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게 잇따라 일본군은 해로를 이용한 군량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에 일본은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고자 군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진주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관군 3천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해 전쟁을 준비하였다. 더불어 곽재우,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과 합세하여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대 혈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은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에 순국했다. 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 계획을 좌절시킨 한 엄청난 승리였다.
관군과 명군의 반격으로 서울에서 퇴각하여 경상도로 내려온 일본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한편,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자 10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와 일본군이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을 최대한 빨리 몰아내고자 했던 조선은 협상에서 배제되었다. 일본군은 이때를 이용하여 진주성을 총공격 계획을 세웠다. 명의 심유경이 공격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고니시는 차라리 진주성을 비워놓으라고 심유경에 충고를 했다고 한다.
당시 진주성 안에는 10만에 육박하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명군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권율과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 장수들조차도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여 진주를 포기했다.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관군과 김해부사 이종인, 창의사 김천일, 경사우병사 최경회, 복수장군 고종후가 이끄는 전라도의 의병, 충청병사 황진, 경상도 의병장 김준민 등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조정과 명군의 권고와 일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창의사 김천일이 도절제를 맡아 총지휘를 하였고, 실질적인 전투대장인 순성장은 충청병사 황진이 맡아 이끌었다.
6월 21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살피고 돌아갔다. 다음날인 22일에 처음 교전이 일어나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퇴각을 하였다. 일본군의 침입이 예상되는 서북쪽에 해자를 파고, 물을 흘려 호를 만들었으나, 일본군은 해자에 흙을 메워 길을 만들었다. 25일에는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대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순성장 황진도 성안에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일본군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28일, 일본군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냈지만, 순성장 황진도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를 하였다.
마지막 날인 29일, 전사한 황진을 대신하여 진주목사 서예원이 순성장을 맡았았다. 하지만 서예원이 겁을 먹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 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전투 중 순절하였다. 비마저 내려 성벽이 무너지고 일본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은 아들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 등도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가장 처절하게 싸웠던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이렇게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진주성에서 입은 일본군의 피해도 막대하여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계획도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진주성 전투에서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조선의 기록에는 사망자가 6만 명, 일본의 기록에는 2만 명으로 나와 있다.
◈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지휘한 창의사 김천일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 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신하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
이 글은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했던 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여일이 채 못되어 임금은 의주로 파천하고,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목 놓아 통곡하며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호남에서 가장 이른 5월 16일 금성관 앞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양산룡‧양산숙 형제와 송제민 등이 함께하였다.
건재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6개월 후 아버지를 잃었다. 19살이 되어서야 태인의 일재 이항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2년 만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7세 때인 선조 6년(1573) 학문과 덕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종6품)가 된 뒤 용안 현감, 임실 현감, 순창 군수, 담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53세 때인 선조 22년(1589) 수원 부사 시절에는 수십 년간 탈세하던 부호들에게도 일반 백성과 똑같이 세금을 부과하자, 권력층과 연계된 이들의 무고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향인 나주에 내려와 있었다.
6월 3일, 김천일은 마침내 300여 의병을 모아 북상길에 올랐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었었다. 6월 23일, 수원에 도착한 후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금령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8월에는 강화도로 진을 옮기고 양화도 전투, 행주산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장례원 판결사와 함께 창의사(倡義使)를 제수받았다. 선조는 교서에서 “그대는 위험에 처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공을 세우니, 내 어찌 상주는 일에 인색하겠는가. 지휘하고 호령하는 것을 마땅히 도원수와 더불어 하며, 병기는 오직 그대의 뜻대로 기용하라.”라고 하였다. 이후 선조는 한성 수복에 나서라는 명을 내렸지만, 김천일은 강화도의 잔략적 중요성을 파악하고 강화도를 지키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다
이듬해인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왜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와 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과 명군, 도원수 권율, 의병장 곽재우 등 대부분이 “진주성 사수는 지혜롭지 못한 전술”이라며 수성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김천일은 “지금의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 되고, 진주는 호남에서 가까운 곳이니 실로 이와 입술의 관계와 같다. 즉, 진주가 없어지면 호남 또한 없어지고 말 것이다.”라며 6월 14일 300여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였다.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복수장군 고종후 등 호남 의병장들과 관군이 모여들었다. 김천일은 4,000여 의병과 관군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10만에 가까운 왜적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이나 막아 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이 함락되자, “나의 죽음은 이미 거병한 날 결심한 것이니 오늘까지 이른 것도 늦었다. 다만 그대들은 집을 버리고 나를 따라 고초를 겪은 지 2년 만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들이 가련할 뿐이다.”고 탄식하고 6월 29일 아들 상건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고종후, 최경회, 양산숙 등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김천일의 묘는 현재 나주시 영산동(나주 운전면허시험장) 양성이씨 선산에 아들 상건의 묘와 함께 있다. 남강에 투신하였기 때문에 시신은 없고, 김천일의 거처에서 머리카락과 손발톱 등을 수습하여 외가의 선산에 모신 것이다.
선조 36년(1603)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광해군 10년(1618)에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진주의 창렬사와 나주의 정렬사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진주 창렬사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사호가 처음 세운 뒤 선조 40년(1607) 사액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김시민을 모시던 충민사가 철폐되자, 김시민이 창렬사의 주벽으로 모셔졌다. 나주 정렬사는 선조 39년(1606년) 나주고등학교 뒤편 월정봉 아래 건립되었다가 1607년 정렬사로 사액되었다. 이곳에는 한 손은 불끈 쥐고 다른 한 손은 칼을 쥔 채 갑옷도 투구도 없이 나선 김천일의 동상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