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 方 廣 佛 華 嚴 經
본문
학인스님
참고자료
2, 장엄(莊嚴) (4) 사자좌의 장엄 1
其獅子座가 高廣妙好하니라
그 사자좌는 높고 넓으며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강설 ; 부처님을 사람가운데 사자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앉으신 자리가 곧 사자좌다. 부처님이 6년의 고행 끝에 마지막 7일 동안 선정에 들기 위해서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는데 무지몽매한 이 중생의 안목으로 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표현이다. 필자도 1993년경에 부다가야 부처님이 앉으셨던 그 자리에 가 보았다. 커다란 나무 밑에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다. 부처님은 그 바위위에다 풀을 뜯어서 깔고 앉으셨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사자좌인가. 하지만 설사 모래자갈밭에 그냥 앉으셨더라도 역시 이렇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열쇠는 곧 깨달음에 있다. 맹인이 35년 만에 드디어 눈을 뜨고 보니 온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고, 그렇게 존귀할 수가 없었다. 이 감동 이 충격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깔고 앉으셨던 풀도 이름 모를 잡초가 그날 이후로 길상초(吉祥草)로 승격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화엄경은 자신이 깨달았다는 환상 속에서 읽어야 맛이 더욱 진하게 우러난다.
오늘 49P
2, (4) 사자좌의 장엄이라
기사자좌其獅子座가 고광묘호高廣妙好하니라
어제 말씀드렸지만
이 사자좌라고 하는 것이
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자 가죽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사자 모양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사자가 가지고 있는 이치
사자가 가지고 있는 성리性理, 성품의 그런 이치를 관해보고
사자는 어떻습니까?
여러 백수百獸의 왕이라. 그죠?
네
사자는 백수의 왕이기 때문에
사자가 어릴 때는 다른 잡수들한테 잡아먹힐 수도 있고 이렇지만
한 1년만 커버리고 나면 사자가 한 3년만 크면
다른 것들이 백 년 먹은 여우도 범접을 못하거든.
이 사자좌라고 하는 것이 그냥
高廣妙好라
높고도 넓고 묘하고 아름답다
이래 해놨잖아요. 그죠?
이게 다 그런 뜻이야.
덕을 베풀어주고 이럴 때도
남한테 조금 해줬다고 생색을 바라가지고
2, (4) 사자좌의 장엄이라
오직 만중생들의 법을 위해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세상을 향해서 법을 펼쳤기 때문에
그 이치를 따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자라고 했고, 그죠?
사자좌라고 했고,
그 사자좌가 표효를 하고 사자후를 하니까
高廣妙好한다
이렇게 해놨잖아요?
의미가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한 번 내용을 읽어봅시다.
강설 ; 부처님을 사람 가운데 사자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앉으신 자리가 곧 사자좌이다.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 끝에 마지막 7일 동안 선정에 들기 위해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6년이 됐는지, 12년이 됐는지, 7일이 됐는지,
3년이 됐는지, 7년이 됐는지, 따질 것은 없다.
가설적으로 다 설명하시는 것이라. 이게 그죠?
이런 걸 가지고 글이 좀 덜 떨어져가지고,
모기 발톱 매니큐어 칠하듯이
세세하게 빨간 것 칠해라, 노란 것 칠해라,
그런 글자에 떨어져서는 되지도 않는다 이거죠.
글자는 다 방편 생멸법에서
이치를 설명한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매해가지고는 하나도 값진 것은 없다 이거야.
무지몽매한 이 중생의 안목으로 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표현이다. 필자도 1993년경에 부다가야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그 자리에 가 보았다. 커다란 나무 밑에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다. 부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다 풀을 뜯어서 깔고 앉으셨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사자좌인가. 하지만 설사 모래 자갈밭에 그냥 앉으셨더라도 역시 이렇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열쇠는 곧 깨달음에 있다.
바위 덩어리 하나 있다, 여기 부처님 앉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어요?
