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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갇힌 자와 함께 일하는 자
40: 5-8
5. 또 금 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장을 달고
6. 또 번제단을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놓고
7. 또 물두멍을 회막과 단 사이에 놓고 그 속에 물을 담고
8. 또 뜰 주위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장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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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농부들은 밭을 간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할 때에 경험이 많은 소에다 나무로 만든 마구를 달아 멍에를 지도록 했습니다. 경험이 있는 늙은 소에는 마구를 단 끝을 단단히 매었습니다. 짐을 더 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경험이 없는 소는 느슨하게 하여 같이 걸어가지만 짐은 가벼웠습니다. 멍에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갈 때는 함께 갈 수밖에 없고, 방향과 속도를 함께 맞출 수 밖에 없는 것이 멍에입니다. 멍에는 경쟁이 아니고 조화입니다. 멍에를 맬 때에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멍에는 친밀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11:29에는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1:30에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면 쉽고 가볍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네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잖아. 우리는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거야. 하지만 사실은 너의 짐을 내가 지고 있단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시기에 그 짐은 가볍습니다.
마이클 몰리노스는 말했습니다. “주님과 뜻이 일치하는 것 즉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달콤한 멍에라고 결론짓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그 사람의 멍에를 지기를 원하는 것은 이타적입니다. 함께 멍에를 매는 것은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죽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공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삶을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공유된 경험을 교제라고 부릅니다. 교제는 함께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제는 참여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빌레몬서 강해의 마지막입니다. 빌레몬서는 짧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깊고 큽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문안합니다. 서신의 문안을 통하여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문안하는 사람은 함께 갇힌 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라고 합니다. 바울과 함께 문안하는 자는 갇힌 자입니다. 갇힌 자는 문안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문안 받아야 할 사람이 문안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인입니다(골 4:12).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입니다(골 1:7). 그가 실제로 바울과 실제로 함께 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옥중에서 바울에게 봉사하므로 고난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옥중에서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갇힌 자보다 옥중 뒷바라지가 더 어렵습니다.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도 힘들지만 간병이 만만찮게 어렵습니다.
루터는 “갇힌 자만이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약한 자만이 강하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갇힌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주님 때문에 갇힌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갇힌 것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이제 갇힌 것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갇혀 있지만 즐거운 자입니다. 갇혀 있지만 평화한 자입니다. 갇힌 자가 자유로움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갇힌 자가 되세요. 함께 갇힌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갇힌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갇힌 자만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갇힌 자는 내가 좋은 것만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은 것만 하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 갇힐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는 아니지만 금욕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타인에게 신앙의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이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바울은 남에게 덕스럽지 못한 것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형제의 덕을 위해서는 고기와 포도주도 마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이고, 갇힌 자의 자세입니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열어놓고 자기가 좋은 대로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옷이 그렇습니다.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는 것은 철없는 아이들 때입니다. 그 때는 벗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남을 의식하고, 배려하고, 생각하고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남을 죄짓게 하지 마십시오. 내가 편하지만 남의 눈이 불편하게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의사가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을 잘 먹지 않아요. 먹으면 안 되고, 해롭다는 음식은 먹고 싶어도 먹지 않고 참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이나 먹습니다. 성경이 해롭다고 해도 거침없이 합니다.
모든 일에 갇히세요. 갇혀서 자유하세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갇혀 있는 것을 자랑하세요. 바울과 함께 갇힌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갇힌 것을 자랑하세요. 우리는 풀어놓으면 금방 방종합니다. 쉽게 타락합니다. 세상 유혹에 끌려가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 일에는 누구나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그를 공동묘지에 보내 죽은 자들에게 10분간 욕설을 퍼붓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화를 내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10분간 박수를 치고 오게 하였습니다. “죽은 자들이 좋아하더냐?” “아닙니다.” “사람들의 갈채에 우쭐대지 않고 세상의 비난에 주눅 들지 않게 되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 뭔지 조금은 아는 셈이다”.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함께 갇힌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창피한 것도 아니고, 자랑거리도 아닙니다. 지난 날 한 때는 감옥에 갇힌 것이 자랑이고, 이력인 때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갇힌 것이 자랑입니다.
갇힌 자의 자유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늘 자신을 주님과 함께 갇히게 하고 자유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갇히라. 그리고 맘대로 하라.”
둘째, 문안하는 사람은 바울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다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합니다. 동역자는 헬라어로 ‘쉰에르고스’입니다. 이 말은 ‘쉰’이란 말은 ‘함께’라는 말입니다. ‘에르가’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바울에게 동역자는 여러 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도하다가 집에 가버린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를 동역자라고 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동역자라고 하지만 골로새서 4:10에는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라고 합니다. 바울과 함께 최후의 예루살렘도 동행하였고 로마도 함께 간 사람입니다.
데마에게도 동역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합니다.
누가에게 동역자라고 합니다. 그는 의리 있는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11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누가는 바울의 동행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우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저자인 누가가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부분을 학자들은 ‘우리 부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누가를 2차 전도여행에서 만나 마지막 로마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진정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과 함께 있고, 함께 일하는 자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빌레몬서 1절에는 빌레몬을 동역자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에는 디모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우르바노를 동역자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는 디도를 동역자라고 합니다.
바울의 동역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신분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차별 없이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바울에게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제자도 그렇습니다. 지체가 높은 자가 있습니다. 낮은 자가 있습니다. 어부가 있었고, 세리가 있었습니다. 재주 있는 자도 있었고 없는 자도 있었습니다. 북방 사람도 있었고 남방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이고, 기쁜 일이고, 은총이고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6:1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함께 일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일합니다. 우리의 일은 사람을 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도우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저를 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도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수고할 때에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과 함께 일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밀해지고 싶으면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친밀감을 느낄 때는 함께 일할 때 비로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란 책을 보면 “지혜로운 자와 사귀면 지혜를 얻는 것처럼 성공한 사람과 함께 하면 오래지 않아 성공을 얻게 된다. 성공한 사람의 비전은 전염성이 강해서 우리 마음속으로 금세 파고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하면 예수님의 일을 배웁니다. 그런데 마귀와 함께 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귀를 닮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친구의 버릇은 금방 닮아갑니다. 눈도 이상하게 껌뻑거리고, 말도 이상하게 합니다. 함께 하는 것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그분을 위해 일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 그 일을 하자고 부르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할 때에 예수님을 닮아가고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결론
지난번에도 한번 글에 쓴 이야기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제 때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도 한글 사랑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한글 학자였습니다. 그분이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의 일입니다. 선생의 집 앞마당은 항상 깨끗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와서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그 청년에게 까닭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시고는 혼자는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고 하시면서 하루 종일 저와 함께 굶으셨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면서 정성껏 돌봐 주셨습니다.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 없는 감옥 속에서 받은 그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처지라 선생님의 집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솔선생은 갇힌 자와 함께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그와 함께 일하는 자가 생겼고, 도우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함께 갇히면 함께 일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갇히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구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 레닌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시시의 프랜시스 같은 사람을 10명만 내게 다오. 그러면 내가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갇히고 함께 일할 사람, 예수님을 닮은 자 10명만 있으면 세상을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프랜시스를 닮은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있으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갇히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있는 세상의 변혁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께 갇힌 삶을 사세요.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일하세요.
그렇게 하므로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고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