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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결실치 못하는 땅 막 4:1-7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훌륭한 교사이신 주님은 각색의 신분과 환경 속에 있는 저들에게 가장 필요 적절한 장소를 선택하셔서 이해하기 쉬운 저들의 말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셨습니다.
1. 예수님의 교훈 방법
1)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머무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르침의 장소가 되곤 했지만 특히 바닷가는 예수께서 즐겨 찾으시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회당안에 들어갈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에게까지 자유스럽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체면이나 형식만을 고집하던 당시의 율법 선생이나 위선과 교만이 가득찬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더 많은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자주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하신 지혜로운 처사이신 것입니다. 즉 주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은 진리에 관심 있는 자들에게는 흥미롭고 확실하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며(마13:11,12), 무관심하고 완악한 자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고 이미 그들 속에 있던 것까지 빼앗기 위함이었습니다. (마13:16,17) 결국 복음은 누구에게든지 개방되어 있지만 그것을 깨닫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진리를 사모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2. 결실을 위한 준비
1) 좋은 씨앗이 필요합니다.
농부들은 봄이 되어 파종할 시기가 되면 겨우내 보관해 두었던 씨앗을 꺼내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여 준비해 놓습니다. 그런 다음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면서 준비된 좋은 씨앗을 밭에 뿌리는 것입니다. 양질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에 뿌려지는 가장 좋은 씨앗입니다. 복음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잘못된 씨앗이며 가라지들입니다.
2) 파종자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뿌려줄 자가 없으면 헛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열심있는 파종자가 필요합니다. 좋은 일꾼은 열심히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잘 자라나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돌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씨앗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씨앗을 파종할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열심과 정성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씨를 뿌릴 밭이 필요합니다.
이제 농부는 준비된 씨앗을 파종할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밭은 스스로 농작물을 소유하고 있을 때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준비된 밭은 씨앗이 뿌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모든 사람의 마음은 복음의 씨를 기다리는 밭입니다. (고전3:9) 우리는 이 밭을 가치 있는 옥토로 가꾸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이 밭들이 우리의 나태함으로 인하여 쓸모없는 불모지로 변하지 않도록 열심히 경작합시다.
3. 결실치 못하는 땅
씨앗을 뿌린 농부는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매를 기대해도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땅이 있습니다.
1) 굳어진 땅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앗 중의 더러는 밭가의 굳어진 길 위에 떨어집니다. 이곳에 떨어진 씨앗은 굳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고 맙니다. 굳은 땅은 굳은 마음을 뜻합니다. 즉 완악하고 교만한 자들로서 복음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2) 흙이 얇은 돌밭입니다.
돌밭이란 큰 돌 위에 흙이 얇게 덮여져 있는 밭으로 작은 비에는 쉽게 습하고 햇빛 아래서는 쉽게 건조해지므로 식물이 자라기엔 아주 부적합합니다. 이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심지가 견고치 못한 자를 말합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은 '쉽게 감격하여 기쁨이 넘치지만 작은 박해나 환란에는 쉽게 신앙을 버리고 넘어져 버리는 뿌리가 깊지 못한 성도로써 이와 같은 자는 성장이 없이 늘 같은 상태를 반복할 따름입니다.
3) 가시떨기가 있는 밭입니다.
이곳에서는 싹이 나온 식물이 가시나무로 인해 햇빛을 받지 못해 결실치 못합니다.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 유혹등을 과감하게 자르는 결단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은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좋은 밭이 됩시다. 막4:8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복음을 무리들에게 가르치시고 이에 자세한 해석까지 덧붙이심으로 모든 이들이 천국의 비밀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로서 씨를 뿌리는 자가 네 종류의 밭에 씨를 뿌리는데, 그 중 마지막 밭인 '좋은 밭'에서만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머지 세 종류의 밭은 1) 길가 밭 2) 흙이 앏은 돌밭 3) 가시밭으로서 이러한 토양에서는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시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밭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밭은 소유하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의 밭을 살펴보면서 열매를 풍성히 수확하는 '좋은 밭'이 되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좋은 밭이란 어떤 밭입니까?
1) 씨를 잘 품는 밭입니다.
열매의 알찬 수확은 씨앗의 문제보다 그 씨를 품은 밭의 성분이 더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분의 종자라도 거칠고 황폐한 땅에 뿌려지게 되면 그 씨앗은 오래 가지 못해 말라 죽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설사 싹이 나더라도 뿌리를 힘있게 내리지 못하므로 얼마 못가 태양 열에 의해 곧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좋은 밭이란 먼저 씨앗을 고이 품어 땅 속 깊이 튼튼히 내리게 하고 땅 속의 자양분을 줄기로 보내 잎과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는 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밭의 의미를 해석해 주실 때 '말씀을 듣고 받는' 마음이 좋은 밭이며 이런 밭은 몇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좋은 밭의 첫번째 조건인 하나님의 말씀을 을 자신의 마음 속에 깊숙히 뿌리내리는 준비를 먼저 하여야 합니다. 뿌리가 튼튼히 내리면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도 땅속의 습기로 견딜 수 있으며, 비바람과 웬만한 해충과의 싸움에서도 이겨서 견실한 열매를 더욱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씨를 자라게 하는 밭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조건은 밭의 성분 못지 않게 뿌려진 씨앗을 가꾸려는 농부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농부는 씨앗을 열매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 씨앗에게 관심을 기울여 줍니다. 가뭄에 대비하여 물을 미리 준비하며, 튼튼히 자라게 하기 위하여 비료와 땀을 뿌리며, 비바람에 줄기와 잎 등이 상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보호시설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농부의 성실한 노력은 그 씨앗이 나중 열매를 맺을 때 그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는 씨를 뿌릴 때 벌써 마음에 수확하는 꿈을 안은채 그날을 바라보며 많은 고생과 시간을 투자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 역시도 자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을 생활에 적용시키는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좋은 밭을 가꾸면 가꿀수록 더욱 훌륭한 밭이 되며, 반대로 가꾸지 않을 때는 그 밭은 황무지로 변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좋은 밭의 결과
1)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8절). 씨앗의 목적은 열매를 맺음에 있습니다. 씨앗이 좋은 밭에 뿌려지면 농부의 관심과 보호 속에 잘 자라서 결국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떤 의미에선 보잘것 없는 작은 씨앗이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은 '기적'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은 기적'은 하나님께서 좋은 밭에 베푸시는 은총이며 농부의 그간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삼위 일체적 요소는 좋은 씨와 비옥한 밭, 그리고 농부의 열심입니다.