안된다.~
구화산九華山에 가면 지장보살님의 발자국이
막 세숫대야 만한 게 쿡~ 찍혀있거든.
지장보살 발자국 있잖아?
바위 이만하게 그려져 있다고
'아휴~거인이겠네...'
무슨 지장보살이 발자국을 찍었겠노...!
'지장보살의 발자취는 이와 같이
부처님의 발자취처럼 거룩하고 심오한 것이다.' 해야지.
거기에다 부처님 지문이 있나, 지장보살이 지문이 있나, 족문이 있나,
살피면 그거는 돌대가리다. 돌대가리
그거는 차라리 햇빛을 불어서 끄려고 하는 거와 똑같다.
촛불이나 꺼지지.
횃불이 어떻게 저 햇빛이 어떻게 바람 불어서 꺼지겠노.
그런 우리 한국 불교 대승의 정통성
이런 걸 한 번 생각해보면
그런 얄궂은 중간에 내가 왜 조금 전에
그래 비판하고 이런 얘기가 이어지느냐 하면
백암栢庵 성총性聰스님이라고
벽계碧溪 정심正心스님하고
벽송碧松 지엄智儼스님 하고
그분들이 선종의 맥을 실낱같이 이어오던
부용芙蓉 영관靈觀 禪師
그 밑에 서산西山 휴정休靜스님
그 다음 편양鞭羊 언기彦機 선사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한국종의 선종禪宗의 98프로가 우리 조계종이거든.
사실은 묻혀 있거든. 그 맥들이
그분들이 정해놓은 우리 선조가 정해놓은 교과서가 치문緇門
태고 보우 때문에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가져왔거든.
중흥조
그 다음에 서장書狀
임제종의 11대 종주 아니요. 그죠?
대혜大慧 종고宗杲
15대 누구죠?
고봉高峰 원묘原妙스님 선요禪要
도서都序는 화엄종 또 禪宗이라고도 할 수 있지.
황벽黃壁 스님 이쪽으로 문중으로 연결되는
규봉圭峯 종밀宗密 스님이 한국 교학의 모든 체계를 이루고 있거든.
규봉 종밀
규봉 종밀의 원각경이라든지
규봉 종밀스님이 선교양종禪敎兩宗을
禪 3종 또 뭐지?
敎 3종 그죠?
도서都序 할 때 나오잖아?
선 3종 교 3종을 회통시켜놓은 것
화엄종주 규봉 종밀의 都序
이거는 우리 사집四集 때 배우거든.
한 과목 또 뭐죠?
절요節要
절요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창했던
화엄종주 보조普照 국사國師 지눌知訥 스님
화엄경 핵심이 화엄절요거든. 절요
四集 때 배우는 것
그리고 선종이면 선종
교종이면 교종
선교양종이면 양종
이와같은 자기의 뿌리에 대한 피의 혈통이 내려가는 거에 대한
그게 제대로 안되니까
주체성이 안들어가 있으니까
시대 흐름을 따라가는 건 좋다 이거지.
그런데 본질은 잊지 말아야지.
그 많은 팔만대장경 중에서 가려 뽑은 화엄경 같은 것
그러다가 이제 사교四敎 올라가면 뭐 배웁니까?
기신론起信論
그것도 12대 선종의 맥락을 이어온 마명磨明스님에 기대어가지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세계적인 인물
세익스피어에 견주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원효元曉스님
한국이 나은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세종대왕보다 더 뛰어난 인물
원효 아니요. 원효
세종대왕도 중국 같은 데에 그렇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못미쳤거든.
지금도 원효는 일본이나 중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거든.
원효 이후로도 불교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경전을 가지고
그렇게 기신론 가지고
저기 장안사 뒤에 가면
척판암擲板庵이 있을 정도 아니에요. 그죠?
산 이름이 원효 때문에 하나 생겨졌잖아. 어디요?
