며 지구의 생태계를 탐구한 과학 보고서가 아니다. 감추인 듯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인간에게 설명하기 위해 고심한 신학보고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그 진리의 잣대를 마치 신문이나 논문을 읽듯이 한다면 이미 성경이 어떤 책인지 그 본질조차 모른 채 접근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 된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인간 사랑을 서술한 책이 성경이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성경은 한 치의 오류도 없는 본문으로 이루어졌기에 이러한 단서를 결정적 준거로 하여 우리는 성경이 “무류”하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4장 정경
1. 정경(正經, Canon)
①정경이란: 신앙의 진리와 이 신앙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윤리생활을 규정하는 척도로 “해당 종교의 최고 규범이 되는 책”을 말한다.
②그리스도교 정경은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정경으로 인정된 책은 첫째 하느님 말씀으로 인정받아 엄선되고 둘째 교회가 거룩한 전례에서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결정한 책들이다.
③정경: (라)카논: 칸나에서 유래-갈대를 뜻하는 명사치수 재는 기구로 갈대가 이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기능은 삶의 잣대를 의미하는 정경을 나타내는 단어에 갈대가 언어적으로 결합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논, 곧 정경은 삶의 잣대, 규범, 지침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각각의 종교는 이렇게 정경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책을 선정함으로서 첫째 다른 이론이나 교리가 들어와 해당 종교의 교리를 윤색시키거나 오염시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둘째 경신례를 위한 집회 때 정경 이외의 다른 책이 주요 텍스트로 낭독되는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2. 구약성경의 구성과 배열
(1)개관
①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셈족문화권”을 배경으로 형성된 종교
②고대 근동지역이란: 지중해안(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터키, )에서 동양(이란, 이라크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아우르는 용어인데 그 안에 살았던 다양한 민족 집단까지도 지칭하는 말이다.
③이슬람교의 정경: 쿠란(코란), 유다교의 정경(=구약성경), 모두 셈족 언어로 저술되어 있다. (쿠란은 아랍어로, 유다교 정경이자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책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④모세, 아브라함 같은 성인들은 유다교, 이슬람교에서도 숭앙되고 있다.
⑤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의 공통교리
-유일신을 신봉: 엘, 알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최후의 심판으로 역사가 종식될 것이라는 종말관
-정경을 낭독할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 유다교-성전과 회당,
그리스도교-성당과 교회당, 이슬람교-모스크라고 불리는 사원
⑥그래서 예루살렘은 이 세 종교가 모두 주도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분쟁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⑦나자렛 사람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신약성경을 그리스도교의 중추적 문헌으로 여긴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서 조명된 그리스도의 내림을 예표하고 있기에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사용한 흔적(마태2,17-18; 루카3,4이하; 4,4.8.16-19등)을 신약성경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기에 그 중요성을 폄하할 수 없다.
⑧그러나 유다교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저 예수라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던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일 뿐 그리스도((히)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는 아니었음을 천명한다. 이것은 그들이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곧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내림하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있기에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책들만을 정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1세기 편집된 미쉬나⇨ 게마라(라삐의 주석)가 첨가⇨ 이러한 전승을 집대성한 탈무드(예루살렘탈무드: 서기4세기, 바빌론탈무드: 서기5세기)★
(2)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정경을 차별화시킨 이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다. 그들은 신성한 하느님의 말씀을 담는 데 적합한 용어로 보았고 그리스어(=희랍어ㅣ헬라어)는 너무 세속적인 언어라고 간주했다. 이는 아마도 그리스어로 작성된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을 견제하기 위한 태도로 이해된다. 유다인들은 정경은 모두 히브리어로 저술되어야 한다고 부각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다인들의 정경에는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제2경전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제2경전에 속하는 책은 칠십인역(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안에 포함되어 있던 책들인데 그리스어로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유다인들의 정경 목록에서 제외된 것이다.