2) 씨를 뿌린 자에게 열심을 줍니다.
작은 한 알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로 성장한 모습을 바라볼 때 농부는 그간의 고생과 땀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수확의 기쁨과 감격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자란 그 풍성한 들판을 바라보며 씨앗을 뿌릴 때의 눈물과 곤경을 값진 추억으로 여길 것이며, 농부는 새로운 소망으로 다시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합니다. 길가의 굳은 밭이 아니며, 암반이 깔려있는 얇은 밭도 아니며, 가시나무가 무성히 자라는 밭도 아니어야 합니다. 위대하신 농부이신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좋은 밭 속에 자라나는 풍성한 열매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그 고통스런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을 다 잊어버리시고 우리의 열매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열매맺는 생활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 막 4:9-11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13:34)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비유로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 멀리 있는 난해하고 심원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죄로 인하여 영적 축복을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고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는 불행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1. 비유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1절).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그 듯을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의적으로 그 뜻을 숨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한 것은 그 뜻을 숨기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진리를 숨기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시키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에만 매달려 있는 세속적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 영적 진리에 둔하여져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진리에 눈이 어두운 그들의 눈을 밝히시기 위해 비유를 베푸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는데'(사42:7) 있었습니다. 진리에 눈이 어두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죄악의 사상에 갇힌 자를 해방시키며, 빛을 잃고 캄캄한 데 헤매는 자들을 그 어두움에서 나오게 하시는 역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숨김없이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셨습니다.
2. 듣고 깨닫는 자의 복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 많은 사람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국복음의 비유를 듣고 그 비밀을 깨달아 지킨 자는 극소수에 불과한 제자들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읗ㄹ 이해하지 못하여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교훈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떡 가져오기를 잊었다'고 했는가 하면(마16:5-12), 예수님이 얻고자 하는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인데 제자들은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서로 존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자는 생활 가운데서 차츰 천국 복음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을 했을 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물러갔으나 제자들은 그 말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묻는 주님의 말씀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라고 담대히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진리를 깨달은 제자들
무리들은 비유를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6:60)고 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9)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주님의 비유를 이해하고자 했다면 먼저 그들은 자신의 모든 선입관을 버려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특별한 비유가 그들의 마음에 와 닿으려면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의 지상 왕국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을 버려야 했습니다. 씨 뿌리는 자,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밀과 가라지, 겨자씨, 가루 속의 누룩, 바다에 던져진 그물의 비유는 그들이 생각하고 대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이같은 비유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을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어느 정도는 전통적 거짓교훈의 의상을 벗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같은 천국의 비유에서 많은 의미와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탕자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못브에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맛보았고, 잃은 양 비유에서 죄악으로 인하여 방황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유를 주신 뜻 막 4:12,13
스승이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는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깨닫고 반응할 때인 것입니다. 반면, 무관심하거나 도무지 이해치 못하거나 또 오해를 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주님의 안타까움에 동감을 느끼며 인생에게 천국 비유를 주신 깊으신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게 하기 위함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2절) 하신 것은 사6:9,10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서 당시 이스라엘이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부패해짐을 책망하고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것을 경고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슬픈 감정을 품고 옛날 이스라엘 처럼 오늘도 복음의 주인이신 주님을 부인하고 그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 스스로의 완악하고 미련함 때문에 결국은 심판과 영벌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자초한 심판
주님께서 '하나님의 비밀'(골1:26)이시며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에도 당시 1) 종교지도자들은 유대 민족주의적인 편협한 유일신관과 율법주의 중심의 구원론 등의 편견에 사로잡혀 주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로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2) 또한 지식인은 교만함 때문에 3) 부자들은 탐심 때문에 4) 서민들은 영적인 무관심 때문에 주님을 온전히 영접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베푸신 비유의 참 뜻을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2) 심판의 진행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하심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계시와 영감의 문을 닫아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불신자들은 진리에 대해서 죽은 자들인고로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계3:1) 1) 인본주의의 교만하고 높은 눈, 물질만을 추구하는 천박한 눈, 비판과 정죄만 하려는 악한 눈은 예수님 안에 충만한 복음의 빛을 볼 수 없는 죽은 자의 눈들입니다. 2) 완고하게 닫혀진 귀(눅16:31), 말씀을 한쪽 귀로 내보내는 경솔한 귀(약1:23,24), 아부와 아첨만 좋아하는 패망의 귀, 귀신의 가르침에 미혹된 이단자의 귀, 오해하는 반쪽 귀(눅8:8)들을 가지고는 주님의 비유 안에 감춰진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3) 심판의 목적
'돌이켜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 것은 끝내 불신앙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구속의 진리를 멸시한 대가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1)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함을 교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는 인생은 씨앗 없는 밭이요, 신랑없는 신부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의 방편이 없음을 교훈합니다. (행4:12) 심오한 인간의 철학도, 아무리 깊고 고상하고 거룩한 종교행위라도 십자가의 지혜를 외면한다면 돌이켜 회개하랄 능력도 죄사함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비유를 경청할 때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1:18-30)
2. 풍성한 은혜를 더 주시기 위함
주님은 찾아온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13절)라고 하신 후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복음의 원리로 은혜스럽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1) 비유를 주신 목적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늘 접하는 자연적 세계속의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거룩하고 풍성한 영적 진리를 쉽고, 재미있고, 단순하게 교훈하시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오늘날 1)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시시때때로 깨달을 수가 있으며(마11:2) 2) 그 결과 풍성하신 복음의 은총을 맛보게 되고(엡1:9) 3) 범사에 감사함으로 영원한 소망에 거하는 (엡1:17-19)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2) 비유에 대한 성도의 자세
성도가 주님의 모든 비유를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1) 열심있는 구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7:7-11) 예수님께서는 청중들이 모두 떠난 후 다시 찾아온 제자들에게만 비유의 참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34절) 청중과 구도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 구속적인 복음 진리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치 못하고 무거운 짐만 지게 하는 도덕주의적 해석, 문맥과 성경의 배경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신비주의적 해석법은 비유의 원뜻을 곡해하거나 자칫 잘못된 신앙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고 하셨듯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구속사적 맥락과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 막 4:14,15
