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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처럼 서두에 서신의 관례적 문안 인사가 없으나 끝부분(13: 22-25)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인다.
본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여러 인물을 추측한다.
동방에서는 대체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본서를 인용했다.
주후 200년경에 쓰인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다(교회사, 6.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유세비우스 자신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로마의 클레멘트가 번역하였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본 서신을 바울의 14권의 서신(목회서신 전에)중에 포함시켰다. 그 후 헬라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주후 397년 제3차 칼타고 회의는 신약정경 27권 목록을 선언하면서 바울의 13권의 서신을 열거한 후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포 회의(419년)와 후에 화란 신경은 바울의 14서신을 말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잘 모른다거나 저자가 바나바라는 견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을 저자로 보이는 것 같은 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 디모데에 대한 언급(13: 23)이나 또 바울 서신들과의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 예컨대 1: 4 (빌 2: 9), 2: 2 (갈 3: 19), 2: 10 (롬 11: 36), 7: 18 (롬 8: 3), 7: 27 (엡 5: 2), 10: 33 (고전 4: 9), 11: 13 (엡 2: 19), 12: 22 (갈 4: 25-26), 13: 5 (딤전 3: 3; 6: 7-8) 등이 그러하다.
본 서신의 서두에 바울 자신의 이름을 언급치 않은 것이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밝히 입증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이 바울 저작의 반대되는 증거로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사상의 일치성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바나바나 누가, 아볼로 같은 사람들로 추측하기도 한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예루살렘 부근의 유대인들 -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이었고, 저작 연대는 주후 67년경, 즉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아직 성전이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본 서신에서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언급에 현재시제의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8: 4, 13. 9: 4-5, 9. 10: 1, 8, 11. 13: 10-11).
본서의 특징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이다. 본서는 구약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고 폐지되었음을 밝히 증거 한다.
* 히 7: 18 -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히 8: 13 -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신약 아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13번 나온다(1: 4; 6: 9; 7: 7,19,22; 8: 6,6; 9: 23; 10: 34; 11: 16,35,40; 12: 24).
히브리서의 진리는 신약성경의 진리, 특히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 롬 7: 6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 고후 3: 9, 11 -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골 2: 16-17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우리 모두는 좌절과 장애물, 유혹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항상 평탄한 길만이 아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에 도움을 준다.
먼저 함정과 위기를 올바로 인식하게 하고 다음으로 신앙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한다. 다시 말하면 경기 중의 선수들에게 휴식 시간을 통하여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들에게 들려주는 격려와 같다.
따라서 본서는 믿음 가운데서 계속 전진하도록 용기를 주며, 또한 패배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위험에 대한 대안들에 대하여 알려주는 영양소와 같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강력한 논증을 찾도록 하자.
1. 기로에 서서
히브리서는 두 얼굴을 가졌다. 그 히브리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이중적이다. 자주 찾아가 기대고 싶은 구절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기에는 불편하게 하는 구절들이 너무 많아서 다만 ‘즐겨찾기’ 설정한 몇 곳만 방문하고 떠난다.
흥미로우면서도 따분하다. 따뜻하면서도 차갑다.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으로 고난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약함을 체휼하시고 돌봐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무려 여섯 번이나 지금 그 자리에 안주하거나 뒤로 물러난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시는 음성도 들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련의 시간을 거친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도 만나지만, 세상과 타협하고 싶어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경고에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아서 결국 안식에 이르지 못한 불행한 역사도 만나야 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연속성도 있지만 불연속성도 있다. 구원의 확신과 회의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한다. 무엇이 히브리서를 이런 이중성이 아니면 안 되게 하였을까?
이는 히브리서가 ‘기로(岐路)에 서 있는 자’를 향한 설교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완전한 데 나아갈 수도 있고 물러나 파선(破船)할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앞에 있는 고난의 잔을 마실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대신에 세상이 주는 편리와 풍요의 잔을 마실 수도 있었다.
이름 모를 저자는 박해 중인 이 이름 모를 공동체에게(아마 로마의 대화재 이후 네로에게 고난을 당하던 로마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교회) 위로와 경고의 이중주(二重奏)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복과 저주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과 다르지 않다.
둘은 뗄 수 없는 하나님의 한 성품을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인스턴트 복음에 길들여진 우리의 구미에 맞게 손쉬운 것만 취하고, 오금이 저리는 경고에 대해서는 실제로는 효력이 없는 공갈 협박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산뜻한 교리를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하기보다는 있는 대로의 경고와 있는 대로의 위로를 같이 받아야 한다.
