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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시리즈 45
“참된 만족을 향하여”
성경: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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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폴란드에 사는 한 어머니가, 그 당시 유명한 피아
니스트이면서, 폴란드의 수상까지 지낸 페데르비스키(Ignace Pederewski)
의 공연장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공연장 맨 앞 줄에 자리잡은
이 어머니는 아들을 옆 자리에 앉혔습니다.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함께 온 친구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이야기
에 정신을 파느라고, 어린 아들이 옆 자리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공연장 안의 불이 어두워지자, 공연장에 모여있던 관
객들은 그 날의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대하며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곧 무
대가 열리고, 무대 위로 조명이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무대 위에 놓인 커다란 피아노 앞에서, 왠 어린 꼬마가, 오른 손으로 건반
을 두드리며 반짝 반짝 작은 별 이라는 동요를 연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입
니다. 곧 이어 무대에 오른 페데르비스키는, 피아노 앞에 앉은 어린 꼬마의
뒤에 서서,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꼬마가 두
드리는 건반에 맞춰, 왼 손으로는 베이스를, 오른 손으로는 화려한 리듬 반
주를 넣었습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와 어린 꼬마의 피아노 이중주는 대성
공(?)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연주가 끝나자, 모여 있던 청중은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주님
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연상하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
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새
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단숨에
성령의 열매가 그 삶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
운 향기와 화음을 내기까지,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덧입기 위해,
정말 순간 순간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
리의 인생이 한 편의 아름다운 음악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내는 소리는 귀에 거슬리는 탁한 소리일
수 있습니다. 어린 꼬마의 피아노 연주처럼, 거친 소리일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삶은, 훌륭한 연주자이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근사한 협연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돕기 원하
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며 사는 귀한 하루
가 되길 기도합니다.
1.그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 입니다. 딤전 5:3-11
사람들은 바삐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질문
해 봅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알고 싶
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수훈을 통해,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 복이
있으니,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8). 성경에서
마음 을 언급할 때에는, 인간의 정신과 의지, 그리고 감정을 포함하는 인간
의 인격 핵심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은 우리에
게, 우리의 전(全) 인격이 청결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죄인인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청
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은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을, 마치 종이가 깨끗해야 하는 것처럼 죄가 전혀
없고, 깨끗하다는 말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청결하다
는 말은, 원래, 희랍어에서 쭉정이가 없는 알곡 이나, 물이 섞이지 않은 포
도주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청결하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한 가지 단일한 목적에 뜻을 모으는 상태를 말합니
다. 그러므로 산상 수훈을 통해 주님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는 두 마음을 품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 참된 만
족이 있다 고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요즘처럼 절대적
인 가치를 비웃고,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서도, 주님을 향한 생각을 지키면서, 동시에 삶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
지 묻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주님 안에서 청결한 삶을 살면서 만족하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은 상황에 관계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디모데전
서 6장 6절과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족하는
마음 이라고 말한 것은, 외부적인 환경이나 상황에 관계 없이 마음의 평정
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족하는 마음은 금욕적인 경건에 도움이 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초점을 주님께 모아, 마음이 청결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2.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때 만족이 있습니다. 딤전 1:15-16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 아마도 그것은,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큰
사랑(긍휼, 자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
의 모습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에 있는 어느 작은 교
회 근처에, 재킨타 디아즈(Jacinta Diaz)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아들
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재킨타 디아즈 부인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기도의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려움을
당해서 기도가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디아즈 부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부인은 그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디아즈 부
인의 아들이, 이웃 동네 청년과 사소한 시비 끝에 격한 싸움이 일어나 치
명적인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
인의 아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디아
즈 부인의 집에 찾아와, 그녀의 슬픔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디아즈
부인의 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망친 이웃 마을의 청년은, 자신이 저지
른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깨닫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견딜 수 없었
습니다. 그 때까지도 이 청년은 자신이 죽인 이웃 청년이 디아즈 부인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가까운
친구를 조용히 디아즈 부인의 집에 보내서, 부인이 자기 집에 와서 자신과
함께 기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디아즈 부인은,
그 청년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손을 잡
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런 디아즈 부인의 행동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
겠습니까 ?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수 있는
표시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중에 맛볼 수 있는 참 만
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끊임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다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그
[큰 사랑]은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
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참 만족이 있음을 알고, 큰 사랑을
나누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3.고통 가운데에서 맛보는 만족이 있습니다. 벧전 1:3-12
누군가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 라고 묻는다면, 어