본문에서 말하는 길가란 세상 여러사람들 중의 어느 한 부류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이 닫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귀한 복음을 사탄에게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씨
1) 천국복음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서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말씀'(마13:19)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국말씀'이란 곧 천국복음입니다. 이 천국 복음은 씨가 여기저기 뿌려지듯 어디든지 뿌려집니다. 이기주의자에게도 뿌려지고 완악한 사람에게도 뿌려지고, 지적인 사람, 고관대작, 빈촌에도 복음은 뿌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복음의 씨 뿌림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요3:16) 그러므로 단지 인간은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요1:12) 그러면 씨앗이 자체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어 스스로 발아하고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내고 자라며 결실하듯 복음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생명의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2) 감춰진 비밀
씨앗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 중의 하나지만 동시에 가장 비밀스러운 것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첫째, 그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씨앗은 작고 단단하나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도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둘째 생명력이 있습니다. 씨앗에는 그 안에 생명을 보존하고 새싹을 움트게 하고 그 새싹을 완전한 식물의 형체로 자라게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결국 이 생명력이 많은 결실을 하게 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사람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며 결실케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있기에 복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씨뿌리는 자
1) 사명자
여기에서 '씨 뿌리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본래적인 '천국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전파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 복음의 전파의 사명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마28:16-20) 그리고 이 사명은 열두제자와 교회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복음을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에 접한 자는 모두 복음 전파의 사명자인 것입니다.
2) 씨를 뿌려야 함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길가에도 뿌려야 하고 돌밭에도 뿌려야 하며 가시떨기에도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이 잘 자라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3. 길가
1) 완고한 마음
본문에서 말씀하는 길가는 밭이랑 사이의 길일 수도 있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일반 통행로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길이 사람들에 의해 많이 밟혀 굳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흙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은 바리새인, 서기관, 그리고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해박한 성경지식과 높은 지위, 명예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단단한 마음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것들, 즉 재물, 명예, 권세 등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복음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복음이 뚫고 들어가기에는 너무도 단단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을 눈 앞에 두고도 생명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2) 복음을 빼앗김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이들은 복음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합니다. 복음의 씨앗은 길가에 떨어져 영원히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길가는 가장 노출이 잘 된 곳입니다. 따라서 새들이 길가의 씨앗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여 먹어버리듯이 사탄이 거두어 가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고 캄캄한 암흑 속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맛보기 원치 않는다면 우리 마음의 옥토를 가꿔야 합니다. 우리의 단단한 마음을 성령의 비로 적시고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돌밭의 씨와 같은 믿음 막 4:16,17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곧 우리 성도가 천국 복음을 들을 때 제일 먼저 이해하여야 할 중요한 비유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길가에 뿌려지지는 씨도 있고, 돌밭에 뿌려지는 씨도 있고, 밭가에 늘어져 있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는 씨도 있으며, 이랑이 깊은 옥토에 떨어지는 씨도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베푸실 때 건너편 밭가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일상 생활 속에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들을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진리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단 밭 가운데 떨어져 뿌리가 나고 싹이 돋아났으나 햇볕을 견디지 못하여 말라죽고 마는 돌밭에 떨어진 씨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는 일단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곧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16절). 이는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빠른 성장을 나타냅니다. 비유에서도 '곧 싹이 나왔다'고 하신 것처럼, 이랑이 깊은 옥토에 떨어진 씨는 싹이 흙을 밀고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돌밭은 그 위에 덮인 흙이 얇으므로 곧 싹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밖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열광적으로 내재된 믿음으로 밖으로 표출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의심해 보거나 주저하며 숙고하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들은 것을 성경의 진리와 대조해 볼 시간도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요란하게 열심과 열망을 나타냅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는 온전한 신앙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마치 지푸라기가 맹렬하게 불길을 일으키다가 금방 사그라지는 것과 같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신 믿음의 형태가 바로 그러한 신앙입니다.
2. 그는 진정한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기쁨으로 받으나'라고 한 이 말은 복음으로부터 인격이 변화되어 나타난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현재 어떤 선을 소유하였고, 또는 장래의 어떤 선을 기대함으로 인해 마음이 즐겁게 고양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우리 마음에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잃었을 때 우리는 기쁨도 잃게 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곧 말라 시들어짐으로써 기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들고 죄를 깨달아 심령이 고뇌한 후에 오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즉 회개한 심령이 누리는 평안과 기쁨이 진정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과 끊임없는 영적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일시적 흥분이나 외견상의 즐거움으로 끝나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환란을 이기고 승리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3. 그 믿음은 곧 무기력해지는 믿음입니다.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7절). 돌밭에 씨앗이 떨어져 말라죽은 이유는 흙이 얇은 고로 양분과 수분을 저장할 수 없어 태양의 열로 그 싹의 뿌리가 마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적으로 말씀을 받아 열광하던 사람이 '환난'과 '핍박' 때문에 믿음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두 낱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누가는 '시험을 받을 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고 얕은 심령은 복음을 받기도 쉽게 받지만 그것 때문에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쉽게 믿음을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신앙을 고백하는 시기가 길지 못합니다. 열광적인 열심은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사이비 신앙과 진정한 신앙을 구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곧 실망하여 상상력은 지치고, 감각은 시들해지며, 정열을 생기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고 무감각하여 신앙정신의 마비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힘든 신앙을 굳이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말랐다'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닥치자 곧 배교하는 자의 믿음은 그 마음속에서 어떤 신앙적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히4:2)는 말씀이 나타내고 있듯이 그는 들은바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지 못하고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가시밭 신앙인 막 4:18,19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가시밭 신앙인의 비유는 오늘날 세속화되어가는 현대 교회의 특성을 잘 반영해 줍니다.