1] 히브리서란 이름
히브리서는 목회서신에 들어있지만, 서간이라기보다는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다. 서간은 보통 누가 누구에게 이 편지를 띄운다는 인사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개진하는 본문, 그리고 축복과 안부 인사를 동반한 맺음말로 구성되는데, 히브리서는 끝맺는 부분에서만 서신 형식을 띠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서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통적으로 바울 사도의 서신으로 분류됐고,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히브리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하려고 쓰였다는 생각에서 ‘히브리서’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2] 기록자
다른 바울의 서신과는 달리 누가 썼다는 말이 첫머리에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저자로 거론되어 왔다. 바울 사도가 썼다고 보기에는 문체도 다르고,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도 디모데, 고린도에서 천막 일을 하며 바울을 도운 브리스길라, 바울의 동역자인 에바브라와 실라 등의 인물들이 저자라고 제안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확증이 없다.
3] 기록 연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95-96년경에 쓰여진 클레멘스 1서에 히브리서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95년경에는 쓰여졌을 것이다. 또한 구원의 말씀이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을 거쳐 전달되었다는 내용(2, 3)으로 보아, 60년 이전에 집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60-95년의 어느 시기에 집필되었다고 추정한다. 12: 1 이하에 언급된 시련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0년) 때 일어난 그리스도인 대박해를 가리킨다고 보아서, 80-9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4] 목적
12: 1 이하에 언급된 시련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0년) 때 일어난 그리스도인 대박해를 가리킨다고 보면, 박해로 불안해하며 배교의 위기를 겪는 이들의 믿음을 북돋워 주기 위해 쓰여졌다고 본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연륜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모임에 자주 빠지고 선행과 봉사 생활에서 멀어지는 등 나태한 신앙행태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고 있다.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귀를 기울여 순종하도록 촉구하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 드러난 구원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새로운 약속을 일깨운다.
그럼으로써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신앙을 간직한 채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 나가도록 이끌고 있다.
2. 구조
히브리서의 장르와 내용은 그 구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서신의 성격도 있지만 시종일관 주해(구약 본문)와 적용이 반복되는 패턴은 이것이 서신의 성격을 띤 설교임을 보여준다.
1] 도입 ( 1: 1-4 )
2] 본론 ( 1: 5 - 13: 19 )
(1) 예수, 하나님의 아들 & 대제사장 ( 1: 5 – 10: 26 )
① 하나님의 아들 예수 ( 1: 5 – 4: 16 )
ⓐ 영광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 1: 5 – 2: 4 )
ⓑ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 2: 5 – 4: 16 )
② 새 언약의 대제사장 예수 ( 5: 1 – 10: 39 )
ⓐ 대제사장인 예수의 우월성 I ( 5: 1 – 6: 20 )
ⓑ 대제사장인 예수의 우월성 II ( 7: 1 – 10: 39 )
(2) 권면 ( 11: 1 – 13: 19 )
① 권면의 원리 ( 11장 )
② 권면 ( 12: 1 – 13: 19 )
3] 맺음말 : 문안 ( 13: 20-25 )
저자는 하나님 말씀의 현현(顯現)으로서 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한다(1:1-4). 이어서 본론(1: 5 – 10: 16)에서는 이 예수님의 두 역할을 소개한다. 1: 5 – 4: 16까지는 하나님의 천사보다 더 영광스런 아들이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5: 1 – 10: 26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대제사장이자 친히 희생제물이 대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이것이 독자들에게는 소망의 근거이자 자신의 선 자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었다. 11: 1 – 13: 19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들면서(11장) 소개한 후 구체적으로 그 믿음을 고난 중에 있는 공동체에게 적용하고 있다(12: 1 – 13: 19).
3. 주요 메시지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와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와 교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소개한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내와 소망의 근거는 바로 이 예수님뿐이시다.
1] 기독론
기로에선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하는 예수님도 이중적인 분이다. 그는 예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강조한다. 그는 천사보다, 모세보다, 아론보다, 여호수아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공간에 매인 분이 아니라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이다. 그는 시간에 매인 분이 아니라, 창조부터 성육신과 재림까지 온 역사 내내 하나님의 계시로서 활동하셨고 또 그 계시를 성취하신 분이다. 그러니 그는 이 땅에서 지금 고난을 받는 자들의 피난처요 도움이요, 소망의 원천이 되실 수 있다.
옛 언약에서 자유롭게 하신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 사셨기에,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또 도우실 수 있다.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우리의 약함을 체휼하실 수 있는 분이니 더욱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이다.
2] 제자도
청중들은 지금 밖으로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협박을 받고 안으로는 유대교로 회귀하라는 회유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는 뒤로 물러나지 말고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주(pioneer)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또 이미 대제사장이시며 희생제물이 되시어 구약의 모든 제도를 완성하신 예수님이 계시니 다시는 유대교로 돌아가서 언약의 피를 부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약속을 의지했던 믿음의 신진들처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살라고 권고한다.
4. 우리 시대에 주는 의미
우리 역시 안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윤리적인 타락과 중세를 연상시키는 교권주의, 율법적인 삶으로부터, 밖으로는 물질주의와 ‘네 맘대로 하세요’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협공을 받고 있다.
이런 타협과 변절의 시대에 이 히브리서가 들려주는 ‘위로와 경고’의 이중주는 여전히 우리의 시선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향하도록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