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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정권이 공자와 유학을 탄압하다 2000년대에 와서 대대적으로 부활시키더니, 한글전용과 함께 공자와 유학경전을 경원시하던 한겨레신문도 2011년부터 위의 공자맹자 유적지답사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첫날 - 11월 17일 금요일
평소에도 답사 등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 그런지 여행에 따른 설레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나이 탓도 있을 것이다. 의회에서의 해외여행이 ‘觀國之光’이라면 이번 여행은 ‘進德修業’의 일환이기에 나에게는 차분한 나들이로 다가왔다.
평소의 답사라면 내가 준비하는 것도 있겠지만 여행사에서 주관해주기에 그저 五感만을 활짝 열어두고 잘 따라다니면 되는 여행이 아닌가. 시간 맞춰 움직이고 일행과 더불어 즐겁게 유람하는 행복한 여행일 뿐이었다.
아침 8시 45분쯤에 집을 출발해 공항버스를 타러 나갔다. 이미 우리 일행이 버스안을 반쯤은 메우고 있었다. 모두들 화기애애한 표정이었다. 11시쯤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약속장소에 가보니 우리 일행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여행사 사장을 포함해 이번 여행의 일행이 모두 31명이니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한문공부’ ‘동양철학 공부’ ‘인생공부’라는 공통점이 있는 일행들이기에 서로가 바쁜 일정 미뤄두고 불편한 몸 이끌고 함께 했다는 것이 모두를 더욱 행복하고 따사롭게 만들었다.
오후 2시 25분 우리 일행은 대한항공 KE847편에 몸을 실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분들도 있었고, 가족과 떨어져 처음으로 숙박여행에 나선 분들도 있었다. 모두들 상기된 표정이었다.
구름 위에 올라선 비행기 아래로 서해바다가 언뜻언뜻 비치었다. 이제는 표준시도 우리와는 -1시간이다. 1시간 40여분만에 산동성의 省都인 제남(濟南) 공항에 도착했다. 살짝 비가 뿌린 날씨였다. 공항에 서있는 인민군복의 공항 관리인들을 보고서야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뿐,
<사진설명 : 곡부로 향하는 톨게이트에 논어와 예기에 나오는 ‘禮之用和爲貴(예의 쓰임은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와 공자얼굴의 대형간판이 걸려 있다. 이 구절은 중국 공산당 후진타오 정권의 국정 지표이다>
제남공항은 국제공항으로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널찍하고 세련되게 새로 지어진 공항으로 사회주의 냄새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국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니 흑룡강변 하얼빈출신의 교포 3세인 권인균씨가 우리들의 현지안내인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교포와 다름없이 작달만한 키였지만 흔히 듣는 연변교포들의 북한 말씨와는 크게 차이가 났다. 할아버지가 강원도 출신이고 2000년도부터 남한 관광객들을 안내하다보니 거의 남한 말씨를 닮게 되었다고 한다.
무강(无疆)한 大地의 나라
우리와 5일 동안을 함께 할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제남시내로 향하는 산동성의 풍경을 감상하였다. 중국의 땅덩어리는 우리나라의 98배, 인구는 약13억이며, 직할시와 특별행정구, 자치주를 제외한 23개의 성 가운데 산동성의 인구는 8천8백만이라고 한다. 大國은 역시 大國이다.
작년 5월 중순에 요녕성 심양시에 갔다가 그 광막한 대지를 보면서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진다는 사실을 실감했지만 이번에 느끼는 감정은 또다른 것이었다. 주역 곤(坤 : )괘에 보면 삼무강(三无疆)이 나온다.
땅은 두터워 만물을 싣는(坤厚載物) 덕이 무강한데 합한다는 덕합무강(德合无疆), 사방으로 뛰어다닐 수 있기에 행함에 지경이 없다는 행지무강(行地无疆), 안정되어 길한 도리가 땅의 지경이 없는 것에 응한다는 응지무강(應地无疆)이 있다고 공자는 파악하였다.
