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 위에 그리는 그림
강석희
삶은
흐르는 시간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텅 빈 캔버스 위에
여린 붓으로 꿈을 듬뿍 묻히던
푸릇한 때가 있었다
빈자리가 허물인 양
숨 막힐 정도로 빼곡히 덧칠한
뜨거운 시절도 지나가고
어느덧
흰 눈 앉은 잔가지 위에
오도카니 웅크린 작은 새 모냥
먹선으로 스며드는
나
삶은
흐르는 시간 위에
여백을 그려가는 것이다
** 모냥 : 모양의 방언
2. 사진 한 장
강석희
제비농장의 소나무 그림자가
기지개 켜듯 쭈욱 일어날 즈음
고된 농장일의 마지막 삽을 뜨고는
세상 다 가진 듯한 팔순 노인의 웃음에
투박한 흙냄새가 난다
이보게 사진 한 장 찍어주게
찰나 같은 여행의 마지막 인증 숏은
땀배인 작업복을 입은 이 사진으로
꼭 부탁하네
어슴푸레 저무는 노을 속으로
노인의 시선이 사르르 스며든다
3. 노방전도
강석희
그윽한 라일락 향기가
메마른 거리를 적시는 봄날에
사람의 길 가운데 의연히 서서
하늘의 길 알리는 이들이 있으니
때론 무시하는 눈빛에
마음 아려도
생명 씨앗 심기는 듯한 여린 기척에
달뜬 가슴
그윽한 주님의 향기가
메마른 거리를 적시는 봄날에
4. 연못에 떨어진 벚꽃 잎
강석희
저 언덕 너머 자그만 연못에
개구리밥이 하야니 이상타
짓궂은 봄바람이
이별의 뜻 삼킬 겨를도 없이 떠나와
옛 그림자만 어련거려도
그리움의 늪에서 허우적대는데
새포름한 봄개구리는
눈 껌뻑이며 별미에 입맛 다시는구나
5. 심우장 가는 길
강석희
겨울소처럼 웅크린
북정마을 좁다란 골목길은
처마마다 고드름
그 예리한 그림자는
일본군의 창검인 양
귀퉁이가 무너진 제국의
헐거운 빗장마저
거칠게 부수었다
그리고
님은 울었다
하늘 맞닿은
북정마을 높다란 골목길에
옛 향기가 일렁인다
서슬 시퍼런 시절
서대문형무소 외로운 주검을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고
예까지 힘겹게 오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실낱같은 역사의 끝으로
오롯이 묶였기 때문이리라
님은 또 울었다
울어서 향기를 남겼다
아, 쉬이 지나가기엔
골목길이 좁구나
카페 게시글
덕향문학 통권 12호방
덕향문학 12호 강석희 시인 원고
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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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15:5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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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첩속의 주관적 감정이
시적인 감흥으로 날개를 다는군요
자신감도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