천성산千聖山
천 명의 사람을 제도했다고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있어가지고
한국 불교에서 우렁차게 튀어 나와가지고 천 명의,
중국이라 이러면 중심인데
거기 사람들이 그 뛰어난 사람들이
천 명이 여기 와서 머리 꿇고
어떤 스님한테 내한테 와서 배우겠느냐고?
안그렇찮아요?
그 원효가 그렇게 아끼고 다듬고 했던
원효가 봤다 하면 그거는 확신을 가지고 봐도 괜찮은 책이거든.
뭐요?
기신론
그런데 그것 안 본다고
그게 교과목에 다~ 그것만 해도 정신이 없거든.
모든 대승불교의
인명론因明論이니 원인론原因論이니
백법명문론百法明門論이니 십이문론十二門論이니
아~주 많죠.
섭대승론攝大乘論이니 현양론顯揚論이니 장엄론莊嚴論이니
중관론中觀論이니 유식론唯識論이니
엄청 많찮아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와 같은 숱한 크고 작은 논서들이 그래 많음에도
강원 교육에서 번다로 딱 쳐내고
한 가지 논서만 딱 선택했잖아요?
기신론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라.
그게 안목이 있는 백암 성총스님이 다 만들어놓으셨거든.
왜 치문에 그것 나오지? 서문에?
백암 성총
그리고 기신론
금강경은 말할 것도 없고
조계의 원류 누구요?
육조 혜능스님
그 인연으로 해서
육조 혜능스님을 필두로 해서
우리의 조선의 왕사의 무학대사의 수제자
함허당涵虛堂 득통得通스님, 기허騎虛스님, 그죠?
함허스님께서 원각경소圓覺經疏라든지 기신론
함허스님이 여러가지
금강경오가해를 편집을 하게 되죠.
그리고 금강경 배운 이후는
육조 혜능스님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 뒤에 또 뭡니까?
능엄경 있잖아요?
능엄경 같은 경우는 참선하는 지침서로써 최고의 경전이거든.
작은 화엄경이라고 불려지는 능엄경
그걸 열 권 다 보느냐 말이야?
세세하게 강사도 가르쳐야 되고
한 6개월 동안 모지락스럽게
저녁에 논강하고, 아침에 논강하고, 또 청강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 피속에 그냥 능엄경이 흘러가도록 해야 되는데
그러면 다 열 권 안가르쳐주더라도 자기가 다 읽어야 되거든.
'제가 다 배우지는 못했지만 제가 이 부분 보고 있습니다.'
이래야 된다고
능엄경
또 그 다음에 뭐가 있죠?
원각경
규봉 종밀스님이 원각경에서 소식을 열었다 그러고
원각경은 또 작은 능엄경 아닙니까?
아주 십이보살장으로 해서
특히 우리 보는 무상게無常偈 같은 것
원각경에서 드디어 이제 대교大敎반 넘어오면
화엄경
이건 말 할 것도 없잖아. 지금
사자좌 하다가 얘기가 다른 데 쫙~ 갔다 왔습니다만
이와 같은 우리의 그 많은 팔만대장경 중에서
피치 못해 다 배워야 되지만
다 배울 수 없으니까 뭘 배우는 거에요?
그 과목만이라도, 그죠?
배워서 어디로 들어간다?
사교입선捨敎入禪해서
선방으로 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건 뭐 捨敎入禪이 아니고 무교무선無敎無禪이다. 무교무선
선도 없고 교도 없고
가슴 아픈 일이요.
여러분들은 그래 하지 말고
이제까지 못배웠던 것 이렇게 시간 나는 대로 한 번씩 슬슬 읽어보시고
부가 과목도 한 번 읽어보시고
모르면 내한테 물어도 보고
또 내가 모르는 거는 같이 토론도 해보고
어제 내가 스님한테 올라가니까 스님이
"이것 한 번 봐봐.
책이 원문이 없고 여기까지 앞에는 원문이 있는데
어떤 스님이 하셨는데 참 잘 했지?
