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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광야 40년:훈련
훈련:
훈련은 고달프지만 유익하다. 삶의 현장에서 미리 해 둔 훈련은 어느 때고 특히 막다른 절박한 현실에 처한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처방이다. 끊임없이 육체,정신, 나아가 영성 훈련을 받는 사람이 씩씩하고 강단 있는 삶과 신앙을 할 수 있다.
지혜의 씨앗:
행군 준비
인구 조사:
시나이 산 산을 출발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인구 조사를 한다. 즉 숫자를 센다. 이는 현재 공동체 상황 또는 상태 이런 것들을 점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열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조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종족이 수를 셀만큼 아주 많아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본문에 드러난 인구수 장정과 603,550명인데 이 숫자는 상당히 과장된 숫자라고 학자들은 한다. 1-2장은 행군을 인도할 지도자와 장정수와 행진 순서를 전한다. 2장부터 6장까지는 경신례 임무를 맡은 지파에 대해서 더욱 길게 많이 할애한다. 이것은 마치 레위기의 구조가 앞에 첫 장부터 경신례로 시작하여 17장 성결법으로 이어지는 순서와도 같다. 본문을 편집한 집단)지파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광야에서 불평불만
백성의 불평불만:
하느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끄신다.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 양식으로 먹이시고 물을 먹여 주신다. 입혀 주시고 재워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걸핏하면 불평불만을 한다. 이렇듯 광야는 이름하여 ‘반항의 장소’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기록한 탈출기 15-17장, 민수기 11-17장에서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이 행군을 시작한 이들의 불평과 불만 반항이다.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불평불만을 하고 살 것인가, 감사하고 살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한번 들여다 보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막 광야에 들어서자 마자 그들은 불평과 불만을 쏟아낸다.
“누가 우리에게 고개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당해서 공짜로 먹던 생선, 오이, 수박, 부추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는 기운이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만 나쁜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여기서 본문 내용이 재미있다. 생선, 오이, 수박, 부추, 파, 마늘.. 그냥 ‘맛있는 음식과 향신료’가 생각난다고 하면 될 것을 뭐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다 열거하고 표현하는가? 아마 독자들은 유치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아와 배고픔의 극한 상황에 있어본 사람은 이 표현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필자가 군 시절에 받은 해군 장교 훈련에는 일주일간 굶기는 주관인 지옥주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이 성경 말씀 그대로였다. 생선도 떠오르고 우리도 떠오르고, 수박도 떠오르고, 먹어 본 것마다 다 떠올랐다. 그러니 성경의 표현은 아주 실제적인 묘사다,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표현할 수가 없다,
(“이 몸은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 차례나 치렀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지 ‘이 몸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날 거다. 총알이 내 몸의 어는 곳을 스쳐도 나를 다치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말이야. ....춘성, 스스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죽지 않아.”라고 하던 노병 라오취안이 참호 밖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등짝에 총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참호밖에는 수많은 아군이 죽어 있고 죽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하다. 죽어버린) 라오취안의 몸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춘성이 혀끝으로 입술을 햝으며 말했다.
“*다빙을 먹고 싶어요”
*다빙:밀가루를 반죽하여 크고 둥글게 구운 떡으로 중국 북방의 주식 중 하나다.이 지경에 이르면 죽고 사는 문제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네. 죽기 전에 ‘다빙’이라고 실컷 먹으면 그것으로 족한 거지. 춘성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어. 나는 총알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네. “어쩌면 밖에 다빙이 있을지 몰라요. 가서 찾아볼게요.”춘성은 참호 밖으로 기어 나갔고,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네. 어차피 정오가 되기 전에 모두 죽어 나자빠질 텐데, 정말 다빙을 먹을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나는 그가 맥없이 축 늘어진 몸으로 시체 위를 넘어 다니는 모습을 지켜 보았지.....위화, 인생, 105p)
정찰대의 보고 특히 거인 나필족을 보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동요하며 모세에게 아우성쳤다.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이 광야에서라도 죽어 버렸으면!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 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시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였다.(민수 14,1-3).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의 불평불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실까? 딱 두 가지다. 어떤 불평 불만은 들어 주시고 어떤 불평불만은 들어주지 않으신다.