1. 신앙적인 특성
1) 믿음은 있되 회개의 열매는 부실합니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란 완고하게 거부하는 '길가의 마음'이나 부화뇌동하는 '돌밭의 마음'과는 달리 1)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했으며, 2) 가시떨기라도 왕성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풍성한 소양을 갖추었으며, 3)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라는 뜻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좋은 열매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믿음과 더불어 철저한 회개가 병행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 주님의 구속적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지만 더불어 마음속에 있는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빌3:7,8) 이러한 사람은 '선다싱'은 '거미는 죽였지만 거미알을 남겨둔'사람이라고 했습니다.
2) 게으른 신앙생활을 합니다.
가시떨기는 게으른 농부의 밭에 무성한 법입니다. (잠24:31) 주님은 그 마음의 밭 깊은 곳에 가시떨기의 뿌리가 남아있음을 아시고도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후에 신앙이 성장하여 변화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눅13: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마음 밭 경작을 게을리하여 세속의 가시 떨기들이 싹이 나고 자라도록 방치해둔 것입니다. 오늘 현재의 성실함은 과거의 오류와 과오를 씻을 수 있으며, 장래의 좋은 삶의 열매를 얻는 길이 됩니다.
3) 조화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나 세상 일에는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하려듭니다. 강단에서의 설교소리에는 졸음이 오지만, 시장에서 돈 세는 소리에는 눈빛을 내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신앙은 필연코 세상의 허영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바른 신앙과 영적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 힘써야 합니다. '무디'가 그랬듯이 '끓는 남비에는 파리가 않지 못하는 법'입니다.
2. 가시밭 신앙의 의미
성경에는 가시떨기, 가시나무, 엉겅퀴나 찔레 등을 게으름, 저주, 말썽 등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잠24:31;26:9;고전 12:7;딤전6:10) 주님께서는 본 비유를 통하여, 세속적 근심과 재리의 유혹과 욕심들이라고 구체적으로 해석하시며, 그런 것이 성도의 신앙 성장과 하나님의 진리를 가시떨기처럼 방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유익한 염려와 근심을 권장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1)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명적 염려(6:31-33) 2) 이웃을 위한 사랑의 염려(롬9:1이하) 3) 자신의 성결을 위한 회개성 염려(고후7:10)등입니다. 그러나 신앙성장을 저해하고 신앙적 삶을 파괴하는 사탄에 속한 염려와 근심들이 있습니다. 특히, 현대교회의 성도들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화 시대 속에서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다양 욕구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1) 재리의 유혹에 빠져 세상의 허영으로 인해, 염려하고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딤전6:9-10), 데마처럼 세상으로 가는 일이 많습니다. (딤후4:9-10) 2) 또한 더러운 탐심 때문에 (골3:5,6), 분수를 모르는 과도한 욕망 때문에 (약4:1-3), 번뇌하게 되고 염려하게 됩니다. 3) 또한 불확실한 환경을 만났을 때 주님의 권능과 사랑을 신뢰치 못하므로 불평, 원망, 염려하게 됩니다. (마8:23-26) 4) 그리고 현대인의 삶의 염려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웃과의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갈등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믿음의 열매를 썩어버리게 합니다.
3. 가시밭 신앙의 열매들
1) 위선적인 인격의 열매
가시밭 신앙인들은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위선자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늘 죄책감을 느끼며 또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약점을 들춰내며, 비판하며, 정죄하는 습관을 가진 가시나무 교인이 됩니다.
2) 부정적 전도의 열매
전도를 하고도 신앙적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신의 하수인으로 삼아 오히려 교회 공동체의 분열과 당쟁을 초래하는 말썽꾼이 되기 쉽상입니다.
3) 근심으로서의 물질의 열매
거룩치 못한 신앙 인격은 곧 물질 생활에도 직결되므로 치부를 하더라도 늘 불만족과 근심과 불안, 다툼등이 뒤따릅니다.
옥토의 의미 막 4:20
씨앗은 옥토에 뿌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앞의 여러가지 예를 든 것입니다. 이제 옥토는 어떤 땅이며, 옥토에 뿌려진 씨앗은 어떤 결실을 맺게 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옥토
1) 중생한 마음
옥토는 이른 봄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위해 일궈 놓은 땅입니다.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 하더라도 일궈놓지 않으면 그것을 옥토라 부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씨앗을 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내 묵은 땅을 일궈 놓음으로써 땅은 신선한 산소를 공급받고 땅속에 있는 자양분이 골고루 섞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일궈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마음이 일궈져야 한다는 것은 곧 중생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귀로는 들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말씀을 듣고 성장하고 결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귀중하게 간직합니다.