내가 접어놨는데 이거 한 번 봐 봐라. 내용이 어떻노?"
쭉 보니까
"어떻게 생각해?"
줄을 죽죽 그어놓으셨어.
"어! 스님 이건 좀 거꾸로 얘기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
"그렇지?"
스님도 이제 테스트 해보신 거라. ㅎㅎ
어떤 대목이냐 하면
가로 세로에 대해서 이제 얘기를 쭉 하고 있다.
'보시 바라밀을 가로로 하고 계율 바라밀을 세로로 한다.'
"이게 맞겠나...?"
그리고
'보시바라밀을 또 가로로 하고 인욕바라밀을 세로로 한다.'
"어떻게 생각해?"
"어! 이것 내용이 거꾸로 된 것 같은데요.
원문이 없어서 지금 번역문만 보고 있는데 원문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원문을 내가 떡~ 찾아서
소견을 베이식으로 깔고 있어야 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는 거는
보시바라밀이 이제 종縱이 되는 거야.
자! 한 번 전부 손 들어 봐요.
보시바라밀 손가락 딱 해가지고
縱
縱은 뭐라 하지?
세로
이 보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수행에 있어가지고 經이라.
경위서經緯書,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죠?
經. 경이라고
그러면 이거는 동경 몇 도, 서경 몇 도, 이렇게 하잖아?
經
세로를 뭐라 한다?
經이라 하거든.
기준점이라.
그러면 베를 짜거나 가마니를 짤 때
이래 세로줄이 있잖아. 이렇게?
세로줄이 이렇게 기본으로 베이식으로 깔려 있는 것 있죠?
이게 뭐요?
經이고 縱이고
이게 보시바라밀이라 이거지.
그러니까 이것은 보시로 縱으로 삼아야 되고
그 다음에 나머지 바라밀들은
횡橫이 되는 거거든. 그 다음에
시무염심施無染心
무염심無染心, 오염됨이 없는 것을 보시하는 것을 뭐라 한다?
계율
그렇지!
보시하기는 하는데 오염됨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걸 뭐라 한다?
계율
그게 橫이 되는 거요. 그죠?
그 다음에 남에게 아만심이 없는 것을
무오심無傲心, 오만스러운 것 있잖아요?
오만심이 없는 걸 남한테 베풀어주는 걸 보시하는 걸 뭐라 한다?
인욕바라밀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게으름이 없는 것을 보시하는 걸 뭐라 하겠노?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그리고 산란함이 없는 것을 베풀어주는 것을
자기에게 베푸는 걸 뭐라 한다?
선정바라밀
뭐가 縱이 되는 거에요?
종횡縱橫으로 따지면?
보시는 모든 것에 다 들어가고
하나~ 한올 한올 옆으로 가로로 들어가는 건 뭐다?
나머지 오도五度바라밀이라고 하는 거죠.
이제 이해 가세요?
네
그런데 그걸 번역하신 분이 굉장히 유명하신 스님이야.
아미타경소초阿彌陀經疏抄 번역하신 거기에 보면 내용이 나와요.
그래가지고 스님께서
"아 원문이 없이 소疏까지는 원문이 있고 초抄는 원문이 없는데...
글을 번역을 이래 했는데..."
처음에는 묻지않고
"니는 어떻게 생각하노?"
어제 올라가니까 주시더라고
"스님! 거꾸로 됐는 것 같은데요..."
거꾸로 됐는 것 같은 게 아니고
"거꾸로 됐으면 좋겠는데요..." 이랬더니
"아 니도 그래 생각하제...?"
여러분들 이제 이해 갔지?
우리는 가장 바라밀이 뭐가 바라밀이 돼야 된다?
보시
보시바라밀
네팔에 10원도 보시 안하는 사람은
나머지 계율이고 인욕이고 선정 이런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야.
어떠한 형태든지
네팔에 가든지, 도와주든지,
남에게 돕도록 권유하든지, 동참을 하든지, 그죠?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실제상황이라.
