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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을 따르면 조세법에서도 자유하다>의 줄거리: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와 육체를 따르는 자의 얽매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자유는 성령님을 통해서 실제로 내것이 되고 구체적으로 실현이 됩니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 자유할 때 우리는 외적으로 내게 주어지는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예를 들면 조세법으로부터의 자유까지도 말입니다. 도대체 성령을 따르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조세법으로부터 자유란 그 실제 내용이 무엇일까요?
성령을 따르면 조세법에서도 자유하다
(갈5:13~26)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성령을 따르면 조세법에서도 자유하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에게 바리새인들이 와서 질문을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데나리온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시고 데나리온에 있는 가이사의 형상을 보며 물으시는 대답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자유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과 로마의 식민지로서의 조국 유대 땅에서 살고 계시던 예수님에게 주어지는 세금의 문제, 조세법과 어떤 연관성 하에 있었을까요?
자유가 제한을 받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자유가 계속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또 반 세겔씩 내는 성전세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17장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성전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성전세를 내신다,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예수님의 자유는 제한받고 있는 것입니까, 계속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까?
궁금하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을 따르면 율법으로부터 자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원리적으로 보면, 그 원리를 적용하게 될 경우에 율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게 됩니다.
즉, 복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율법으로부터만 자유가 아니라 모든 원리나 모든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적인 법, 나의 외부로부터 나에게 주어지는 법인 율법과 원칙과 규범과 도덕과 윤리,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 결론적으로 얘기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원리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율법으로부터만 자유 하고 다른 법으로부터 자유 하지 않다면.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조세법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어떤 원리에 의해서 그런 것이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에는 외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법을 지키네, 마네 하기 전에, 법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기 전에 마음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하게 됩니다.
복음 때문에 그게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에만 관심을 갖고 계시면서, 땅에 대해서는 방관하고 계시거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활동을 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바로 성령님의 활동이 나타나는 거예요.
근데 내 마음에 들어온 하나님이 움직이시게 되니까, 나는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비닐봉지 안에 강아지를 한 마리 담아서 전철을 타게 되면 강아지가 움직임에 따라서 비닐봉지가 움직입니다, 비닐봉지가 정체상태로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드려서 하나님과 연합하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서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같이 움직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행위가 나타나는 겁니다, 아빠와 함께 춤을 추는 거죠.
4, 5세 되는 딸들이 아빠의 가슴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로 아빠의 춤동작에 따라서 함께 움직여지는 것, 이게 바로 기독교인의 행위고 기독교인이 누리는 자유라는 겁니다.
어떤 외적인 법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행위가 나타나는 것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성립한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원리적으로 볼 때 조세법으로부터도 자유 하다는 이 내용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주제를 한 번 살펴본다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조세법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나에게 계속해서 세금을 내라고 하는데, 그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워야지 참 복음을 받아들인 자요, 복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주제는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와 육체를 따르는 자의 얽매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4단계로 생각을 해봅니다.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를 4단계로 살펴보면서 각 단계마다 육체를 따르는 자의 얽매임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피부에 닿게, 세금을 내야 된다는 국가의 조세법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가 한 번 느껴볼 수 있기를 바라는 거죠.
첫 번째로,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는 하나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기를 소원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가 어떻게 시작되느냐?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를 소원하면서부터 이 자유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늘 말씀드린 대로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를 끌어들여서 채워져야 만족을 합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 안에 모셔 들이는 경우는 반드시 좋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내게 주어지면 내가 행복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마음 안으로 모셔 들이고 끌어들이려 합니다.
여기서부터 육체를 따라 사는 자와 성령을 따라 사는 자의 기점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생각의 자유를 말하는 거예요.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는 생각으로부터 자유하기 시작합니다.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은 아직 내 마음은 돈이 없으면 걱정이 돼요, 돈이 많이 생기면 좋아합니다.
근데 생각으로는 압니다, 내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궁극적이고 참다운 만족과 행복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 압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인정합니다.
인식의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고, 하나님이 실감이 될 때라야만 나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생각으로는 압니다.
이게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하나님만이 나를 만족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심을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주시기를 기도하고 소원하기 시작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좋고 명예가 좋고 출세가 좋고, 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 아닙니까?
마음은 아직도 명예가 없으면 loser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생각만은 ‘아니, 나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돼, 하나님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어!’ 이것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게 남자나 여자나 결혼을 하면 보는 측면에 따라서 완전한 구속이 될 수가 있고, 완전한 자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여자에게 완전히 매이니까 구속이지만, 다른 이 세상의 모든 여자로부터 자유 합니다.