무강한 땅덩어리에 대해 노자는 인간 힘의 미력함을 느껴 ‘無爲自然’으로 정리하였지만 공자는 무강함속에서 끝없는 仁愛를 보았던 것이다. 온갖 고생하며 철환주유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땅의 덕을 정리함에 위와 같이 하였으니 공자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공자의 광대무변한 사상을 조금씩 몸으로 이해하면서 시선은 여전히 창밖으로 두었다. 산동성은 우리와 같은 위도이기에 풍경 또한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가는 길 내내 ‘대륙의 힘’과 ‘중국 경제의 저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겨울 초입이라 다소 을씨년스럽지만 새봄이 되면 움터 나올 힘이 보였다. 망망한 대지 위를 죽죽 곧게 뻗은 8차선 이상의 도로에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중국의 저력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한국은, 땅은 작지만 산이 많은 지형으로 이 산의 주름을 다 편다면 중국 대륙보다 크다. 그러므로 산을 잘 활용한다면 그 힘은 무한할 것이다’라고 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주역의 ‘終萬物始萬物者 莫盛乎艮’의 의미를 새기면서도 ‘의례상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겠지’라고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 기간 내내 산동성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 산을 다 편다면 정말 중국대륙보다 크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는 산이 유난히 많은 나라이고, 중국은 유난히 산이 드문 나라라는 사실이다.
워낙 넓은 땅덩어리를 갖고 있는 나라라서 별별 진풍경을 다 맛볼 수 있고, 또한 호남성의 장가계쪽을 주로 여행하였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실감나지 않겠지만, 만주벌판과 황하강과 양자강을 주무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산은 너무 높아 오르기 힘든 곳으로 인식될 만하였다.
그러기에 16세기 말기에 중국에 갔던 양사언이란 조선 선비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들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그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망망(茫茫)한 대지 위에서만 사는 중국인들에게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산을 오른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란 것이다. 망망한 대지 위에 그저 한 점 조그만 사람이 그 높은 산을 오를 꿈조차 꿀 수 있겠는가?
험난한 인생 새로운 각오를 다지랴, 건강 챙기랴 하면서 주말이면 산에 오르는 우리들과 중국인들과는 산을 바라보는 입장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1532m의 태산은 감히 오르지 못할 동경의 산이오, 신비의 산일 수밖에 없을뿐더러 천자가 직접 찾아가 봉선의식(封禪儀式)을 거행하면서 천하의 황제임을 뽐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사진 설명 :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다. - 유교에서는 공자의 겸손함을, 도교에서는 노자가 공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자랑하려고 많이 인용되는 부조(산동성 박물관 소장)이자 글귀이다. >
산동성에 가보면 유교보다는 도교적 색채가 훨씬 강하다. 아마도 중국 전체가 도교적 색채가 더 진한 듯하다. 왜 그럴까. 광활한 대지 때문일까! 그들이 이렇게 음양의 이치에 매달릴 때, 우리의 조상은 크게 한발을 더 내디뎌 오행론을 펼쳐 우임금이 황하강 치수 사업을 할 때 도와주었다.
바로 산동성 일대는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우리의 東夷 先祖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스며 있는 곳이다.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을 내세우면서 역사를 가리려고 하는 곳이 만주벌판을 비롯한 산동성 일대이다.
땅속에서 나오는 유물이 바로 華夏족이 아닌 동이족의 문화흔적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동성의 주민들은 漢族이라고 하는 화하족보다는 오히려 동이족과 가깝다는 사실이다. 보다 구체적인 것은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가려낼 것이고, 우리는 충실히 여행에 임할 따름이다.
산동성은 복희씨의 황하강이 있는 곳으로 중국문명의 발상지이고, 순임금이 그릇을 굽고 고기잡이를 하던 바닷가이고, 공자의 고향이며, 노나라가 있던 곳이고, 강태공이 다스리던 제나라가 있던 곳이다. 어디 이뿐이랴.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와 손빈의 고향이고, 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내노라하는 사상가의 고향이자 전국시대 때 제나라가 稷下선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학문의 꽃을 피었던 곳이다.
오늘
그 넓은 중국 땅덩어리 가운데서 제나라는 서해바다와 면하여 소금과 해산물을 내륙으로 공급하여 부강한 나라를 유지하면서 천하통일의 꿈을 꾸고 직하선생들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우리가 차를 달려 제일 먼저 다다른 곳은 바로 중국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강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려다 볼 수 있었듯이 지금은 상류에 많은 댐을 건설하여 범람을 막고 있다. 덕분에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표현했던 ‘휘돌아치는 누런 물결’은 구경하기가 힘들었고 대신 높은 제방 아래 여전히 황하의 옛 위용을 자랑하는 듯 부연 흙탕물의 강 양옆으로 고운 모래흙이 작은 제방을 이루듯이 쌓여 있었다.