너무 거기에 빠져가지고 허우적대가지고 지 인생 못가면
그래도 우리 놀 거는 놀아야 되고, 그지?
우리 하고 별로 관계 없잖아? 지금
여기서 한 명 지금 죽는 게 더 소중하잖아. 우리는
그거는 우리하고 조금 먼 인연은 먼 인연 만큼
그래도 마음 아파하고 도와줄 수 있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열쇠는 곧 깨달음에 있다. 맹인이 35년 만에 드디어 눈을 뜨고 보니 온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고, 그렇게 존귀할 수가 없다. 이 감동 이 충격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깔고 앉으셨던 이름 모를 풀이 그날 이후로 길상초(吉祥草)로 승격되지 않았던가.
이것 무슨 똥풀을 깔고 앉았든지 잡풀을 깔고 앉았든지
그 풀은 깔고 앉는 순간부터 뭐가 되는 거요?
길상초
옛날 임금이 먹었던 것 도루묵 있잖아?
맛 없어서 퇴출된 것
도루묵
중은 이래 보면 행성行星이 아니라 항성恒星이야. 어찌 보면
부처님을 보면 행성이라 할 수 있지만
모든 신도들의 구심점이 돼야 되는 콤파스의 중심점 있잖아요?
중은 자꾸 원심력을 가지고 구심점으로 살아가야 돼.
일반 신도님들은 원심력으로 해가지고
자꾸 튕겨나가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구심력 속으로 자꾸 불교 속으로 따라 들어와야 되고
한 번 생각해봐요.
얼마나 이게 잘 써놨노!
그래서 화엄경은 자신이 깨달았다는 환상 속에서 읽어야 맛이 더욱 진하게 우러난다.
너무 환상에 들어가버리면 저 정신병원 가야 돼.
적당하게 들어갔다
책 읽을 때만 우리가 깨달았다고 생각해야 돼. ㅎㅎ
네
2, 장엄(莊嚴) (4) 사자좌의 장엄 2
摩尼爲臺하며 蓮華爲網하며 淸淨妙寶로 以爲其輪하며 衆色雜華로 而作瓔珞하며 堂榭樓閣과 階砌戶牖의 凡諸物像이 備體莊嚴하며 寶樹枝果가 周廻間列하니라
그 사자좌는 마니보석으로 받침대가 되어있으며, 연꽃으로 그물이 되어있으며, 청정하고 미묘한 보석으로 그 둘레가 되어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된 갖가지 꽃들은 영락으로 되어있고 당우와 정자와 누각과 섬돌과 문호와 온갖 물상들은 격식을 갖추어서 장엄하였습니다. 보석으로 된 나무들은 가지와 열매가 무성하여 두루두루 돌아가며 사이마다 펼쳐져있었습니다.
강설 ; 부처님이 계신 곳은 그 땅도, 그 보리수도, 그 궁전도, 그 사자좌도, 모두 모두 다이아몬드와 금은보화와 마니보석으로 꾸며져 있다. 세속에서 아무리 화려하게 꾸민다 하더라도 이와 같을 수는 없다. 실로 화려함의 극치요, 사치의 극치다.
그러나 실은 모래나 자갈밭에 평범한 나무 한그루요, 차디찬 바위위에 잡초를 뜯어 깔고 앉았을 뿐이다. 부처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떨어진 누더기도 깊고 또 기워가며 검소하게 살라고 하셨다. 금은보화는 절대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심지어 꽃도 향도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물며 당신 스스로이겠는가.
단지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의한 안목으로 보는 삶의 환희와 감동과 존귀함과 영원성과 열락과 청정성을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리라. 실상의 눈으로 볼 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모래알 하나, 그 무엇인들 존귀하고 소중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우수마발(牛溲馬勃) 까지도 또한 그러하리라.