2) 온유한 마음
옥토는 부드러운 땅입니다. 뿌려진 씨앗이 쉽게 속으로 침투할 수 있고 발아할 수 있도록 충분히 부드럽고 따뜻한 땅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도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쉽게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싹을 낼 수 있도록 따뜻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은 우리 속에서 발아합니다.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온유를 배우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마11:29) 모세는 그 온유함이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습니다.(민12:3) 사도바울도 그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고후10:1) 복음은 항상 온유한 자에게 쉽게 침투하며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3) 자양분이 많은 마음
옥토는 자양분이 많은 땅입니다. 기름진 땅입니다. 농부가 이른 봄 아무리 땅을 부드럽게 일궈 놓아도 땅 속에 자양분이 없으면 그 땅엔 씨앗을 뿌릴 수 없습니다. 결실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소, 인산, 칼륨 등의 자양분이 흙속에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마음에도 이러한 자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른 기도와 금식, 그리고 구제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자양분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2. 씨앗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씨앗이 없는 옥토를 상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름이 없는 등잔이요, 물고기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입니다. 미모는 있으나 교양과 정숙이 없는 여인과 같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땅은 황무지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온갖 잡초와 엉겅퀴만이 무성할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양이 있고 인격이 있고 지식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아름답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생명을 줍니다. 씨앗이 옥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해 주듯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존재 의의를 입증해 줍니다. 복음의 씨앗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3. 씨가 옥토에 뿌려지는 결과
1) 결실함
씨앗이 옥토에 떨어지면 어느 정도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땅을 뚫고 나와서 서서히 일면으로는 뿌리를 내리며 일면으로는 줄기를 뻗고 잎을 내 성장합니다. 그리고 꽃을 피우고 많은 결실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씨앗도 옥토와 같은 성도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거기서 뿌리를 내고 새싹을 내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결실도 합니다. 단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처럼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결실하는 데는 옥토의 전적인 희생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옥토가 수분을 공급받지 않고 자양분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결코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 역시도 생명의 결실을 맺기 원한다면 복음을 위한 전적인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2) 다양한 결실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실의 다과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충실한 결실을 맺느냐는 것입니다. 단 삼십배의 결실을 맺었어도 그 알곡이 충실하기만 하다면 주인은 그것으로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배의 결실을 하였더라도 그것이 모두 부실한 쭉정이라면 주인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인을 기쁘게 해 드리기 원한다면 무조건 많은 일을 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적은 일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복음의 등불 막 4:21,22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5) 본문은 공관복음의 저자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마태는 산상보훈에 넣고 누가는 마가와 같이 씨뿌리는 비유 뒤에 병행하지만 그 뒤에 비유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서도 본문은 '말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함이냐'고 했으나, 마태는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로(마5:15), 누가는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눅8:16)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은 곡물의 양을 측정하는 상용의 그릇이요, '평상'은 식탁에 기대앉는 침상으로 가정용입니다. 그리고 '그릇'은 일반적인 가정용 그릇을 말합니다. 이런 물건ㄴ들로 불을 가려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아무리 작은 등불이라도 어두운 곳에서는 빛을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우리가 세상에 비추어야 할 그 빛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빛'입니다. (요1:4) 수많은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빛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이 빛이 세상에 직접 왔으나 세상이 알지 못하였고, 어두움에 비추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빛을 싫어하여 잡아죽여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빛은 곧 말씀이요, 하나님이시요(요일1:5), 그리스도시요(요1:9;8:12), 그의 복음을 받은 성도들입니다.(마5:14)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빛은 결코 세상적인 것들도 인하여 가리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미숙한 성도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말씀을 간직하고 이 말씀의 빛을 자기들 마음속에 폐쇄시켜 은밀한 장소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빛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2. 빛을 비추는 등경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등불이 복음이라면, 등경은 그 복음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본서에서는 이곳에 한번만 나타나고, 마태에 2회(5:15;6:22), 누가에 6회, 요한에 1회(5:35), 벧후에 1회, 계시록에 3회가 사용된 이 구절은 '촛대'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등경은 곧 촛대는 교회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통해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등불이 전등불로 바뀌어 천장에 배달려 있으므로 스위치만 켜면 온 방 안이 환하게 비취지만, 호롱불이나 촛불은 그것이 약간 높은 등경 위에 있어야 방 안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환하게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복음은 결코 은밀하게 숨어 있거나 밀교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또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모든 사람, 모든 계층,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하고, 개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등경처럼 복음을 받치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교회는 진실하고 남에게 숨김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3. 복음은 만인에게 널리 비춰져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마5:16). 진리는 언제나 감추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때로는 커다란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진리인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신앙을 남에게 나타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황제가 신이었습니다. 이 신은 거짓 신이므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엇이 진리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인 예수만을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진정한 진리를 나타낸 것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황제는 국가의 화신이요 인격화된 신이므로 모든 국민은 그에게 희생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 정해진 날짜에 희생을 드리고, 신주를 붓고, 성스러운 음식을 맛보았다는 증명서를 받으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형식적으로 그러한 의식을 행하고 황제의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로부터 금세기의 신사참배에 이르기까지 수천 수만의 성도들이 그것을 행하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별 어려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의 성도들은 그들의 복음의 신앙을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진리를 보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등경인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온 세상에 널리 비춰져야 합니다.
들음의 중요성 막 4:23-25
복음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전 세계와 오는 세대에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언제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 중요성에 대해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듣는 중요성에 비추어 그에 대한 바른 자세와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유익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듣는 바른 자세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1) 적극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듣는 것이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님을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듣는 것은 적극적인 일입니다.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입을 열지 않으면 내것일 수 없듯이 진리의 말씀도 우리가 마음의 마음의 문을 열고 적극적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결코 부딪혀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을 동원하여 말씀의 의미를 깨우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말씀은 그 깊은 의미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말씀을 들으려는 자에게 말씀은 그 진리를 드러내 보입니다. (눅10:38-42)
2) 새겨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비록 그의 말씀을 우리의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한점의 오류도 없이 절대적으로 완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의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려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좌우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마5:44)는 말씀을 우리의 이성으로는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이 세상의 원리대로 한다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완벽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먼저 자신이 살고 그 원수도 살리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3)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아마 신실한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들으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곧잘 좌절합니다. 그러한 노력과 마음 자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실망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고 마음판에 새겨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좌절하거나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염두에 두고 묵상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들음으로써 얻는 유익
1) 영생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얻게 되는 첫번째 유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의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4:14) 육신의 삶 뿐만 아니라 영혼의 삶도 풍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마4:4;요10:9)
2) 확신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진리로 확인될 때 우리에게는 말씀에 대한 신뢰가 생겨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우리의 삶에는 불안이 없어집니다. 확신 없는 신앙처럼 무익한 것은 없습니다.
