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인
성경본문 : 잠언 31: 10-12
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12.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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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준 목사
중학교 때 배운 서정주 시인이 쓴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그 시 중에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싯구가 있습니다.
중학교 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배웠고 외웠었는데 참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말 그런 시는 이제는 세상도 어느 정도 살았고 인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것이 인생이다’할만 할 때 쓸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전엔 나이 50을 ‘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안다’하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국화의 완숙함처럼 완숙해져 있는 인생의 참뜻에 대해서 이제는 알만하다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본문 10절에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인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상이라고 한다면 바로 현숙한 여인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 ‘현숙하다’라는 표현을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국가가 어렵고 가정도 어려운 시기에는 더더욱 현숙한 여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기독교 여성이 먼저 현숙한 여성이 되어야 겠습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은 르무엘 왕의 모친이 그의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현숙한 여인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현숙한 여성상은 어떤 것인가?”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하여 가정을 세우는 여인이다.
본문에 13절 이하를 보면 현숙한 여인의 부지런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양톨과 삼을 구해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 먼데서 양식을 가져 오고,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는 ” 등의 아주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아쉬운 것이 저희 어머니 때만 해도 이런 부지런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는데 요즘은 그런 어머니를 참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해주고, 밥솥에 밥하는 것도 예전보다 얼마나 더 편해졌습니까? 보일러가 있으니 나무 땔 걱정 않해도 되고 그러다보니 남는 시간을 엉뚱한 데다 쓰는 겁니다. 여자가 육체미 운동 다니지를 않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좋게 보이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다니다보니 가서는 안될 범죄의 자리에 빠지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경제가 어려워지기 전까지의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런 고리타분한 설교를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현숙한 여인은 세상이 바라볼 때 고리타분한 그런 여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룻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일찌기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섬기는데 아침 일찍부터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서 그것을 가져다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지 않습니까? 결국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이 가정이 룻이라는 현숙한 여인 하나로 행복한 가정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룻 3:11에 보면 룻을 만난 보아스가 룻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 딸아 두려워말라 네가 현숙한 여인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현숙한 여인은 이렇게 가정을 아름답게 세워나가는 여인입니다. 잠 14:1에 보면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 TV에 ‘아씨’라는 프로가 나오는데 저도 가끔 식구들 틈에 껴서 보면 그 남편이 얼마나 고약한지 요즘 그런 남편이 있으면 이혼 않하고 살 여자가 있겠나 생각할 정도로 아주 세상에 패륜아같은 인간엔데 아씨가 그 몹쓸 일 다 당해가면서도 참아내고 그 집을 조금씩 세워가지 않습니까?
현숙한 여인은 그런 여인입니다.
밤늦게까지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온 가족의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하고 25절 말씀에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지금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후일에 웃을 날을 소망하면서 참아낼줄 아는 현숙한 여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숙한 여인은 남편을 세우는 여인이다.
어릴 적에 들으면서 자랐던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바보 온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시절에 서울로 전학을 왔다가 다시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구의동에 있는 형님 집에서 지냈었는데 그 뒷산에 약수터엘 가면 ‘온달 장군의 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놀려대던 바보 온달을 평강공주 한 사람의 힘으로 백제의 위대한 장군으로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니 사실 더 위대한 사람은 온달보다 평강공주가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니 현숙한 여인입니다.
본문에 현숙한 여인은 남편을 세워주는 여인입니다. 23절에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장로와 더불어 성문에 앉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룻기 4장에 보면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앉았는데 성경은 보아스를 가리켜 ‘유력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살아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도 하와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남자들은 세계는 지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아내는 지배하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아합 왕도 결국 이세벨이라는 악처를 만남으로 자신도, 가정도, 나라도 망치지 않았습니까?
전도서를 쓴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고백 중에 깊은 자극을 주는 고백이 있습니다.
전 7:28에 보면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지혜로운 여인을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11절을 보면 현숙한 여인의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굳게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가정은 예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얼마나 초조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고개 숙인 남자’를 저는 소설의 제목 정도로 피상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피부에 와닿습니다.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해 보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유있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장소, 본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장소, 거기서는 어느 누구도 내 꿈을 비웃거나 나의 실패에 욕하거나, 우리의 고민을 웃어 넘기지 않는 그런 장소가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멋대로 집어 던질 수 있는 상대가 집에 있어 주는 그런 남자는 정말 행복하다"
집에 돌아가서도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현숙한 여인은 남편의 가치를 세워주는 여인입니다. 집에 들어왔다고 닥달하는 여인이 아니라 편안하게 쉴 자리를 마련해 줄줄 아는 여인입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입니다. 여자하기에 따라 남편을 성공시킬 수도, 실패시킬 수도 있습니다.
잠 12:4에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같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 되는 어진 여인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3. 현숙한 여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 계시는 여성들은 모두가 현숙한 여인들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를 잘 경외하면 누구나 지혜로와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참 지혜로운 여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인 한나라는 여인도 참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함으로 당하는 설움과 고통을 하나님께로 가져갑니다.
삼상 1:10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성전을 찾아갈 줄 아는 여인이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통곡할 줄 아는 여인이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을 때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고 하는 믿음이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기에 사무엘같이 위대한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IMF한파로 약간 조용하다 싶더니만 또다시 사치병이 도지는가 싶습니다. 외제 수입 화장품이 불티가 나고 백화점을 찾는 발길이 또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참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굴이 고운 것가지고 그 사람을 정말 판단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헛된 것 뿐입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예전의 아름다움이 추억거리로 변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여성은 외모보다 마음을 단장해야 합니다. 딤전 2:9에 보면 사도 바울이 크리스쳔 여성들에게 이런 당부를 합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너무 사치스런 옷은 피해야 합니다. 머리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현숙한 여인이 받을 보상이 무엇입니까?
28절에 “그 자녀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녀들로부터 사례받는 어머니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자녀들의 사례는 그것이 곧 보람이요, 위안이며, 자랑입니다.
또한 남편으로부터 받는 칭찬은 가장 값진 위로가 될 것입니다. 자기를 칭찬해 주는 남편이 있으므로 고된 삶도 다할 수 없는 행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또 31절에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잇습니다. 그 행한 일을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풀같고 그 생명은 꽃같이 시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육체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흘러 갈수록 사라져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그녀로 하여금 고매한 품위를 지니도록 하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는 그 고매한 품위로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헌신을 다짐하는 3,4 여선교회 회원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칭찬받는 현숙한 여인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몸에 배여서 그 신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칭송받는 선교회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