2, 장엄(莊嚴) (4) 사자좌의 장엄 2
마니위대摩尼爲臺하며 연화위망蓮華爲網하며 청정묘보淸淨妙寶로 이위기륜以爲其輪하며 중색잡화衆色雜華로 이작영락而作瓔珞하며 당사루각堂榭樓閣과 계체호유階砌戶牖의 범제물상凡諸物像이 비체장엄備體莊嚴하며 보수지과寶樹枝果가 주회간렬周廻間列하니라
(砌체:섬돌 牖유: 바라지, 햇빛을 받기 위하여 벽에 낸 자그마한 창)
그 사자좌가 마니보석으로 받침대가 되어 있으며, 연꽃으로 그물이 되어 있으며, 청정하고 미묘한 보석으로 그 둘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된 갖가지 꽃들은 영락으로 되어 있고 당우와 정자와 누각과 섬돌과 문호와 온갖 물상들은 격식을 갖추어서 장엄하였습니다. 보석으로 된 나무들은 가지와 열매가 무성하여 두루두루 돌아가며 사이마다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중은 꿈이 없어야 되겠지만
꿈까지도 보배로워야 돼. 꿈까지도!
잡꿈 꾸지 말고
사람이 칠보탑이라고 맨날 얘기하잖아요?
자~거기 짧게 읽어볼까요?
강설 ; 부처님이 계신 곳은 그 땅도, 그 보리수도, 그 궁전도, 그 사자좌도, 모두 모두 다이아몬드와 금은보화와 마니보석으로 꾸며져 있다.
겉만 그래 돼 있는 게 아니고
속까지 통채로 금 도금 된 것 아니요. 그죠?
우리가 정법 시대라고 하는 거는
정념이란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거는
안팎이 꿀맛처럼 안도 달고 겉도 달아야 되는 것이라.
겉거죽만 살~짝 도금해놓은 거는 상법像法 시대라. 그럴싸하게
상법像法은 무슨 상자요?
像法이라고 하는 거는
동상이나 형상을 원판하고 비슷하게 만들어놓은 걸 상像이라 해요. 像
동상 있지?
흉상 이런 것 있잖아?
정법과 엇비슷한데 벗겨보면 도금만 돼 있고 안에는 뭐야?
개금만 돼 있고 껍데기 벗기면 본질은 다르잖아. 그죠?
그런데 정법은 어때?
통채 안에까지 황금 덩어리라.
순금
말법은 어떻지?
めっき, 도금鍍金까지도 다 벗겨져가지고
그냥 옻칠이 허~옇게 드러나는 것 시커멓게 드러난 것
1 . 전등에 대하여
이조시대를 장식하는 커다란 별은 아무래도 서산대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서산대사는 바로 태고 왕사의 임제 정맥을 이은 조사임은 대개 큰 이론이 없다. 물론 불조원류(佛祖源流)에 수록되고 서산대사의 수록에 근거하였다고 보아지는 서산대사 비명에 전해오는 전등법맥에 대하여 근거 있는 이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법맥에 대한 천책은 피하기로 한다.
서산대사 비명에 이르기를
『우리 동방의 태고(太古)화상이 중국 하무산에 들어가시어 석옥(石屋)화상의 법을 이으시고 이를 환암(幻庵)에게 전하였다. 환암은 귀곡(龜谷)에게 전하고 귀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였으며 영관은 서산(西山)에게 전하였다. 이는 실로 임제(臨濟)의 정맥이니 이로 보건대 서산이 홀로 그 종을 얻은 것이다.』하였다.
고려 말에서 이조 중엽 서산대사에 이르는 사이 계속되는 불교 탄압이 있었고 그 중에도 연산군의 불법 사태는 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 사이에 법맥을 이어 불법 정맥을 길이 전한 조사의 호법에는 실로 눈물겨운 바가 있는 것이다.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의 경우 사태를 만나서 마침내 속진 속에 피하여 지엄선사를 만난 것이니 이 지엄선사가 영관선사를 거쳐 서산대사에 이른 것이다. 고려 말에서 서산대사에 이르는 동안에 빛나는 성좌들 중 우선 지엄 선사에 대하여 잠시 그 거룩한 자취를 살피기로 한다.
