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초교리 ㅡ13
불교의 성지 4 죽림정사
나머지 4대 성지로 부저님과 인연이 많은 곳입니다.
⑤ 왕사성(라즈기르) 죽림정사
라즈기르의 옛 이름은 라자그리하, 우리에게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한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 재세 시 라자그리하는 북인도 지역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였다. 동시에 북인도 일원에서 가장 큰 도시가운데 하나였다. 새로운 문물과 사상들이 라자그리하에 모였고 수많은 수행자들이 명성을 떨쳤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행자 시절 첫 스승이었던 알라라깔라마와 헤어진 후 새로운 스승을 찾아 온 곳도 바로 라자그리하였다.
당시 마가다국을 다스리던 빔비사라왕은 첫 눈에 싯다르타가 여느 수행자와는 다름을 알아봤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나라 전부를 주겠다며 자신의 곁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싯다르타의 관심이 아님을 안 빔비사라왕은 “깨달음을 성취 한 후 가장 먼저 이 도시를 찾아와 제일 먼저 깨우침을 달라” 청했다. 이 인연은 이후 37년간 이어지며 라자그리하는 수많은 법이 설해진 도시이자 교화와 교단 성장의 든든한 터전이 되어주었다.
성도하신 첫 해 부처님께서는 약속대로 라자그리하를 방문하셨다.
부처님께 귀의한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수 있도록 성 북문 밖에 있던 울창한 대나무 숲, 죽림을 보시했다. 바로 교단 최초의 도량 죽림정사였다. 죽림정사와 함께 부처님께서 즐겨 머무시며 법화경 등 수많은 설법을 하신 영취산도 라자그리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죽림정사는 붓다가 그의 수제자였던 사리불과 목련존자를 만난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라즈기르에서 250명의 제자를 이끌고 있던, 6사외도 중의 한 사람인 산자야의 제자였다.
어느 날 사리불은 붓다의 제자 아사지(사르나트에서 귀의한 최초 5비구 중의 하나)이 단정하고 위의 있게 탁발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속한 곳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아사지에게 다가가 그의 스승이 누구이며 그 가르침은 어떤 것인가를 물었다. 이미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던 아사지는 자신의 스승이 붓다이고 아직 붓다의 제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가르침을 요령 있게 전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하지만 사리불은 설사 불완전하더라도 그 내용을 듣고 싶다며 계속해서 졸랐다. 이에 아사지는 다음의 게송으로 사리풋트라의 질문에 답했다.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생기고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사라진다.
만일 누가 있어 이 법을 깨달으면
그는 곧 참된 도를 얻은 사람이라 말하리라.
게송을 들은 사리불 곧 혜안을 얻었다. 그는 그 기쁨을 동료이자 도반이었던 목련에게 설명해 감복을 시키고는 250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가 귀의했다. 이 광경을 본 산자야는 분을 참지 못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들 250 비구의 귀의는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로 인하여 우루벨라에서 귀의한 카샤파 형제들의 무리 1000명과 합해 1250 대중이라는 승가의 기본적 숫자가 완결됐기 때문이다. 훗날 코살라국 사위성에 기원정사를 지어 붓다에게 헌납한 수닷타 장자를 만난 곳도 이곳으로 죽림정사는 붓다의 일생에서 많은 부분을 함께 한 성지 중의 성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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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정사
나란다 대학의 유적지가 있다. 서기 500년경에 세워진 세계 최초, 세계 최대의 불교대학이란 기록을 남긴 곳이다. 유식불교의 창시자라로 알려진 무착(無着, Asanga)과 그의 동생이었던 세친(世親, Vasubandhu)가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알려진 뒤로 이 절은 세계 각국에서 온 학승들이 모이는 대학촌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이 7세기 초에 이곳을 찾았을 때 이곳이 인도불교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현장 자신도 이곳에서 5년 동안 수학하였다. 세계 역사상 이곳이 최고(最古)의 대학촌이었다. 그리하여 후세에는 절 이름보다 대학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성기였던 6~7세기에 만여 명의 학승들이 모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교수진들이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세계 최고(最高)의 대학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학에서 가르치던 학문 분야도 매우 넓어 불교뿐만 아니라 베다(Veda), 우파니샤드(Upanisad)), 논리학, 의학, 공학, 천문, 지리, 음악, 수학, 서화, 주술 등에 관한 강의도 있었다. 명실공이 종합대학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단 말이다. 매일 100여 강좌가 있었다 한다. 이 대학을 거쳐 가지 않으면 엘리트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달리 말하면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었다. 수많은 석학들이 배출됐다.
우리나라 신라에서도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慧超), 혜업(慧業),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등이 이곳에서 수학했다. 또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구려 출신 9명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나란다는 7세기까지 발전하다가 8세기에 들어오면서 굽타왕조의 몰락과 함께 힌두교의 득세로 인해 점점 쇠락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13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 장군이었던 무하마드(Muhamad)가 북인도를 침공해 왔을 때 파괴되고 말았다. 그 때 수많은 스님들이 살해 당했으며, 절이 모두 불탔는데 6개월 동안 불타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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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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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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