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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자의 삶
전도서 7 : 19 - 29
말씀의 내용은 지혜있는 사람의 삶의 자세가 여러 가지 있지마는 그 중에 하나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불란서 격언에 “말 타고 들어온 죄악이 걸어서 떠난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악의 침륜은 쉽지만 그 죄를 소멸하는 것은 느리고 어렵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글래드슨(Gladson)에게 “이 세대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그것은 죄의 관념입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과연 오늘같이 죄의 의식이 희미해진 때는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비극적인 사실은 의식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이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 가운데는 심지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타락한 피조물이 아니고 최초부터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을 향하여 올라가는 피조물이라 그러므로 소위 죄라고 하는 것은 불완전한 것을 말하는데 사람이 향상하고 진화하는데 반드시 통과해야 할 나라의 과정이며 단계이다”고 합니다.
Richtle같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요. “사람은 때때로 하나님의 진노를 염려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코 죄인에 대하여 노하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죄를 범했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동조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는 인기가 없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는 일이 적어져가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아니하고 언급하지 아니한다고 떠나가 버리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따르는 그림자같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말씀한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 말씀을 우리는 그대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구약 열왕기상 8장 46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의 긴 기도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했습니다.
요한 칼빈 선생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그 본성이 아주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죄에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선만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아주 없습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어에서는 법률적인 죄는 crime이라고 말하고 도덕적 혹은 종교적인 죄를 sin이라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법률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영적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51편 4절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에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요 불신앙은 곧 죄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대로 죄는 사랑에 대한 반역이요 탈선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란 소극적으로는 불법과 불의를 감행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가운데 ‘나는 죄가 없다’ 말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거짓말하는 자요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타락한 인간형을 도무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가운데서 혹시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본래부터 선한 성품이 전혀 없었단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타락은 하였으나 하나님을 찾는 마음만은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여기 중한 병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건강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을 압니다. 병의 고통도 압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병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말하면 다 환자입니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기회가 없어서 죄를 못짓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죄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 것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 세력을 당할 자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다. 이 죄악의 세력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넘어뜨렸습니다. 모세를 넘어뜨렸습니다. 다윗이 이 죄악에 졌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선만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3절에 보면 “하늘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만족스럽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면 다시는 죄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바울이 말한대로 죄악과 계속해서 싸우는 선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투성이 된 우리가 하늘 나라 가서 생명 강가의 나뭇잎을 바르게 될 때 어린아이 살처럼 회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살 때는 승리하며 살고 잠시라도 주님 떠나면 그 당장에 죄에게 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왜 주일날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면 되지 이렇게 삼일 날은 성경에도 없는데 모여야 합니까? 이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주일을 지나 사흘이 되어도 우리의 영감이 식어지기 쉽고 심령이 약해지기 쉽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서 멀리 떠나기 쉽기 때문에 다시 모여서 새로 힘을 얻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가운데 죄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절을 보실까요. 21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데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우리에게 가해지는 많은 피해를 보면서도 눈을 감아주며 마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시편 38편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주의하지 말라. 그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사람들이 네게 대해 못마땅한 비난이나 혐의를 두는 듯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신경 쓰지 말고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같이 되라.”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말하든지 그것 너무 알려고 애쓰거나 캐물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요? 만일 다른 사람이 내게 대하여 좋게 말하면 그것으로 내가 교만해지기 쉽고 만일 나쁘게 말하면 우리가 좌절되거나 격정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하나님과 내 양심 앞에 부끄러운 것이 없도록 살고,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 것은 너무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귀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것을 듣는 법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모든 말을 주의깊게 듣는다면 아마 너는 네 종이 네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줄 생각하고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을 것이라”했고,
잠언 29장 12절에는 “만일 네가 고자질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면 너는 거짓말을 듣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뜻입니다. 옛날부터 임금님도 돌아서서는 욕을 했는데 오늘날 대통령은 말할 것 없고요. 어느 단체나 기관 심지어 가정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묵과해 버리는 것이 더 편한 일입니다.
그 다음 22절에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하였습니다.