모세의 하소연:
60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여정 행군을 시작하자마자 백성들이 먹을 것을 앞세워 불평하였다. 주님은 진노하시고 모세도 불감당 짐을 혼자지기 무겁다고 하소연하였다. 주님께서 응답하셨다. “백성의 원로이며 관리로 알고 있는 잇라엘 원로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일흔 명을 불러 모아라....너의 영을 덜어 내러 그들에게 나누어 주겠다. 그들이 이 백성을 너와 함께 짊어져서 네가 혼자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민수11,16-17). 주님께서 원로 70명을 세워주셨다. 이 본문은 원로들이 제기한 것이 아니라 초권위와 권력을 가진 지도자 모세가 먼저 나서고 있다. 대단히 복음적이고 합리적인 지도력이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모세의 리더쉽이 탁월하게 빛나는 본문이다.
미르얌과 아론의 비방: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그 에티오피아 여자 때문에 모세를 비방하였다.(민수 12,1)
미르얌은 누구인가? 모세의 누이로 강물에 버려져 죽을 뻔한 아기 모세의 목숨을 살려 낸 생명의 은인이다. 천하의 모세지만 누이가 없었더라면 세상과 역사에 존재하지도 못할 뻔했다. 그런데 이제 성인이 된 처지에서 모세가 계속 혼자 잘 나가고 있으니 미르얌은 아론과 합세하여 모세를 비방하며 도전한다.
모세, 내가 내 누이다.
모세, 네가 막 태어나 파라오의 명령으로 강물에 버려져 죽음에 처했을 때
우리 어머니를 도와 살려 낸 것이 나였다.
모세 내가 내 코를 닦아 줬고,
내가 네 꼬치를 가려 줬다.
이집트에 60만 백성을 이끌고 나올 때
아론과 네가 남자들을 이끌듯이
자매들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나였지 않느냐?
모세, 주님은 너에게처럼 나에게도 몸소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런 나에게 네가 어찌 나에게 가라 말라 하며 군림할 수 있느냐?
......
모세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성경 본문에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하였다”(민수 12,1). 본문에는 당시 사회환경을 예외로 하며 서열이나 장자였던 아론 보다 미르얌 이름이 앞서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세 권위에 대한 불평과 도전 사건의 주동자가 아론이 아닌 미리암임을 제시하는 신학적 구조적 제시다. 또한 ’비방하다‘(12,1)란 동사도 여성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아론은 덩달아 미리암에게 낚여 따라나섰고 미리암이 이 일의 주동자란 것이다.(이것은 또한 편집자의 신학적 문학적 의도이지 않겠는가? 감히 여자가....모세에게? 그러니 일찌감치 여자를.)
여기서 에티오피아 여자는 하나의 트집거리일 뿐 본격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주님께서 너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민수 12,2)
사실 미르얌은 예언자였고,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위대한 공동 지도자였다(탈출 15,20-21 참조). 이러한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독점한 지도력과 영적 정신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자신들도 모세를 위치에 설 만큼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와 동등한 대우와 지도력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우선 가족의 일원으로서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이 그렇게 부추겼을 것이다. 또 나름대로 하느님과 깊은 관계에서 활동하던 그들은 나이로 보나, 그동안의 역량과 위상으로 보나. 영성으로 나이로 보나 모세의 지시를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을 일이었다.