3) 말씀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서 얻게 되는 지식, 확신등은 우리를 정적인 인간에서 동적인 인간으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수동적으로 말씀을 듣던 입장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입장으로 그 사람을 바꿔 놓는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공급받던 자에게 이제는 말씀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만큼 귀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생명을 소유할 수 있고, 이 세상을 흔들림 없는 확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확신 속에 근거한 복음 증거의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막 4:26-29
본문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가복음만의 독특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서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흡사한데 앞서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밭에 주안점을 둔 비유라면 본문의 비유는 씨 자체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씨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본문은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관해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1. 은밀한 확장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농부가 하는 일은 땅을 일궈 옥토로 만드는 일과 씨앗을 정성껏 뿌리는 일입니다. 그 이후에 농부는 그것이 언제 싹이 나고 자라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것은 자라날 뿐입니다. 그리고농부는 그 씨앗이 자라난 한 순간만 볼 뿐 자라는 (진행되는)것은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니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시적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확장되어지는 모습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은밀한 중에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확장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루 속에 누룩을 넣으면 넣은 것 같지도 않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은 엄청나게 부풀어져 있는 것입니다.
2. 독립적 확장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옥토를 일구고 씨를뿌리고 잡초를 뽑는 등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 뿐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농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즉 비를 내리고 햇빛을 쬐는 일, 땅 속의 자양분을 흡수하는 일등은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결코 인간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한된 일들이라고 해서 그 일이 가치 없는 일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한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성장하빈다. 당신의 능력과 방법에 의해 성장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신앙의 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천국을 도래케 하거나 성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3. 필연적 확장
농부에게는 심겨진 씨앗을 자라게 할 능력도 없지만 동시에 씨앗의 성장을 막을 힘도 없습니다. 한번 심겨진 씨앗은 반드시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꾸준히 조금씩 조금씩 자라납니다.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은 퇴보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장을 정지하기도 하지만 식물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정지나 퇴보가 없습니다. 성장합니다. 그 성장은 필연적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퇴보하는 일이 없습니다. 확장이 정지되는 일도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세계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왔습니다. (행1:8) 이 확장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주님의 오시는 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4. 희생을 바탕으로 한 확장
씨앗 속에 아무리 활발한 생명력이 있다고 해도 대지 속에 자양분이 없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대지 속에 식물을 성장시키기에 좋은 자양분이 많이 있으면 그 씨앗은 빨리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튼튼한 줄기와 가지, 좋은 결실을 위해서는 더욱 많은 거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도 결코 성도들의 희생이 없으면 안됩니다. 기독 교회사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수없이 많은 성도들의 피와 땀에 의해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성도들의 피와 땀과 희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융성하게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계속적인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와 땀을 요구하십니다.
5. 단계적 확장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세상의 어떤 식물 중에도 싹보다 이삭을 먼저 내는 식물을 없습니다. 그리고 이삭보다 곡식을 먼저 내는 식물도 없습니다. 모든 식물은 새싹에서 이삭으로 옮겨지는 충분한 과정을 거친 후 열매를 냅니다. 따라서 이 충분한 과정을 농부는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하나님의 도래를 위해 우리는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곡식의 성장과정을 바라보면서 곡식이 익을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시대를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눅12:56)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금도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위해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겨자씨의 축복(1) 막 4:30-32
주님은 제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이해를 돕고자 '우리가 하나님의 나를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30절) 하시면서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적은 무리의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유대인들이 나무의 씨 중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기는 겨자씨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교훈하셨습니다. 이 겨자씨의 비유 속에는 주님의 고난과 신학과 꿈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과 고난에 동참하려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하겠습니다.
1. 겨자씨처럼 작게 여기심을 받으신 예수님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라고 하신 것처럼 겨자씨는 당시 농경사회의 유대인들에게는 '하찮은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한때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가지라'(마17:20)고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나님의 나를 하찮고 가치 없고 보잘것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불신앙인들의 눈에는 주님과 교회의 성도들이 겨자씨처럼 하찮은 존재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자들의 눈으로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회적인 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성장지는 천한 나사렛 동네였고(마13:54), 전공은 목수였으며, 가난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허울좋은 장남권과 더불어 홀어머니와 그때까지 경제력 없는 동생들 뿐이었습니다.
2) 정치적인 면
무력한 피지배국인 유대인이었으며, 게다가 현실적 정치 참여의식은 도무지 없었고(요6:15), 그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것이며, 그나마도 미래적인 것이었습니다. (막13:13;눅17:20,21) 그의 발언은 오해받기 십상이었는데, '연행하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때리고, 맞고, 정부에서 달라면 속옷까지'(마5:38-44) 벗어주는 행위로 민족주의자들에게 비난과 멸시를 당하고 로마 정부에게도 버림받아 십자가의 극형을 당했습니다.