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온, 노(老)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이 안타까와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며 성실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가난한 노부부의 집에, 원인을 알 수 없
는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갑작스런 재앙은, 비록 허름하기는 해도 이 분
들의 유일한 재산이자,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와 이슬을 피해 몸을 쉴
수 있었던 작은 집을 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이 늙은 부부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노부부를 위로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찾아온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이
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는 이번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확
실하게 경험한 적이 없었답니다. 집이 불에 탄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큰 불이 났어도, 저나 제 집 사람이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
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두 분의 모습은, 그들을 위로하려고 찾
아온 사람들에게, 오히려 큰 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고통을 경험하는 일은 만족한 삶을 사는 것과 전혀 별개의 것으
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어려움 앞에서도 참으로 감사할 줄
알았던 어느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만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그
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그곳에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기쁨과 평안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
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그렇습니
다. 사도 바울도 여러 가지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 이제는 어떤 형편
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 고 고백합니다(빌 4:11-13).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영광이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을 생각
한다면,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만족한다 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나, 시험을 만나 잠시 근심할지라도, 오히려 크게 기뻐하리라 는 사
도 베드로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세상은 우리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요 ? 믿음 안에서 소망을 잃
지 않는 모습입니까 ? 아니면,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까 ? 오늘
도 우리가 처해있는 모든 상황에서, 여전히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선하신 뜻을 구하며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
니다.
4.만족하지 않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잠 11:2
성경은, 죄를 잉태하는 죄악의 근원을 교만으로 보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
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도들의 삶에 가장 치명적이면
서도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죄악이 교만 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이 치명적일 수 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교만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과 평안을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
황이 좀 더 나아지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시간이 흘
러서 상대방의 성품이 바뀌면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
한 생각은, 자신의 불만스러운 생활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
니라, 주변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
나 우리의 기쁨과 만족이 파괴되는 것은, 상황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
라, 자기 자신의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만 이란, 겉으
로 드러나게 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교만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인 자리를 자기 자신이 차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자신의 연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
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기쁨을 소유하도록 약속받은 사람은, 심령이 가난
한 사람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스스로의 한계성을 느끼면서, 자신의 힘으
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밖에 도우
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결
국, 교만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교만 과
자부심 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부심(자신감) 을 갖는 것이
교만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한 일이나 자신의 생각에 대한 자부심이나
만족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지으신 후에 하나님이 그 지
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3
1).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만족과 자부심(자신감)은, 교만과는 성격이 전
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손으로 그 일을 이루었다고 하는 자기 중
심적인 생각이 마음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를 교만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오늘도 우리 삶의 주인이 주님을
찬양하며,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면서,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겸손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5.당신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요 10:10
요즘은 어른들도 동화를 즐겨 본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동화 속에서 발
견되는 쉽고 단순한 진리들은, 어느 사이엔가 어린이의 심성(心性)을 잃어
버리게 된(?) 수많은 어른들의 감성(感性)에 깊이 호소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동화 가운데, 외국 동화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친숙
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
다. 그것은 주인공 엘리스가 어느 날 자신이 아주 작아졌다는 사실을 발견
하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작아진 것은 참을 수 없어. 나는
원래 이렇게 작지 않았단 말야 ! 어쩌면 지금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엘리스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엘
리스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참을 수 없어 했습니다. 그리고 불평했습
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 혹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사람
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로 13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
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
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상황만을 수평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
면, 똑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미로찾기를 생각해 보십
시오. 높은 곳에서 전체를 넓게 바라보는 사람은, 다음에 어디로 발을 내디
뎌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로 안에 들어가서 옆에
있는 벽만 바라보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 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
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복잡한 미로 안에 있습니다. 만일 우
리가 상황이라는 벽(옆)만 바라보고 있으면, 해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러나 고개를 들어 지극히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위), 거기에, 우리가 찾는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인에게 예비된 만족,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주님이 주시는 축복이 넘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출처: 설교전문학교 글쓴이: 임평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