참된 지혜는 우리 자신의 과오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가끔 너를 향해 나쁘게 말하거나 너의 불행을 비는 자들에게 화를 내지 말라. 그런 일이라면 너 자신을 조용히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네 양심이 네게 말해 줄 것이다. 너도 남을 저주하고 비방하매 그들의 불행을 비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날 것이다. 너는 네게 뿌린 씨에서 거두는 것이다.” 이런 뜻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모욕이나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도 그와 같은 짓을 남에게 하지나 않았는지 우리 양심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반성해 보면서 만일 내가 그런 일을 한 것이 생각나면 이것을 회개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디도서 3장 2-3절에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올무와 그물이 있는데 여기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걸리게 되고 죄의 세력에 잡혀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 알고자 하였더니”했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은 어려운 지식이며 죄는 스스로 이것이 죄라고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가면을 벗기고 그 본성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종류와 원인 그리고 그 악성을 아는 것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 죄를 자기에게 알게 해 준 하나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그가 어리석은 날에는 자기의 기지를 동원하여 육신의 쾌락을 위주로 살았고 교묘한 재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눈을 열어 주시자 그는 부지런히 죄로 인한 해독을 발견해 냈고 통권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죄를 범하고 가슴아파 하는 모습을 ‘어리석음의 악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불결을 어리석게 생각했고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가 음란에 빠져 방종할 때는 가벼운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이 밝아진 다음에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이런 생활을 ‘큰 악’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죄를 범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말했습니다. 고의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미친 사람의 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죽음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엘케고올의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nkness unto Death)이란 책에서 요한복음 11장 1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죽음이란 것은 호흡의 끊어짐의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죽음은 생명의 약진이기 때문이다. 위치의 변경이요 이사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은 절망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생리적인 죽음, 호흡의 정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신명기 28장 66-6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는 없으리라. 네 마음이 두려움과 눈에 보이는 것을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이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이 가느다란 실오라기에 매달린 것 같다는 것입니다. 깊은 절벽에 떨어지게 된 사람이 실오라기 하나에 그 생명을 의탁하니 그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죄인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시편 32편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바싹 바싹 마음이 탓다는 말입니다. 죄인의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멕베드’의 내적인 고통을 더해 주는 양심을 가르켜서 “일천 개의 검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 속에 고통이 있는 한 참 평안은 없습니다. 사실 죄의 닫는 곳은 지옥이요, 죄 자체가 지옥인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파 목사 Baxter는 “죄는 너를 죽이는 흉안이다. 그러므로 저가 너를 죽이기 전에 네가 먼저 죄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죄를 지으면 죄의 노예가 됩니다.
본문 26절에 뭐랬어요? “내가 깨달은 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같고 손이 포승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조에게 잡히리로다.”
조심하지 않으면 쾌락의 미끼에 걸려들어 올무에 매이고 그물에 걸리기 쉽습니다. 걸려 놓으면 그 다음엔 옴짝 못합니다.
삼손을 보세요. 원수 나라 블레셋의 여자 간첩 들릴라를 아에 가까이 하지 않았더면 괜찮았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부모의 권면을 거역하고 자기 육신의 소욕대로 그 여인을 가까이 하다가 그만 올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걸리기 전에는 힘있는 장수였지만 걸려 놓으니 맥을 쓸 수가 없이 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권세있는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명예 있는 사람도 죄 지으면 죄의 종이 됩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리고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그러면 죄지은 사람은 절망입니까?
아닙니다. 살 길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구주로 영접할 때 모든 죄를 사해 주시며 하나님이 자애의 특권을 주십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죄인된 나,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셨기 때문에 그를 환영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입니다. 죄악의 세력은 강합니다. 당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교묘하게 옭아매려고 올무를 놓습니다. 그물을 칩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정말 마주치면 싸워야 합니다. 나 혼자 싸우면 유혹을 당하든지 실패합니다. 주님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어쩌다가 실수해서 죄를 범했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떠나가고 사망의 줄이 두르고 있으며 죄의 노예가 되어 이리 저리 끌려 다닙니까? 그런 상태에 오래 계시면 안됩니다.
나 위해서 오시고, 나 위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에게 자백하세요. 그리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기쁨과 평화가 축복으로 임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힘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에게 이런 축복 임하시기 바랍니다. 묵은해 가기 전에 다 청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