3) 종교적인 면
외적인 능력들은 기가 막히게 풍성히 나타났습니다. 신유, 이적으로 인한 그의 능력은 무식자, 무산자, 병자, 정신 이상자, 문둥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했습니다. (마4:24;고전1:26) 그러나 그의 종교원리는 너무 난해하여 핵심 제자들마저도 이해하기 어려웠으며(막4:10-13), 대중들에게는 과대 망상적으로 보였고(요6:60,66), 당시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는 위험한 급진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행24:5) 게다가 정치 종교의 지도층 인사들과는 도무지 사귈 줄을 모르고 다투기 일쑤였으며(마23:1-34), 끝내 산헤드린 최고회의에서 '신성모독죄'로 사형언도를 받고(막14:61-64),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의 제자들은 부활한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줄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2. 겨자씨의 축복
이상은 불신앙적인 현대인의 눈으로 주님과 그 나라를 본 것입니다. 이처럼 피상적인 관점에서의 그의 나라는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이 없습니까?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님은 얼마나 위대하시고 영화로운 신앙과 존경의 대상이 되셨습니까? 그분의 비천함은 겸손의 표상이요, 그분의 배척받음은 우리 인생의 무지와 죄악의 거울이요, 그분의 치욕적인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와 관문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다툼과 고독과 한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지구촌에 편만한 교회 안의 형제들과 즐거운 친교를 누리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즐거이 찬송을 부르며 소망 중에 살 수 있으니, '겨자씨가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2절)라는 하나님 나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라도 땅에 심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심길 때(30절)와 심고 난 후(31절)를 구별하여 말씀하시고 심은 후의 결과를 보여 주십니다. 겨자나무는 3-4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성도는 비록 겨자씨처럼 천하게 보이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심을 때 상상할 수 없는 보상과 결과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갈6:8-10) 이러한 보상은 1) 성도들의 믿음과 그로 인해 얻는 구속의 은총(롬6:23)입니다. 2) 성도의 헌신에 따른 상급입니다. 3) 성도의 고난에 상응하는 축복입니다.
겨자씨의 축복(2) 막 4:30-3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30절). 이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비유 중에 가장 흥미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임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설명할 것인가를 생각하시다가 비유로 나타낸 것이 바로 이 '겨자씨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극히 작은데서 시작하여 전세계의 만백성을 구원하고 안식을 베푸는 교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 겨자씨 비유의 의미
1) 작은 씨에서 큰 나무가 되는 겨자
팔레스틴에는 세 가지 종류의 겨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 흑겨자는 음식에 넣는 양념으로 기르기도 합니다. 모든 겨자는 이 지방의 기후 조건에 알맞아 그 씨는 비록 들깨씨 정도의 작은 것이지만(마17:20;눅17:6) 다 자라면 새들이 와서 앉을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새가 날아와 앉는다고 해서 새들이 그곳에 둥우리를 틀 정도로 큰 나무가 된다는 뜻은 아니고 새들이 잠시 앉아서 쉴 정도라는 뜻입니다.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는 겨자는 그 씨에 비해 대단히 크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보통의 나무들은 다년생이지만 이 겨자는 1년생입니다. 갈릴리 중부에서 자라는 겨자는 4월이면 3-4미터나 되는 큰 나무로 자랍니다. 그것도 아주 속성으로 자라납니다. 그 가지들은 사방으로 쭉쭉 뻗어 울창한 숲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은 별로 강해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는 새가 앉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2) 겨자씨 비유의 의미
예수님은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분량이 겨자씨 한 알만큼의 작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의 성장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성장해 가는 것과 같이 믿음의 씨가 생기면 그 믿음은 태산을 옮길 만큼 큰 역사를 나타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2. 겨자씨로 비유된 믿음
겨자씨 한 알은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하기 전 한 걸음 내디딘 선한 결단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아직 믿음의 온전한 형상을 갖추지는 못했어도 우리가 소유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작은 씨가 자라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이같은 말씀은 믿음의 자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겨자씨의 처음 모습은 다른 채소의 씨나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 새들이 깃들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은 겨자씨의 품성을 믿음의 그것과 잘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겨자는 풀도 아니요 나무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매운 맛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강한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전혀 눈여겨 볼만한 것 같지 않은 믿음도 그건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작은 것이지만 한번 자라서 그 씨가 뿌리를 내리면 그 믿음의 맛으로 인하여 무수한 심령을 감동시키고 거짓과 탐욕의 잠을 깨도록 합니다. 믿음은 독선과 권세의 성을 허물고 저마다 개성 있는 자유의 맛을 내면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뭇영혼이 깃들어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3. 겨자 나무에 비유된 세상의 교회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세계 모든 백성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그늘에 깃들이고 안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로 하신 말씀과 같이 겨자씨는 복음이요, 그 나무는 그리스도요, 그 가지는 성도들입니다. 복음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가지가 나무에게 떨어져 나가면 한데 주워 모아 불태우고 맙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겨자씨는 계속 공중의 새들에게 안식을 줄 때까지 자랍니다. 그와 같이 교회는 주님께서 예언하셨던 그 시대로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 사람들에게 안식과 보호를 제공해 오고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적 철학도 방황하는 영혼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지만, 오직 교회만이 인간에게 안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교리나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대문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작은 씨로부터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것도 다년간 자란것이 아니라 그 성장의 속도가 빨라 1년생이면서도 다른 나무들처럼 크게 자란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복음이 성숙하면 큰 나무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작은 씨가 자라 큰 역사를 이룬다는 의미에 이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막 4:33-34
예수님께서는 몸을 드려 인류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인들에게는 너무도 어렵습니다. 난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비유입니다. 비유로 이야기를 하면 어떠한 난제들도 쉽게 풀이가 됩니다. 그리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비유는 쉬운 사람들에게는 쉬운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난해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듣지를 못하고 진리에 눈이 어두운 자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말씀의 평이성
1) 용이한 하나님 나라의 접근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첫번째 목적은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접근하게 하는 데 있어서 용이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여러차례의 전쟁과 계속된 강대국들의 폭압 정치에 의해 여러 면에 있어서 생활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은 구약성경을 가진 민족이고 율법을 맡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소수의 서기관들과 율법학자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에 정통한 신학적 용어로 하난미의 나라에 대해 가르쳤다면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른 권위와 권세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였고 하늘에 속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2)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원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딤전2:4;벧후3:9) 무지하다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복음전파자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ㅇ르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2. 말씀의 비의성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중의 또 하나는 천국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철저하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스러운 곳입니다. (막4:11)신비로 가득찬 곳입니다. 하나님의 그곳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마22:11-14) 기름이 예비되지 않은 자는 (마25:1-13) 들어가 ㄹ수 없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원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천국을 귀히 여기고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자만이 들어가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는 법이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는 법입니다. (마7:6) 천국은 그처럼 소중한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놓으시되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차단하십니다. 그 차단의 방법이 바로 비유인 것입니다. (막4:12) 이러한 방법으로 사용된 비유는 천국을 드러내는 비유가 아닙니다. 숨기는 비유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막4:12) 비유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듣기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연구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살펴보고(벧전1:10), 상고해 보아야 할(행17:11)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지식을 버리는 자를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호4:6)