또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한 남자에게 구속되지만 다른 모든 남자로부터 자유 합니다.
한분 하나님만을 모시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구속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들, 명예 권력 승진 건강 돈, 이 모든 좋다는 것들로부터 자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의 자유로부터 시작하는데, 육체를 따르는 자의 얽매임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생각부터가 그것이 있으면 행복할 걸로 알아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좋다는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걸 소원하면서부터 육체를 따라 사는 자의 얽매임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여기서 지옥이 시작되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여놓은 모든 좋다고 하는 것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그분은 스스로 움직이시는 분이니 그분을 따라 움직이면 되니까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 한데, 돈을 마음에 받아들일 경우는 돈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움직여줘야 돈이 실제 내 손에 주어지니까, 이제부터 돈 버는 모든 법과 원칙과 규범들이 나에게 짐으로 다가오고 지옥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자식을 마음에 받아들였다, 그러면 어린 자식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아요.
내가 자식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제부터 모든 원칙과 법과 양육법 같은 것들이 내 마음을 짓누르면서 지옥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 번째 단계는 어떻게 되느냐?
생각은 자유롭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최고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좋다고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아직도 끌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는 십자가를 통한 걸림돌에 의해서, 십자가를 통한 부자유함을 통해서만 내게 실제가 됩니다.
역설적이죠?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부자유해 집니다.
어떤 부자유함이 있을까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마음 놓고 좋아할 수조차 없는 부자유함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부자유함을 통해서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자유함이 있는 거예요.
첫째 단계에서는 생각으로 믿는 겁니다, 생각으로.
‘하나님이 최고다, 돈보다 하나님이 계시면 된다, 건강 필요 없다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 명예 성공 승진 필요 없다,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 생각으로 믿었어요.
두 번째 단계에서는, 마음이 그렇게 믿어줘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을 강화시켜도 마음이 안 따라갑니다.
그래서 마음 안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부자유함이 생깁니다, 마음이 뭘 좋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부자유함을 통해서 내 마음이 드디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가 내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단계가 되는 거예요, 실제 내 것이.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말만 들었는데, 이 자유가 어떻게 실제로 내 것이 되어 내가 마음으로 자유함을 느끼게 되느냐?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부자유함을 통해서.
손에 못 박히고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배에 창이 찔렸는데, 온 몸의 살갗이 채찍에 맞아 해어진 채 매달린 상태에서 무엇을 좋아할 수 있고 무엇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절대적인 부자유함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육체를 따르는 자의 얽매임이 어떻게 마음에 주어집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마음 놓고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집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제부터는 지옥이에요.
내가 소원하고 내가 계획하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걸 자꾸 마귀는 지도자들이란 사람,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온 세상에 얘기합니다, ‘대가를 지불하라! 성공을 하려면 꿈을 갖고 비전을 가져라,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라, 행동하고 실천해라, 추진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즉, 지옥을 즐겁게 살아라! 이런 뜻이에요.
모든 부담과 모든 억압과 모든 얽매임을 기뻐해라, 이게 마귀의 전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얽매임과 부담을 두 팔 걷고 적극적으로 용감하게 맞서서 껴안고 사는 것을 훌륭한 사람, 열정적인 사람으로 미화시켜버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 거 없어요.
비전, 꿈, 이런 건 하나님의 겁니다, 내 인생에 대한 비전과 꿈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고 나는 하나님이 내 기업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내 비전일 뿐입니다, 천국이 내 이상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이 꿈과 비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단계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첫 번째, 두 번째 단계는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가 시작되는 생각의 자유와 그 자유가 내 것이 되어 내 것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자유의 단계를 이야기했어요.
이제 자유를 느끼게 됐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성령을 따르는 자의 자유는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외적인 법에 대해서 초월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을 따르는 자로서 자유를 마음으로 느끼면서 살아도 어차피 이 세상의 법들과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성령을 따르는 자가 자유를 느낄 때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법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느냐 이거예요.
초월적인 입장을 갖습니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법을 어긴다거나 법을 무시한다거나 법을 우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법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사기, 횡령죄의 법이 율법에도 있고 사회법으로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법이 왜 주어졌습니까?
사람들 모두가 다 마음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서 돈이라는 것을 끌어당겨 놓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법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너도 마음에 돈을 좋아하고, 나도 마음에 돈을 좋아하니까 내가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걸 네가 보면서 슬쩍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속에도 돈이 들어가 있으니까.
마음속에 있는 돈을 손으로 쥐기 위해서 남의 것을 슬쩍 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왜 생겼느냐,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좋아하면서 집어넣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왜 이런 말이 생겼습니까?