미르얌과 아론이 도전한 권위의 영역은 무엇이었을까? 행정인가? 행정 차원은 이미 70 원로 선발로 기본 정리가 되었다.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미르얌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예언자 권위‘이다. 본문은 세련된 주제와 문장으로 예언직 권위에 도전으로 정리하지만, 사실 모세 시대 예언자 권위는 입법 사법 행정 종교를 아우르는 통합적 권위였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에서 조직의 각 분야를 체계적으로 분화 조직화하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미르얌과 아론의 도전에 하느님의 판결과 말씀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너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으면, 나 주님이 환시 속에서 나 자신을 그에게 알리고 꿈속에서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에 충실히 막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와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민수 12,6-8)
이 일로 하느님은 미리암을 꾸짖고 문둥병으로 치신다.( 남자 형제 아론과 둘이 공모하고 저질렀지만, 벌은 미르얌 혼자 받는다. 왜? 그러나 아론은 경신례를 봉헌할 대사제이므로 아껴서?(민수3,1-4). 같은 인간과 여성의 입장에서 부당하다 생각된다. 그것도 천벌 문둥병으로...간단한 이 본문, 인류의 역사에서 남녀 성 기준과 경신례 역사에서 이 본문이 미치는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미르얌의 천형 문둥병은 아론이 모세에게 청하고 천하의 모세가 중재에 나서니 이번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회복시켜 원위치 시켜 주셨다.
그러나 미리암은 탈출과 광야 여정에서 위대한 예언자이며 지도자였으나 모세의 조연자이다. 아론도 예언자이지만 그것을 모세를 돕는 것이다.(탈출 7,1), 모세 권위에 능가할 자가 없다. 이렇게 광야 여정 공동체 조직 체계가 행정직-예언직 순으로 정리된다.
사제직 도전:
일흔명의 행정직 정리와 수위 예언직에 대한 정리가 일단락되자 사제권에 대한 도전 이야기가 나온다.
레위지파 레위의 증손이며 이츠하르 아들 크핫의 손자인 코라와(모세 작은아버지 이츠하르 아들로 친 사촌) 르우벤의 자손들인 엘리압의 아들 다탄과 아비람, 펠렛의 아들 온과 이들을 따르는 250명이 연대 행동에 나섰다. (민수 16,1-2). 이들은 공동체의 수장이며 이름난 사람들로 몰려와 말하였다.” 당신들은 너무하다. 온 공동체가 다 거룩하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계시는데, 어찌하여 당신들만 주님의 회중위에 군림하여 하오?“ ”우리도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민주적으로 가자“ 민수기 (16,3). 그들은 경신례 보조업무와 보조자가 아닌 빛나는 사제직에 도전한 것이다.(민수 16,10).
대사제직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위임되었다. 아론의 첫째 둘째 아들은 나답과 아비후였으나 시나이 광야에서 불경한 불로 제사를 드리다 벌받아 죽었다. 그들은 아들이 없었다. 사제직은 셋째 엘 아자르와 넷째 이타마르에게 이어졌고 대사제직은 셋째 아들 엘 아자르가 계승하였다. 엘아자르의 아들은 피느하스이다. 그런데 이런 위계질서에 레위지파 방계와 르우벤 지파 후손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주님은 이 사건을 엄격히 다스리신다. 지진을 일으켜 땅이 벌어지게 하고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신 것이다.(민수 16,27).
광야 왜 40년이 걸렸는가?:
광야 여정 40년 사실 가나안까지는 오래 걸리는 길이 아니다 그 거리는 짧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는가?
정탐꾼들의 보고를 참고할 수 있다. “거기에는 장대같이 키가 큰 거인 나필족이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너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 앞에 섰더니 꼭 우리가 메뚜기같이 보였습니다.”(민수 13,32-33).
그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편네 아들 칼렙이 나서서 반론을 펼친다.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야훼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 땅을 우리 땅입니다. 그들을 우리 밥입니다.”(민수 14,8-9)
정찰한 보고가 갈린다. 한쪽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보았고, 한쪽은 상대방을 밥으로 보았다. 얼마나 현격한 차이인가? 말하자면 여론조사 결과 두 명은 긍정적으로 대답했지만, 10명은 부정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이게 여론의 함정이다.
이로 인해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모세에게 들고 일어난다.