(3)칠십인역: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번역본으로 기원전3-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70명(또는 72명)의 학자들이 함께 모여 70일간 번역하였고 각자가 개별적으로 번역한 것을 후에 맞추어 보니 모두 동일하게 일치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번역본을 로마 숫자LXX(70)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도 부른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초세기 사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를 위하여 이방세계로 전도여행을 떠날 때 세계는 그리스어로 공용어로 사용하는 헬레니즘 영역권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소라 본문: 자음만 사용한 히브리어에서 모음 붙은 히브리어 구약성경
(4) 정경화 과정
①유다교의 정경화
서기 1세기경은 그리스어 성경(칠십인역)과 히브리어 성경(유다인의 정경)이 혼재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이 야기되자 유다인들은 “얌니아”라는곳에서 회의를 열어 그들 나름대로 성령의 감도를 받은 책을 선정하고 그 외ㅣ 다른 책들이 유다교 안에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당시 매우 활발하게 대중 안에 전파되고 있던 그리스도교 문헌(50년대부터 저술되기 시작한 바오로 서간과 복음서)을 견제하기 위한 제스처였다고 할 수 있다. 결정된 유다교의 정경-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만 작성된 24권이었다. (제2경전 누락, 상, 하권의 책을 한권으로, 12소예언서를 한권의 책으로 간주해서 나온 수치가 24권이다)
②개신교의 정경화
독일의 성경학자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때 기존의 시스템에서 분리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차별화된 내용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분명히 요구되었던 것은 분리된 종교의 새로운 근간이 되는 새로운 정경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는 ‘성경을 통해 갖게 되는 믿음만이 참 구원의 길’ 임을 선언하고 기존의 가톨릭 정경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정경목록을 설정하게 된다. 그는 본래적 전통(유다교의 정경)이 새로운 종교의 핵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유다교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제2경전을 뺀 나머지 책만을 구약성경으로 상정했다.
③ 가톨릭의 정경화
트리엔트 공의회 4번째 회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정경목록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루터의 새로운 정경 설정에 전통적으로 어렴풋이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던 가톨릭이 1546년 4월8일, 칠십인역을 비롯한 그리스어본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의 구약성경이 46권임을 확인한다.
(5)유다교, 개신교, 가톨릭의 구원관
유다교: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
개신교: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통해
가톨릭: 성경뿐 아니라 성전도,
은총뿐 아니라 성사도,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중요
(6)그리스도교의 정경 분류
모세오경 5권, 역사서16권(신명기계: 7권, 역대기계: 9권), 시서와 지혜서7권, 예언서 18권 총 46권 ※제2경전: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상, 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에스테르 일부와 다니엘서의 일부분이 있다.
(7)제1경전과 구분하기 위해 : 제2경전이라는 명칭을 사용
-정경 목록에 포함하지 않는 책들: 외경
3.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1)구약이란?
①계약: (히) 베리트 , 구약성경에 287회나 등장
②계약이란: 두 당사자 사이에 체결되는 관계를 가시화한 것으로 고대 근동의 계약은 일반적으로 짐승을 잡아 두 조각으로 가르고 이를 양편에 둔 후 그 사이를 계약자들이 지나가는 행위를 통해 체결되었다.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표현은 “카라트 베리트”이고 이를 직역하면 “계약을 자른다.” 이다. 성경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내용으로 하여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이스라엘과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여 체결된 계약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두 존재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한다.
③구약이란: 야훼하느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이스라엘은 그분만을 왕으로 모시는 “백성”이 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계약이다. (탈출20장 이하) 구약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러한 “왕-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전개되는 하느님의 계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에 등장하는 그 많은 비극 사건이 바로 이러한 계약을 스스로 어긴 불충실과 죄 때문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사고는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 사상이다.
(2) 신약이란?