2 . 출 생
선사의 이름은 지엄이다. 호는 야로(野老), 거처하는 처소는 벽송당(碧松堂)이라 하였다. 오늘날 선사의 행상과 게송 수편을 수록한 벽송집(碧松集)이 있는데(양산 통도사판) 그 이름이 이에 유인한다. 선사의 속성은 송(宋)씨, 아버지는 복생(福生)이라 하였고, 전북 부안(扶安)사람이다. 어머니는 王씨인데, 꿈에 한 도승이 나타나서 절을 하면서 쉬어가기를 청하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고 전한다.
이조 제 6세 왕인 세조 9년(서기 1464) 3월 15일에 탄생하였다. 골상이 기특하게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기골이 웅장하여 武人의 풍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書와 劍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병서에 박통하였다.
성종 22년 두만강 건너 야인이 침공하여 왔을 때 도원수 허종(許琮)은 2만병을 거느리고 이를 쳤다. 그 때에 선사도 종군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다음해 개선하여 하루는 탄식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부질없이 바깥을 향하여 힘들이고 달리니 이럴 수만은 없다. 비록 땀 흘린만큼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필경 이것은 헛된 이름인 밖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땅히 심전(心田)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마침내 집에서 나와 계룡산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조징(祖澄)대사를 만나 축발하였다. 그 때가 28세였다.
3 . 오도(悟道) · 전법(傳法)
선사의 수도는 실로 철저하였다. 견고한 도심은 길이 만인의 거울이 되리라. 엄정하게 계를 가지며 선을 닦되 잠시의 틈도 없었다. 그러면서 널리 선지식을 찾았고 한편 능엄경의 깊은 뜻을 묻기도 했다.
벽계정심선사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황악산으로 벽계정심선사를 찾아 마침내 이곳에서 대오하니 임제 정맥은 끊어질 듯한 어려움에서 벗어난 것이다. 불조원류(佛祖源流)에는 벽계정심선사가 입멸에 즈음하여 법을 벽송에게 전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를 말한다.
그후 선사는 운수행각을 계속하여 제방 제산의 여러 선지식의 문을 두루 두들겼다. 산중 깊숙히 이름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며 지내시는 도인이 많았던 것이다. 뒤에 지리산에 들어가 지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한 벌 누더기요, 먹는 것은 하루에 한 끼,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좌선하였으며 그 청정한 거동은 참으로 참선학도의 모범이 아니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선사의 문풍은 고준하고 엄정했다. 비록 납자가 찾아와 법을 물어도 그 단련은 준열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 사람들은 선사에 가까이 하지 못하고 두려워 했으며 한편에서는 선사의 고준을 허는 자조차 있었다고 한다.
선사가 후학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독특한 바가 없지 않다. 보통의 선인과 같이 문자 세우지 아니한다 하여 경전을 불고하는 類와는 크게 달랐다. 법화경· 능엄경등 대승경전을 간파하고 정심선사에게 최후 일관을 격발하여 깨친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선종조사의 어록을 대뜸 들어대지는 않았다.