“왜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있는데 우리를 데리고 나와 지금이 모양이 꼴로 만들어 놓았어요. 이제 다 죽게 되지 않았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로 이집트로도 못 가게 됐잖아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민수 14,2-4)
주님께서는 진노하셔서 반항하는 이스라엘을 다 몰살시키겠다고, 흑사병에 걸려 죽게 만들어야 하겠다고 하신다( 민수 14,11-12).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청한다. “이런 징벌과 심판은 하느님 당신에게도 이스라엘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수 14,13-17).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래 내가 너의 말대로 용서하마! 다만. 몰살 대신에 이 백성들 가운데에서 데리고 갈 사람을 솎아내라. 그 사람만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라. 너희들이 40일 동안 정탐한 다음 고작 고따위 얘기를 했으니까,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단련을 좀 받게 하리라. 거기서 걸러진 사람들만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낼 것이다.“ 라고 하신다(민수 14,20-25).
이렇게 해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결정된다. 광야 체류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적 불평의 관점을 치유하기 위한 하느님의 처방이었다.
무지개 원리 비밀:정탐 사건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8,28).
필자가 ‘무지개 원리’를 착안한 것은 ‘정탐 사건’ 교훈 덕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직행할 수 있는 것을,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돌아가게 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이 필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무지개 원리’의 첫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이며, 전제 기조 정신은 비전과 희망과 꿈이다. 이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행복을 이루고 성공을 이루게 된다는 법칙을 무지게 원리가 체계화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무지개 원리를 이야기하고 다니는 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생겼다. 우리 국민들에게 행복과 성공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더니, 교회 안에서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필자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성직자가 되어서 맨날 세상의 행복과 성공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하면서.
이 대목에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필자는 행복하게 살고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을 세상의 관점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돈 많이 버는 곳 권력을 가지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자는 진짜 성공이 무엇인지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에서 발견해 보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사람들이 눈을 뜨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래서 ‘긍정 운동’을 한 것이다.
필자도 옛날에 똑똑했던 시절이 있었다. 비판 운동을 할 때였다. 그 당시 필자 눈에도 아주 못된 것들이 많이 보였다. ‘나라도 못 듣고 교회도 못 듣고 사람도 못 듣고 모든 것이 못돼 보였다. 그래서 다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대안’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었다. 주님께서는 부정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과는 위대한 변화를 꾀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지 않으신다.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하고 일하기를 좋아하신다.
‘긍정의 학교 40년 광야 생활’ 모두 다 합쳐서 결국 이 생활은 긍정의 학교 수업이었다. 주님께서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까지 광야를 뺑뺑 돌게 하셨다. 이 40년의 광야 생활 동안 무엇이 계속 나왔는가? 끊임없이 불평불만이 나왔다. 이에 따른 에피소드들도 반복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 긍정의 학교로 졸업한 사람들은, 나중에 긍정의 사고방식을 형성하게 된다. 지나가고 나면 불평불만이 가져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오히려 긍정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탐꾼 보고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긍정적인 의견과 부정적인 의견이 서로 엇갈렸을 때,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8,28)
긍정적으로 말한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결과를 맛보게 해 주고, 부정적으로 말한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결과를 맛보게 해 주겠다는 말이다. 실제로 못 들어간다고 한 사람은 못 들어가게 만드셨다. 기가 막히게도 들어간다고 한 사람들만, 나중까지 남겨져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사람의 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에 힘이 있다. 입삽이 고살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마르 11.26)으로 이 가르침을 소환하여 재교육하셨다. ‘저주 하는 하느님이라니!’ 사실 무화과 나무 저주는 문자 그대로 볼 때, 예수님은 구세주 하느님으로서, 금도를 넘어 패륜적 발언을 하시고 있다고 보인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저주 후, 성전으로 가셔서 정화 작업을 하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그 무화과나무 근처를 지나간다. 무화과나무는 뿌리째 말라 죽어있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스승님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비틀어 죽어 버렸습니다.”(마르코 11,21)라고 한다.
예수님의 답변을 주목해 보라! 사실 문맥상이라면 “잘들어라 너희도 만일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요 꼴이 되리라” 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 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코 11,22-24)
이것은 풀어 말하면 이런 말일 것이다. 너희가 하느님 믿음에서, 곧 하느님이 분명히 도와주신다는 전제 안에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 그대로 되리라. 이것은 민수기 14장 28절과 직통하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내 귀에다 대고 들려준 대로 그대로 되리라.”(민수 14,28).