①신약이란?: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새 이스라엘은 그 분의 자녀(상속자)가 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계약을 말한다. 곧 주종(왕-백성)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을 인식한 이전의 계약이 너무도 옛것이 되었기에 더구나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그분을 머리로 한 몸을 이룬 새 이스라엘 (로마12,5; 1코린1,30; 6,15; 10,17; 12,27; 콜로1,18)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듯 하느님을 더 이상 “왕”이 아닌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기에 (로마8,15; 갈라4,6)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새로운 계약의 수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새롭게 체결된 계약이 새 계약 곧 신약인 것이다.
4. 왜 계약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였나?
(1)계약,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암이나 불의의 사고보다 사람을 더 강하게 죽음으로 몰아가는 병은 절망. 두려움. 불안 같은 부정적 심리라고 한다. 두려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역설적이지만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그 실체와 친해지는 것이다. 만일 세상이 두렵다면 우리는 세상과 가까워져야 하고 죽음이 두려워진다면 죽음과 가까워져야 한다.
계약이란 바로 이러한 “두려움”과 “가까이 감”의 역학관계를 관료화된 사회 안에서 적극 도용하여 부상시킨 일종의 사회-정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은 보호와 안전도모를 가장 궁극적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은 계약이 처음 등장할 때의 배경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상호계약 또는 동맹이라는 제도는 갑작스러운 침략을 미리 차단함으로써 불필요한 두려움으로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현명한 장치였던 것이다.
(2)구약의 계약과 계명: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느님과의 계약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야훼 하느님과 협정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절대자와 누구도 분리시킬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바로 이를 통해 불의의 사고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나이에서 맺었던 이 계약을 실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전문적 도구가 바로 여러 율법 조항과 그 율법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탈출20,1-17; 신명5,1-22)이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가장 안정하게 보장해 주기 위한 계약과 이를 존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해방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금령을 통해 인간 각 개인을 무차별한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한 삶을 도모하게 하는 진지하고도 가장 비폭력적인 무기들이 바로 십계명의 조항들이었던 것이다.
5장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
(1)유다인들의 전통사상: 신명기적 의식-인과응보, 상선벌악이다.
①현재의 고통(결과)을 죄(원인)로 인한 벌(인과율적 법칙)로 해석하는 것.
②모든 고통의 일차적 원인은 바로 고통당하는 당사자의 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곧 “고통을 죄의 벌”로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신명기와 신명기계 역사서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신명기 내용의 핵심인 “한 분이신 하느님, 하나의 백성, 하나인 전례”를 잘 이행하면 축복이 따르고 이를 어길시 저주가 정당화됨은 신명기와 신명기계 역사서가 세상과 역사를 보는 본질적 단초이기 때문이다.
(2)고통에 대한 재해석
욥이라는 의인의 여정을 통해 고통이 죄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하는 은총이 됨을 , 그리고 인간 본연의 현실(한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며,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장임을 역설해 주기 때문이다. 고통의 교육적 기능을 긍정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누구도 예외 없이 마주해야 하는 삶의 딜레마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긍정적 시각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신조를 준비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3)메시아관의 변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이해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기다려 왔던 메시아는 억압과 가난이라는 고통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 그리고 죄와 악의 결과인 고통을 영원히 없애주실 분이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고통스러운 모습(고통을 없애주시지는 못할망정)으로 죽음을 당했다는데 있다. 그 고통스러웠던 죽음의 현장은 예수님이 절대로 메시아일 리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증언의 자리였고 오히려 저주받은 인물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다인들은 아직도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교육적 시각을 제시한 구약성경 욥기와 신약성경의 시각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정식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는 고통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어떤 고통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하시고 결국 고통을 넘어서는 구원(부활)으로 이끄신다는 종말론적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6장 성경 해석 방법
(1)교부시대:
①알레고리적 방법=우의(寓意)적 해석-분명한 준거 없이 은유적으로 설명하여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 예) 땅은 어머니다.
②티포로기=예형론-어떤 일정한 타입을 선정하고 그것을 “예”로 하여 설명하는 방법이다. 예) 우리 어머니는 신사임당 타입이었다.