먼저 선원도서(禪源都序)와 보조국사가 평을 가한 법집별행연절요(法集別行緣節要)를 읽게 하여 대충 교학상의 이해를 주고 그 다음 해 조사의 경절문(徑截門)의 어록을 배우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법화경 · 화엄경 · 능엄경등 대승경전을 강하여 널리 부처님 말씀에 젖게 하였으니 이는 보조(普照)국사가 일체경교를 심지(心地)개발의 기초를 삼았던 내력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하겠다. 대개 이와같이 하여 선요어록으로 알음알이의 병을 세척하고 다음 해 향상일로(向上一路)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조 중종 29년 겨울, 문인들을 모아 법화경을 강하였다. 방편품에 이르러 홀연히 탄식하여 이르기를 『중생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윤회를 달게 받아 돌고 돌기가 오래 되는구나. 그래서 세존께서 수고롭게도 광명을 동쪽에 한 번 비추시고 힘들여 정성스럽게도 열어보이고 말씀하시게 하였구나. 이것들은 모두가 중생을 위하여 방편을 베푼 것 밖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은 실법(實法)이 아니다. 대개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너희들 모두가 만약 부처님께서 말씀이 없으신 것을 믿는다면 곧 자기 마음 땅에 깨달아 들어가리라. 이것이야 말로 가히 보재창고를 여는 것이라 하겠으며, 또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된다. 오늘 나도 또한 여러분들을 위하여 적멸상을 보이겠다. 여러분들은 결코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노력하고 노력하라.』하였다.
그리고 시자를 불러 차를 가져오게 하고 한모금 마시더니 문을 닫고 단정히 앉으셨다. 잠시후 대중이 문을 여니 선사는 이미 천화하였던 것이다. 이 날이 11월 1일이다. 안색이 생시와 같았다고 한다.
선사의 게송이나 글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서산대사가 수집한 게송20수가 벽송집에 실려 있는데 문구에 걸림없이 천진심(天眞心)을 흘러내림은 만고의 구슬이라 하리라. 선사의 세수는 71세, 법납은 42세다.
스님의 교육은 총림(叢林)이라는 종합수행도량에서 이뤄진다.
총림에는 강원(講院)·선원(禪院)·율원(律院)·염불당(念佛堂)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강원과 선원이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강원은 승가대학이라고도 하는데 사미(沙彌)·사집(沙集)·사교(四敎)·대교(大敎)과 등 네 단계로 구분해 교육한다.
사미과는 가장 초보적인 《초발심자경문》 《치문(緇門)》 《沙彌律儀》를 배우고 사집과에서는 《서장(書狀)》 《도서(都序)》 《선요(禪要)》 《절요(節要)》 등을 공부한다. 또 사교과에서는 《능엄경(楞嚴經)》 《기신론(起信論)》 《원각경(圓覺經)》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공부하고 가장 상급인 대교과에서는 《화엄경》을 공부함으로써 강원의 모든 과정을 끝마치게 된다. 강원의 교육과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5∼6년 정도가 일반적이다.
이런 강원 교육이 끝나면 선원에 들어가 평생 수행의 과정을 겪게 된다. 원칙적으로 선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강원에서 사교·대교과를 수료하고 구족계를 받은 승려에게만 주어진다. 선원은 방장이나 조실 스님의 책임 아래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며 각기 맡은 소임을 병행하면서 수행하는데 하루 8시간이상 좌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보통 용맹정진이라 하여 절대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하기도 하고 일정기간을 정해 놓고 묵언(黙言)수행을 하는 수행자도 있다. 스님들은 선원 수행을 마쳐야만 법계가 승진된다. 대선사 또는 대종사라는 칭호는 여름 20 안거를 성만하여 법납이 20하(夏) 이상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으며 주지가 되려면 여름 10 안거를 끝내야 한다.
첫댓글 정법을 수호하는 우리는 통채 안에 까지 황금 덩어리?? ㅎ..
수고하셨습니다..지선화 님!!
대교과에서 화엄경 공부!!!
화엄경 공부하는 우리도 대교과반 ㅎㅎㅎ
복도 많네!!!
물론이지요.. 우리도 엄연한 대교과 반이지요..ㅎ
이 공부 다 함께 하기를...
참 묘하네요
권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참 묘하네요
"모두 불성이 있건만!!!"
부처님이 성도후 탄식하시던 모습
떠 오릅니다..
우리는 청복이 참 많지요~^^
고맙습니다..._()()()_
_()()()_
고맙습니다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듯...
경전 강의는 아무리 읽어도 또 읽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