믿음은 미치는 것이다.
믿음을 믿자
그것이 꿈이든, 그것이 말씀이든, 그것이 믿음이든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면 반드시 그대로 되리니
믿음으로 꿈꾸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동하자
믿음을 믿자
믿음의 힘을 믿자.
모세의 만용: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민수기 20장 11-12)
가나안 땅 정탐 사건이 광야 생활 초기에 있었다면, 지금 모세 만용, 이 사건은 카데스 광야에서 목마름을 불평하는 말기쯤에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성들이 또 마실 물을 불평하니까 모세는 주님께 가서 방법을 알아낸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너희 형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민수 20,8).
그런데 이번에 모세는 하느님께서 시키지 않은 돌발 행동을 한다. 하느님 명령에 없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이나 치고 그다음 백성에게도 “이 반역자들아, 이 바위에서 물을 나오게 해 주랴?”라고 한다. 성경에서 지팡이는 위임된 권위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모세는 위임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아닌 자신의 권위를 드러낸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말씀이 왜 중요한지 모른다.
그 안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죄다 말씀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말씀이 하느님이다.
말씀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다.
아하! 말씀이 예수님이다.
훈련:
과학자들은 편안한 삶이 생명을 연장시키는지 아니면 단축시키는지에 관하여 하나의 특별한 실험을 하였다. 먼저 동물을 두 그룹으로 불어 나누었다. 한 그룹의 동물을 아주 좋은 환경에서 충분한 먹이를 주며 편안히 살도록 했다. 그리고 약간의 음식만 주었다고 한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놀랍게도 좋은 환경에서 살았던 동물들이 먼저 병들기 시작하여 더 빨리 죽었다 생에 대한 의욕과 기운이 없어진 탓이다. 적당한 고통과 고난은 어쩌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더 강하게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고통과 고난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살아가는데 덜 힘들지 않을까?
구리 뱀 사건:
드디어 광야 38년이 거의 끝나간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불평불만을 터뜨린다. 주님께서는 이번에 아주 센 처방을 내리신다 바로 ‘뱀 사건’이다. 불평불만자에게 불뱀을 보내 물려죽게 하신 것이다. 납작 엎드린 백성을 위해 모세가 이번에도 나서서 중재를 전개하였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려 주셨다. “구리 뱀을 장대 높이 올려라 구리 뱀을 올려라 그리고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민수 21,8)
처방치고 참 재미있다. 왜 장대 높이 구리 뱀을 올리라고 하셨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순명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곧 주님의 명령을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려도 순명하면 산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말이 안 되는 처방을 내렸으니, 사람들이 “야, 그거 쳐다본다고 났냐? 먹을 약을 주든지, 바를 연고를 주든지 해야지. 그게 뭐야?” 라고 생각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거라도 하나면 죽게 되었으니 어찌 됐든 쳐다보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쳐다본 사람은 살았다. 말씀대로 행했더니 살아난 것이다. 바로 이를 깨달으라는 조치였던 것이다.
둘째,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성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장대 매달린 구리 뱀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야 했다 .사실 이들이 불평불만 하게 된 것은 세상 즉 땅만 쳐다보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기도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자꾸 땅만 바라보고 사니 불평불만만 쌓이는 것이다. 높이 올려다보는 그 시선의 끄트머리에서 바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나지 않겠는가!
요약해 보자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명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난다.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며 순명하고 살아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보자 우리 신앙생활은 과연 모든 것이 합리적인가 대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사는가? 또 성경에 있는 말씀을 다 이해하고 사는가? 이 역시 대답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해가 안 되어도 살아가다 보면 시간이 지나간 뒤에 ‘아, 그 말이 맞았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운 삶이 되고 축복의 삶이 된다. 또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하늘을 쳐다봐야 한다.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803/AM 10:21
출처:차동엽, 행복코드 1 (꿈의 성취를 통하여); 위즈앤 비즈,205-225p.
<덧붙임: 일부 편집된 내용입니다. 원문은 직접 꼭 신부님 책을보세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