3. 제자훈련의 효율성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어려운 비유로 말씀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제자 훈련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순히 말씀을 듣고 깨우쳐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일반 백성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위해 택함받고 부름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다름 아닌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을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의 믿음이 자라야 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전할 수 있도록 정확한 말씀의 지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 비유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이 그것을 납득하지 못할 때 주님께서는 자세하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정확한 지식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 막 4:35-39
무리에게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신 주님은 몹시도 괴로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태운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위기와 공포로 느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는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겪게 되는 시험의 때를 의미합니다. 이제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이 배워야 할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시험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1)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본시 남의 작은 칭찬이나 자기의 보잘 것 없는 권위에도 곧잘 우쭐해집니다. 그러므로 온갖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가는 곳마다 많은 무리의 환영을 받으시는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제자들은 자칫 교만해질 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무엇이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충만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믿기만하면 삶의 모든 문제들이 사라지고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조그만 어려움만 닥쳐도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자고하지 않고(고후12:7),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여 범죄치 않는(출20:20)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려고 때로는 심한 풍랑, 곧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제자들도 이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쯤이야 자신들의 힘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몰아치는 광풍 앞에서 자신들의 온갖 노력이 허사임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내심도 확고한 믿음도, 주님을 향한 사랑도, 담대함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주님만 받으셔야 마땅함을 시인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전3:18)
3)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사 광풍이 잠잠해진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1절)하며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만나되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은 시험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갖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벧전1:6-7)
2. 시험에 대처할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1)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게 되는 원인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연고인 것입니다. (약1:14) 그러므로 환난에서 구원받길 원하는 자는 실족케 하는 원인을 발견하여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위른 스스로 삼가 주의 말씀을 좇아 행하기에 (시17:4)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2) 담대해야 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으며, 돌아보지 않는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부족한 연고였으며 비겁한 행위였습니다. 적을 두려워해서는 그 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치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십니다. (히2:18)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려움 앞에서도 언제나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위에 굳게 서서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 말고,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3) 믿음의 인내로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으며, 엄청난 사랑을 체험한 자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고(벧후2:9) 능히 도우시는(히2:18) 주님을 믿고 인내하며 의지합시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는 자가 모든 시험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롬8:35-37)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시험의 근원을 제거하고 마귀를 대적할 담대한 신앙과 나를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리는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 막 4:40,41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어찌 믿음이 없느냐'(40절).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배에 그대로 모신채 바다를 건너가고자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본래 기후의 변화가 심하여 갑작스런 폭풍우가 자주 일어납니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6,37절) 그런데 예수님은 하루종일 무리들에게 시달린 고로 매우 피곤하였습니다. 그래서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폭풍우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주님은 평안히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폭풍우는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는 배에 위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살펴봄으로 중요한 진리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시련은 닥친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망망대해에서 여기 제자들이 타고 있던 조각배와 같은 것입니다. 흔히 이 세상은 고해라고 합니다. 세상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여 안식의 땅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광풍노도가 불어닥칠 위험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피안의 세계인 영원한 안식의 땅에 이르기까지는 일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바다에 능한 경험자라도 미친 듯이 불어닥치는 광풍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바다에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바다는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던 제자들도 광풍을 만나 죽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항해에서 시련의 광풍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던 요셉과 다윗과 다니엘도 그와같은 시련의 물결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사랑하는 부모를 뵙지도 못하고 형제의 미움을 받아 먼 이국으로 팔려 갔으며, 족장의 사랑받던 아들이 노예로 전락하여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지만 사울의 미움을 받아 온갖 고난을 당하며 십수년간에 걸쳐 도망다니며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도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으로 인하여 사자굴에 들어가는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신약에 있어서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 역시 그러한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생활가운데서 예고도 없이 닥친 어떤 시련을 보고 혹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여서는 안됩니다.
2.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능히 그 시련을 물리쳐 주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절) 주님은 폭풍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폭풍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으나 주님은 고요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주님의 주무심은 요나의 다시스로 도망가며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든 것과 (욘1:5)는 다릅니다. 요나의 잠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잊기 위한 잠이지만, 주님의 잠드심은 평안한 가운데 안식을 취하는 잠이었습니다. 그러나 배 위에 큰 물결이 밀어 닥치고 물이 올라오자 제자들은 겁을 먹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비해 바다에는 별로 경험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도와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위급한 순간에도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배에는 주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그러므로 여기 이 제자들의 태도를 우리와 비교하여 보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인생의 배 위에 함께 해주심으로 모든 풍랑으로부터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인생의 폭풍우를 당할 때 우리는 지체 없이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잠잠케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이것은 폭풍 앞에서 겁을 먹은 제자들을 '겁장이들이라고 꾸짖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 아직도 두려워하느냐는 뜻입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직면한 폭풍은 예수님께도 그대로 다가왔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인생행로에 폭풍이 닥칠 때 역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도 그 폭풍을 함께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시련과 위험의 순간에 주님의 도움을 요청할 때 그 응답은 지체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함께 계시는 항해는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만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