주역의 이치를 처음으로 표현한 복희씨와 龍馬를 생각하며 모래흙을 어루만져 보았다. 황하강 물결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 몇 컷을 찍고 표돌천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표돌천공원으로 조성되어 제남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되어 있다.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데 도착하니 날은 이미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濟南이란 명칭은 글자 그대로 황하강 건너 남쪽이란 뜻이다.
그러기에 산이나 구릉은 거의 없지만 땅 밑으로는 수맥이 잘 발달하여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온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밑에서 퐁퐁 솟아나는 작은 옹달샘 규모와는 천양지차다.
제남에서 가장 유명한 샘이 표돌천(趵突泉)인데 2천7백여년 동안 마르지 않고 솟아나오는 샘이라고 한다. 지금은 수위가 많이 낮아졌지만 여름에는 10m 높이까지 솟아오른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솟아올라 바로 퍼져가는 모습이었다. 샘의 정면으로는 북위(北魏)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는 낙원당(樂源堂)이란 건물이 환한 불빛을 발하며 서 있었다.
붉은 주칠에 용마루가 없는 검은 기와의 지붕으로 이루어진 회랑과 뒤로는 용마루가 있는 누런 색 기와로 덮힌 지붕이 솟아 묘한 대조를 이루는 건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내에 왕과 왕비가 머무는 침소에만 용마루가 없는 건물을 짓고 있는데 중국은 철저히 음양 짝을 이루어 지붕을 만들고 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표돌천의 바로 옆에는 송대의 유명한 여류시인인 이청조(李淸照)가 늘 씻었다는 수옥천(漱玉泉)이 그녀의 생가와 함께 있었다. 역시 모든 지붕이 음양 짝이다.
한 건물이 용마루가 있다면 옆의 건물은 용마루가 없다. 작은 건물에 용마루없이 기와만을 돌려 지으니 앙징스러울 정도로 예쁜 맛이 난다. 건물을 보는 또다른 맛이다.
이러한 건물 사이사이로 샘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계절별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을 터이니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아쉬움을 사진 속에 부랴부랴 담으면서 바로 길 건너의 천성광장으로 갔다. 표돌천공원이 고전적인 전통공원이라면 천성광장은 앞서 언급한 산동성이 배출해낸 걸출한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음양의 이치를 조각상으로 세워놓은 대규모의 현대광장이다. 음악분수가 크게 조성되어 있으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친 뒤였다.
유네스코가 ‘국제예술광장’이라고 지정한 곳인데 그 진면목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점을 또다른 아쉬움으로 안고 대리석으로 깔린 광장안을 산책했다.
광장 머리에 세워진 건축물 안에 제남이 낳은 역사적 인물들이 동상으로 서 있었고 벽면에는 그들의 활동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얼핏 바티칸시티의 교황청 앞 광장을 생각나게 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조금은 쌀쌀했지만 곳곳에 제남의 데이트 족속들이 눈에 띤다.
차를 타고 첫날 숙소인 인근의 옥천삼신대주점(玉泉三信大酒店)으로 옮겨갔다. 그 사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우리의 일행들은 표돌천공원앞의 행상들한테서 대추를 한봉지씩 사서 나눠먹었다. 웬 대추가 그리도 크고 맛있던지 이번 여행 내내 대추가 모두의 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디 그뿐이랴. 중국에서는 호텔을 ‘大酒店’이라고 이름 붙였으니 우리로서야 기회를 놓칠소냐, 여행사 사장님의 ‘술과 과일은 얼마든지 사주겠다’는 약속도 있었겠다, 음식이 기름지니 술을 조금은 마셔야 소화가 잘된다는 속설도 있겠다 하여 아침을 제외한 매끼마다 죽엽청주와 공부가주를 벗하였다. 게다가 첫날밤은 산동성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한 방에 모여서 환담을 갖고 노독(路毒)쯤은 아랑곳않는 역마살 낀(?) 여인네들 몇몇은 끝까지 남아 酒神을 벗하였다.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6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