이웃이 갖고 있는 것을 나도 마음에 갖고 있으면서 내 손에 쥐고 싶으니까 탐하는 게 생긴 거거든요?
그러니 돈을 마음속에 집어넣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조세법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부담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돈을 마음에 집어넣고 있을 경우에는 세금 내라고 하면 내 살점을 떼 내는 것 같아요.
내 피를 쏟아서 주는 것 같아요, 아까워 죽겠습니다.
다 이런 원리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법을 초월한다는 얘기는 법을 지킨다는 마음 없이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지킨다는 마음이 왜 없습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법은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람들이 서로서로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라도,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법이 만들어졌어요.
교통법도 그렇습니다, 나만 빨리 가고 싶으니까 신호위반법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없게 된 그런 사람들은 모든 법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그 마음속에 식민지하의 나라와 민족이라는 가치가 안 들어와 있었어요.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로마법을 지켜서 세금을 내시는 거예요.
근데 유대인들은 선민인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에게 식민지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내라는 세금을 내가 정말 죽지 못해 내기는 하지만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이러면서 부담과 얽매임과 억지로 지켜가는 겁니다, 세법을.
그런데 마음 안에 돈이 없고 하나님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세법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키느냐, 돈을 마음에 갖고 있으면서 너무너무 돈 내기가 아까운데 걸리면 더 큰일날까봐 세금을 내는 자들이 지키는 거예요.
그러나 돈에 대해서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와 계셔서 이미 다 만족해요.
돈이 더 이상 없어도 돼요.
그런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 이게 초월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뒤를 돌아봅니다, 세금 안 낸 게 많거든요.
또, 가능하면 세금을 안 내고 싶어 하거든요, 그러니 항상 짐이 되고 먹구름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법이라는 게 다 그런 거예요, 조세법뿐만 아니라 모든 법에 대해서, 억지로 해야 되니까.
근데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세상의 부당한 법이 탄압을 합니다, 탄압을 받아도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탄압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거예요.
목숨을 잃는다고 잃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 사람들은 목숨을 연장해서 특별히 더 좋을 것을 얻을 게 없어요.
이웃사랑에 대해 본문에 나오지만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셔 들여서 만족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가 이웃 때문이에요, 내가 오늘 죽으면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되는 것이고 거기서 마무리 된 것이니까 깨끗하게 가면 되는 거예요, 잃을 게 없다니까요?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면 기쁨과 행복을 위해 보탤 게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어요.
잘못된 법에 의해 탄압을 받아도 하나도 잃을 게 없으니까 그 법을 초월해 있는 겁니다.
육체를 따라 얽매이는 자들, 맨날 쫓겨 가는 거예요.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는 세금이 너무 세니까 부자들이 모나코로 이민 갑니다.
이렇게 평생을 쫓겨 다니는 겁니다, 그까짓 돈 지키느라.
마지막으로, 성령을 따르는 자들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을 위한 무대가 됩니다.
그 자유가 하나님의 무대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자유롭다고 해서 그러면 나는 법을 어겨도 되는 것이냐, 아니에요.
내게서 율법이 지켜지지 않잖아요, 살인을 한다든지, 근데 이 살인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보면 더 강화됩니다.
살인뿐만이 아니라 아예 형제를 향하여 바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진다, 이렇게 해버리십니다, 더 강화되는 거예요.
간음도 행위적 간음에서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죄가 된다, 이렇게 아주 강화시켜버립니다.
이 이유가 뭡니까?
성령이 들어오시면 모든 게 다, 산상수훈까지 가능해진다는 것을 아시니까.
그래서 주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해주신 거예요.
그러므로 내게서 율법이 지켜지지 않고 산상수훈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면,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성령께서 들어오시면 가능하고, 성령께서는 십자가 붙잡으면 들어오신다는 거예요, 뭐 대단한 거 하라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붙잡고 세상에서 좋아할만한 것들에 대해서 죽어서 하나님 쪽으로만 마음을 돌리면 들어오신다는 거예요.
들어오시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산상수훈이 안 이루어지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잡고 가고 계시는 게 아니라고 느끼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거울인 거예요.
율법을 지키진 않지만 율법을 거울삼아 바라볼 때 내 행위에서 율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으면, 지키지는 마세요, 그러나 지켜지지 않고 있으면 성령이 들어오시지 않은 것이고, 성령이 들어오시지 않은 이유는 내가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이겁니다.
여러분, 십자가 붙잡고 생각과 마음에서부터 성령의 자유가 주어짐으로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기가 막힌 삶, 조세법을 초월할 수 있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로 인해 성령 충만 함으로써 조세법조차도 초월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