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스물여섯 살 때 이백 자 원고지 이백 장 분량으로 석사학위논문을 냈다. 80년대를 아직 다 빠져나오지 못한 때라 인쇄기술이 오늘 같지 않게 거칠었지만 일단 책이랍시고 묶어놓으니 아무 까닭이 없이도 마음이 뿌듯했다. 그 뒤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면서 매학기 이백 자 칠팔십 장짜리 논문을 곧잘 썼다. 내용이야 시시껄렁해도 어엿하게 활자로 박아놓으면 사랑스러워 보이는 맛을 나는 그때그때 보았다.
박사학위 공부를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서면서 이제는 논문 몇 편이 아니라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교수를 뽑는데 논문과 더불어 저서를 구비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아서였지만, 그보다는 언제부터인가 논문을 쓰려면 거부반응이 왔기 때문이다. 각주를 달고 참고문헌을 찾고 하는 따위 과정을 꼼꼼히 새기다 보면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는 느낌이 들었다. 객관성을 좇는 글쓰기에 진력이 난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주제를 다루고 내 개성과 감성을 그럭저럭 살려주는 글쓰기가 가능한 개인 저서를 택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놓인 책들을 죽 훑어보아도 그다지 빼어나거나 놀랄 만한 것을 보기 힘들다는, 주제넘은 판단이 자만심인지 자신감인지를 내게 심어 준 것이 또 다른 이유라면 이유였다.
책은 논문과 달랐다. 우선 분량이 적어도 천 장은 넘어가니, 쓰는 과정은 괴롭더라도 성취감이 더 컸다. 논문은 도서관에만 꽂히지만 책은 서점에 뿌려져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간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이 쓴 책을 많은 이가 즐겨 읽을 확률은 적은 것이 아니라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어쨌든 첫 번째 거사 결과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라는, 불필요하게 긴 제목을 가진 책과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수필집이었다. 앞 책은 한국현대소설 50편을 각각 원고지 이삼십 장 분량으로 짧게 평하여 엮은 것이고, 다음 것은 말 그대로 수필 몇 편을 모은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생애 첫 저서를 앞에 두고 그저 감격에 들떠있는데 옆엣사람이 귀띔하기에 다시 훑어보니 책 꼴이 영 아니었다. 만화방 구석에 처박힌 무협지같이 조잡한 글자체며 표지며 종이며 인쇄 상태가 반짝 눈에 들어왔다. 원래 책이란 초고(草稿)를 알맞은 인쇄형태로 재편집하여 인쇄하고 글다듬기를 거쳐 낸다. 돈을 미리 받아 챙긴 출판업자가 편집 과정을 생략하고 내가 넘긴 한글 디스켓을 그냥 그대로 복사해서 저질스런 종이에 박아 내놓았던 것이었다. 돈을 미리 전부 달라고 했을 때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지인이 소개한 사람이고 마침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자라 하여 군말 없이 돈을 부쳤던 것이었다. 사기를 당한 셈이었고, 속이 뒤집혔다.
더 큰 문제는 책 내용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 다시 들여다보니 여기저기 오자와 탈자가 넘치고 말이 안 되는 문장이 열손가락으로는 다 셀 수 없었다. 작품을 해석하고 평한 식견은 오류에 가깝도록 좁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뜻하지 않은 변란까지 터졌다. 이 책들을 나는 대학 스승님 두 분께만 감히 드렸는데(물론 오류를 알아채기 전에) 한 스승님께서 이 실패작을 K대학 도서관에 기증해버리셨다. 엎친 데 덮친 격이요 설상가상이었고, 이 책을 학생들이 행여 읽는다 생각하니 나는 스스로 창피하여 자다가 깼다. 대학도서관에 숨어들어 이것들을 화장실로 몰래 끌고 가 분서갱유해버리리라 마음먹었지만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 2012년 현재도 책이 서가에 꽂혀 있다. 생각만 하면 밥맛이 떨어진다.
실수를 만회해야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원고를 전면에서 다시 썼다. 육 개월 가량 고심을 기울이니 뿌리는 물론 같되, 조금은 다른 문장 다른 글이 되었다. 이곳 저것 쑤시고 다니며 알아보니 어떤 출판사가 나섰다. 그래 ‘다시 읽는 한국현대소설’, ‘여름성경학교’로 이름을 바꿔 새로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고 새로 용기가 솟는 듯도 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또 다시 살피니 문장이고 내용이고 여전히 개차반이었다. 황당했다. 몇 번을 보고 또 보고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확신했건만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도서관에 꽂힌 그 많은 책들을 새삼 다시 쳐다보며, 나같이 설익은 이가 책을 쓰니 이 모양인지 아니면 사람이 책을 써낸다는 행위 자체가 원래 이런 한계와 결함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글쓴이가 덜떨어져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책이란 아무나 함부로 써내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이 미련한 자는 일생에 딱 한 권만 책을 쓰는 것이 효율성 있고 정당하리라는 생각도 떠올렸다.
