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헌강왕 6년(880)>에는 “9월 9일 임금이 좌우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임금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데 과연 그러한가?’ 민공이 대답하였다. ‘저 역시 일찍이 그와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1]
『삼국사기』 기록과는 반대로 신라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 떼도둑(群盜)이 창궐(猖獗)하고, 호족(豪族)들이 제 마음대로 당대등(堂大等), 성주(城主), 장군(將軍)이라 자처하며 행정조직을 편성하여 조정(朝廷)을 꾸리고 군대를 육성하는 등 나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진성여왕(887~897) 때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되었고, 그리하여 결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견훤(甄萱)이 전주에서 후백제(900)를 세우고, 왕건(王建)이 송도(松都)에서 고려(918)를 세움으로 인해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후삼국 시대는 전국에서 호족이 일어나 치고받고 싸우는 이른바 난세(亂世)이었는데, 견훤은 호족을 힘으로 제압하는 전략으로 임했고 왕건은 호족을 포섭하여 자기편으로 삼는 전략으로 임했는데 신라가 고려에 귀부(歸附, 935)하고 후백제가 멸망(936)함으로 인해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서기 900년 이전에도 이미 호족들이 들고 일어나 호족과 호족 사이에 숱한 전쟁이 벌어졌으며 호족과 호족이 합종연횡(合從連橫)하는 난세가 100년 정도 이어져 왔으므로 통일된 고려에는 군대를 가진 호족들이 각지에 군림(君臨)하고 있었으며 백성은 정착민과 유랑민이 뒤섞여 말하자면 이때야말로 수나라가 남북조(南北朝)를 통일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려 태조는 호족들을 무마(撫摩)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통일 후 사회 안정화를 꾀하는데에도 호족들의 협조를 구하여 원만하게 성공할 수 있었는데, 태조의 전략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혼인전략(婚姻戰略)이다. 태조는 부인이 29명이나 되는데 대부분 각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호족의 딸이었다.
통일 후에도 호족이 조정에 반발하여 일어서면 다시 난세가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태조는 호족의 영지(領地) 지배와 세습(世襲)을 허용하는 대신 조정에 충성을 요구했다. 일본도 비슷한 시기에 호족이 일어나 결국 봉건시대로 변천했으나 고려는 태조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인해 봉건시대를 거치지 않고 안정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 때(987)에 이르러 호족들이 당대등, 대감, 제감, 성주, 장군 등 제멋대로 부르는 호칭을 호장(戶長)으로 격하(格下)하고 영지 세습 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그 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휘를 받도록 만듦으로 인해 결국 호족은 향리(鄕吏)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호족은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자식들을 가르쳐 과거에 급제시켜 양반(兩班)으로 만들었는데 여말선초(麗末鮮初)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은 모두 향리 출신으로 막강한 재산을 가진 부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는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인이 통제하는 노비(奴婢)를 제외한 모든 백성에게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사성[2]과 본관분정[3]을 실시했다. 『동국여지승람』<목천현 성씨>를 보면 “본현은 우, 마, 상, 돈, 장, 심, 신, 왕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에도 목주(목천) 사람들이 계속 태조에게 반발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목천 사람 모두에게 짐승 이름으로 된 성을 사성해 주었다고 한다.]” {영인} 라고 적혀 있다.
또 같은 지역에서 사는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예를 들어 전주에 사는 최씨 중에서 당최(唐崔)와 토최(土崔)처럼 혈통이 다르거나, 전주최씨, 우주최씨, 이성최씨, 두모최씨처럼 사는 곳이 주읍[4]과 속현[5]으로 다른 경우 낱낱이 분리하여 본관을 분정하여 호족의 영향력이 확장되지 못하도록 위축시켰다. 전주최씨는 주읍성(主邑姓)이고, 우주최씨, 이성최씨, 두모최씨는 속현성(屬縣姓)인데 두모촌은 소(所)기 때문에 천민(賤民)이다.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을마다 토성[6]이 자세하게 세분되어 적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읍격(邑格)별 성관(姓貫) 분석을 보면 양인성(良人姓) 554개, 천인성(賤人姓) 794개로 천인성이 양인성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해보면 본관제도는 삼국통일 후 신라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입되었으나 성씨가 없는 상태에서 본관만 분정하여 종전의 부(部)와 차별성이 없었고 그다지 쓸모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흐지부지되고 그나마 성씨가 있는 본관만 유지되어왔는데 대체로 6두품(六頭品) 등 귀족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사회 안정화가 시급했으므로 양인과 천인을 가리지 않고 주인의 통제를 받는 노비[7]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본관을 분정하면서 성씨가 없는 경우에는 사성을 해주었는데, 유랑민 통제와 호족 비대화를 막기 위해 세세하게 나누어서 본관을 분정했다.
* 각주 ------------------
[1] 九月九日王與左右登月上樓四望京都民屋相屬歌吹連聲王顧謂侍中敏恭曰孤聞今之民間覆屋以瓦不以茅炊飯以炭不以薪有是耶敏恭對曰臣亦嘗聞之如此.
[2] 賜姓, 국왕이 성을 지어서 내려주는 일.
[3] 本貫分定. 특정 지역 같은 혈통 사람만 떼어내어 본관을 정해 주는 일.
[4] 主邑. 어떤 고을의 중심이 되는 도시.
[5] 屬縣. 주읍에 부속된 현.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주읍 관리가 다스렸다.
[6] 土姓. 각 고을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성. 그곳에서 토착해 살아왔다.
[7] 奴婢. 당시 노비 인구는 전체의 약 5%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