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신학사랑학 서론 (2) 신비.보조.기조실(SG) 24.01.17 06:49
신비신학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따라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응용과 변형을 꾀할 것이다.
신비신학의 최초의 스승이자 안내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다. 그는 자신의 산문을 통해 독자들을 산 정상 혹은 최고 지혜가 거하는 영혼의 중심으로 인도한다.
『가르멜의 산길』* Ascent ofMount Cam*의 서두에서 그는 착한 사람들이 마땅히 발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다시 말해 “발전하는 방법을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초보자의 방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지도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느님과의 보잘것없는 친교 방법에만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슬프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신조가 건전하고 믿을만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썼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초보자나 숙달된 사람이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적어도 그 방법을 알 수 있는 가르침과 충고를 줄 것이다. 3
첫째 교훈은 하느님께 모든 걸 의탁하는 것이다. 불쌍하게도 관상하는 사람은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발로 차고 앙앙 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이가 어머니에게 굴복하도록 가르치는 숙련된 영적 안내자다.
그는 관상하는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유입에 마음을 열도록 가르친다. 그는 성경에서 , 신비 전통에서 ,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 그리고 그에게 마음을 연 사람들의 경험에서 이끌어 낸 일련의 가르침에 정통했다. 기도와 영적 지도 방식에 아주 정통한 그는 탁월한 신비주의 박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신비신학을 정의할 때, 신학은 곧 지혜를 뜻한다는 고대의 전통에 따른다. 신비신학과 신비적 지혜 혹은 신비적 기도 사이에 별다른 차이를 두지 않는다.
나아가 신비신학과 관상을 동등시하면서 “관상이란, 신학자들은 ‘숨겨진 지혜’라 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을 통해 영혼 안에서 교류되는 것’이라고 말한 신비신학”4이라고 썼다.
이 책에선 신학이란 말을 좀 더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신비신학이 사랑에서 나온 숨겨진 지혜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숨겨진 지혜에 대해 숙고하고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랑에서 나온 이 숨겨진 지혜가 무엇이며, 이 숨겨진 사랑의 지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대한 시『영혼의 노래』TheSpiritua/Cann*에서 신부와 신랑의 사랑을 노래하며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랑이 신부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고 그녀에게 달콤하고 살아 있는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달콤하고 살아 있는 지식을 그는 관상 혹은 신비신학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신랑이 가르쳐 준 달콤하고 살아 있는 지식을 영적인 사람들이 관상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숨겨진 지식, 즉 신비신학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이 지식은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몹시 기분이 좋다. 사랑이 이 지식의 주인이며 지식을 온전히 기분 좋은 것으로 만들어 준다.5
여기서 두 단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는 ‘사랑’love이고 다른 하나 는 ‘숨겨진’secret이다. 신비적 지혜가 사랑에서 나온다고 할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의미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라고 썼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의 사랑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든다고 했다. 신비생활이란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이 주입되는 것을 깊이 체험하면서 시작된다.
관상생활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이 불러일으키는 부드럽고 위안받는 느낌을 즐기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아마 어두운 밤을 겪은 후)주입된 하느님 사랑은 존재 깊은 곳에 불을 붙인다.
이러한 내적인 불은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신비 체험 중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현상이다. 『무지의 구름』저자는 그것을 ‘사랑의 눈먼 감동’이라고 불렀다. 헤시카스트들도 항상 하느님의 불에 대해서 말했다.
처음에는 이 불이 불처럼 생각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불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일컬은 역설적 표현을 빌리면, 어두운 불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정화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 정화의 초기에 하느님의 불은 영혼을 뜨겁게 하기보다는 목재(영혼)를 건조하여 준비시키는 데 다 사용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불은 열을 발산하기 시작하고, 대부분의 영혼은 사랑의 연소를 체험하게 된다.6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고 나서 목재에 불이 붙는다. 결국 그 불은 불꽃을 튀기며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 상처를 입히는, 살아 있는 사랑의 영靈이 된다. 이 사랑의 산 불꽃이 바로 성령이다.
다음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표현은 ‘숨겨진’이다. 숨겨진 지식은 신비로운 지식이다. 즉, 무지의 구름 속에 있어 분명히 감지할 수 없고, 어둡고 일정한 모양이 없는 지식이다.
그것은 무無나 공空 또는 비어 있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지식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불쌍한 관상가는 괴로워서 울부짖는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신비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친교는 지력이나 다른 능력들로는 알 수 없는 비밀스럽고 어두운 것이다. 이러한 능력들로는 친교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대신 성령께서 주입하여 영혼 안에 순서에 맞게 넣어 주신다. 아가(2,4)에서 신부가 말하듯 영혼은 친교가 어떻게 생기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7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명백하고 특별한 지식인데 그것은 앎이라는 통상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습득되고 일상생활에, 그리고 과학과 학문에 사용된다.
반면 다른 하나의 지식은 애매하고 어둡고 일정한 모양이 없고 포괄적이고 사랑이 담긴 지식이다. 이것은 감춰져 있는 신비적 지혜다.
그래서 역설이 가능하다. 이 애매하고 어둡고 숨겨진 지식은 빛이다. 그 빛은 하느님의 빛이다. 그 강렬한 빛은 영혼을 눈멀게 하고 어둠에 빠뜨리며 큰 고통을 일으킨다.
내적인 빛은 내적인 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신비 체험의 중심이고 핵심이다. 그 불과 빛은 분리할 수 없다.
빛은 불과 똑같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 빛을 결코 획득할 수 없다. 하느님만이 그 스승이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 거룩한 교육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
관상 중에 하느님께서는 매우 고요하고 비밀스럽게 영혼을 가르치신다.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려 주시지도 않고, 아무 말씀도 없이, 그리고 육체적 • 영적 능력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다만 침묵과 평온 속에서 그리고 모든 감각적이고 현존하는 사물에 대한 어둠 속에서 가르치신다. 어떤 영적인 사람들은 이 관상을 미지에 대한 앎이라 부른다.8
미지에 대한 앎! 이 말은 디오니시우스 때부터 부정신학적 전통을 따라 거듭 나타난다. 그 뜻은 거룩한 지혜를 알기 위해서는 보통의 지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무지의 상태여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설명한 신비신학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저서들은 이 비밀스럽고 사랑이 담긴 지혜에 관한 온전한 학문을 상술했다.
그의 저서들은 그 지혜를 탐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성경과 스콜라 신학이 사용되었다.
성경 해석은 오늘날 신비신학이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도전 가운데 하나다. 그 누구도 20세기를 아름답게 꾸민 성서학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누구도 문학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을 지나칠 수 없으며, 역사성과 원저작자에 대한 평가, 문학 장르에 관한 지식의 성장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접근 방식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내용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비적 접근 방법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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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Ascent of Mount Carmel, Prologue 4 (이하 The Ascent) 4 The Dark Night, 2.17.2. 성 요한은 신비 신학을 “사랑학” (The science of love)이라 부른다. 참조: The Dark Night, 2.17.6; 2.18.5. 5 The Spiritual Canticle, 27.5. 5 The Spiritual Canticle, 27.5. 6 The Dark Night, 2.12.5. 7 같은 책 2.17.2. 8 The Spiritual Canticle, 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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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1: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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