(2)중세: 교도권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3)근대(중세와 근대 구분의 사건: 14-16세기, 르네상스)
인쇄술의 성경 보급⇨비평적 관점에서 성경을 접함⇨무조건적 신앙에서 인간의 이성을 인식과 식별의 매체 사용⇨성경 말씀의 합리적, 검증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종교개혁⇨성경을 교도권을 벗어나 중립적으로 연구함⇨창조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이해⇨계몽, 식별 기준은 인간의 이성이 되어야만 한다.⇨경험(인식론)⇨무신론(내 인식이 확인할 수 없다면 하느님도 존재하지 않는다.)등장
(4)근대 이후
가. 통시적 방법론(역사 비평적 방법론):
역사적(성경 본문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이고 비평적(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합리적이고 검증 가능한 내용을 밝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다.
①본문 비평: 여러 사본을 바탕으로 원문을 재구성하는 일체의 작업을 통칭한다.
원문: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가장 최초로 완성된 문서
본문(Text): 유실된 원문을 본문 비평을 통해 재구성한 문헌
사본: 최초에 존재했을 원문과 복원된 본문들에 대한 필사본
②문헌 비평: 성경 본문의 흐름 중에서 중복, 반복, 모순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 최소한의 문학단위를 밝혀내는 작업을 말한다. 예) 창세기1,1 - 2,4a와 2,4b 이하가 서로 다른 저자의 작품(제관계와 야훼계)임을 밝혀낸 것은 문헌비평의 결과였다.
③전승비평: 개별적 문헌 안에 들어 있는 전승 역사를 밝혀낸다.
전통: 내려온 정신적 요인과 그 구체적 내용
전승: 이 전통을 기록한 것
전통이 문서화 되는 과정을 통해 산출된 결과가 전승이다.
예) 문헌가설에 의해 가장 후대의 작품이라고 판명된 문헌은 제관계 문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후대의 작품이라고 판명된 문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가장 오래된 전승(구전층)이 마치 액자소설처럼 끼워져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한 문헌 안에 내장된 오래된 전승층을 가려내는 방법론을 전승 비평이라 한다.
④양식비평: 같은 부류의 전승이 함께 모여져 있을 때 그 문학 양식에 집중하는 비평방법이다. 예)일정한 양식을 함께 모은 공동체적 자리를 삶의 자리라고 한다. (시편의 경우 정례가 삶의 자리였음이 밝혀졌다)
⑤편집비평: 편집자가 전승을 어떻게 이어가는지, 어떤 관점이 배경이 되고 있는지 어떤 부분을 삽입하거나 삭제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편집비평이다. 예) 창세기 계보구절(설화와 족보를 함께 연결하기위해 적용된 편집자의 편집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나. 공시적 방법론
세계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게 되고 구조주의라는 사조를 등장시킨다. 구조주의란 문장이나 말, 사건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의 외적 요건이 아니라 내적 구조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사조이다. 성경학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등장하게 된 방법론이 공시적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기존의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 지나치게 본문의 역사성(에를 들어 어느 부분이 더 오리지널한 것이고 어느 부분이 후대에 첨가된 것인지, 어디까지가 실제 역사이고 어디서부터가 신화화된 이야기인지)에만 집중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는 본문의 역사성보다 문학적이고 언어학적 측면을 중시하여 그 구조와 단면을 보자는 입장이다.
다. 정경비평: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 본문 내용을 너무 분해하고 해체시킨다는 지적을 보완하면서 등장하였다. 성경 본문을 정경의 위상을 가지는 감히 쉽게 해체시키거나 분석할 수 없는 책이라는 점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시작한다. 정경 비평에서는 후대 첨가된 부분이라 할지라도 정경의 위상을 가짐을 아니 첨가되었다면 그만큼 중요해서 정경 안에 첨가된 것이니 오리지널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