한편,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는 나보다 더 엉터리인 책이 있기는 있다. 번역서가 대부분 그렇다. 번역저자들은 해당 외국어에는 능통하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깡통이다. 이게 문제다. 그러다 보니 외국 식 문구를 그대로 직역하여 문장흐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고, 독자가 뜻을 아는데 한참 걸리기 십상이고 아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내 생활 주변에서 예들 들자면, K대학에는 글쓰기 강의 교재로 쓰는 ‘우리 시대의 글쓰기’라는 책이다. 이게 여간 놀랍지 않다. 이 책은 K대학 국문학과 교수 가운데 세 명이 나서서 이 개월 만에 지어낸 교과서다. 그런데 이게 과연 국문학과 교수들이 지은 책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엉터리다. 전체 내용을 여덟 개 장으로 나누고 이론 설명과 연습문제를 붙여 놓았는데 내용이 지극히 부실한 것은 둘째 치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깨달게 해 주었다.’라든지 ‘정의로부터의 예외’ 같은 외국말투에 찌든 문장이 바탕으로 깔려 있고 ‘대학 교육의 목적은 학문의 깊은 이론을 배워 그 이론의 광범위한 응용 방법을 익히는 곳이다.’ 따위 앞뒤가 뒤틀어지고 어색한 문장이 곳곳에 흔하다.
하도 이상해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겨 한 학기를 두고 찬찬히 연구해보자 했다. 그렇게 한걸음 떨어져서 살펴보니 더 엉터리였다.
학과장을 맡고 있는 집필교수를 만나 따져 보았다. 그 자가 내뱉는 말이 여러 가지였다. 우선 집필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했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느냐 물었더니 학교 당국에 약속한 것이 있었느니 어쩌니 이상한 말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음에 한 말이 귀에 더 쏙 들어왔다. 교재란 개념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부족한 내용은 담당교수가 보충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책에 관한 상식과 관념에서 이 사람이 나와 많이 다르구나 하는 판단이 서면서, 교재란 여느 책과 달라 학생들이 수업을 전제로 미리 읽고 오는 책이요, 게다가 이 책은 글쓰기 교재이므로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써야 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이 자가 개념론만 하염없이 되풀이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도저히 이럴 수는 도저히 없다 여겼다. 오류내용을 조목조목 가려 바로잡고 작은 책자로 편집·인쇄하여 국문과 소속 사십여 명 교강사에게 돌렸다. 다들 묵묵 무반응이었다. 다만 몇몇 인사가 다음과 같이 자기주장을 드러냈다. 퍽 걸작이었다.
“책이란 원래 다 그래요.”
폭넓은 현실경험에서 비롯된 달관과 체념이 이 문장 속에 깃들어 있을지도 모를 터이다. 그렇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당시 내게는 자기 실수와 약점을 싸가지 없이 은폐하려는 무책임한 헛말로 들릴 뿐이었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담당교수가 그때마다 지적해주면 될 것이라며 ‘보강설명론’을 주창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 식견에 마주 하여서, 한 자 한 음절이라도 틀렸다면 깊이 뉘우치고 삼가 바로 고치는 것이 학자로서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요, 더욱이 학생들이 보는 책이 아니더냐 하는 원칙론을 들이대며 나는 버럭 성질을 부리고 말았다.
뭐 이런 집단이 다 있나. 이런 자들이 학생을 앞에 두고 문학이 어쩌니 인생이 어떠니 하면서 지저귀는 게 과연 올바르냐고 한동안 거품을 물며 이곳저곳에서 흥분했지만,
“책이란 원래 다 그래요.”
… 이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자(字)라도 고치겠다는 고집이 결단코 올바른 것이지만 사람이 원칙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세상 어느 공동체에서 원칙과 정도가 제대로 대접받는가. 책이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고 마음이고, 그 마음을 나무나 철에 박아 오래오래 남겨두는 것이지만, 현실과 목적과 원칙을 적당히 버무려 내는 게 말이고 글이고 책이라 여기면 그만이라고 다들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허접 같은 책 몇 권을 내고 혼자 기뻐한 것에도 결국 연구 실적을 쌓자는 불순한 목적이 끼어있었으니, 엉터리 교육자들을 내가 욕할 처지는 아닌 것이다. 다만, 그 엉터리 책을 교재로 끼고 한 학기를 지내야 하는 K대학 학생들이 나는 서글펐다.
첫댓글 아... 아찔하네요. 학문의 수호자라고 하실 수 있는 교수님들마저(몇몇 교수님들이겠지만) 책에 대해 저렇게 쉽게 생각하다니... 유럽의 어떤나라의 어떤저자는 탈고전에 3만번의 고치는 과정을 거친다는데 저건 너무 심하네요.
그나저나 교수님의 글을 읽다보니 제 자신도 꽤 비틀어진 글을 쓰고 있다는것을 새삼느낍니다. 반성해야겠어요.
그 말 들으니 나도 비틀어진 글을 쓰지않나 의심이 드네. 늘 반성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