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만 있으면 소설이 되는 줄 알았다. - 유인규
오프사이드를 모르고 스트라이커로 골을 넣을 수는 없었다.
보크를 모르고 투수로 공을 던질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는 근본 있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예창작과의 문을 두드렸다.
일주일에 강의가 한 개씩 열렸다.
내용은 충분히 좋았지만 온라인으로 찾아보는 녹화된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촬영을 모두 마치고 편집까지 완료한 완성본이지만 몇 월 몇 일 공개로 표시되는 OTT시리즈 같았다.
요즘엔 이런 강의 여기저기에 많이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강좌가 있는 클래스101, 패스트캠퍼스, 아트앤스터디 등 강의 플랫폼부터 무료 교양 프로그램만 해도 세바시, 차이나는 클래스, 비밀독서단,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등 넘쳐났다.
유튜브에 문예창작을 검색하면 '문창과 학생이 알려주는 문예창작과 현실', '문창과 오지 마세요' 등 비판적이고 흥미로운 내용도 찾을 수 있었다.
진도는 계속해서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헛헛했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연락주세요.'
문창과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너무 좋은 생각이에요.', '응원합니다.', '저희 지역은 안생기나요.'
반응은 뜨거웠지만 1차예비모임과 2차예비모임을 거쳐 실제 모임 참여로 이어진 인원은 4명이었다.
서로를 크루라고 부르기로 했다. 화이팅을 외쳤다.
일주일에 한 편씩 열심히 글을 썼다. 격주로 모여서 합평 형식으로 글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크루들은 목표가 비교적 확실했다. 욕심도 있고 의욕도 충만했다.
강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교수님들은 친절하고 좋지만 평가가 너무 후한 것 같다고 했고, 누가 봐도 부족한 글에도 잘쓴다잘쓴다 해주는 것도 많이 아쉽다고도 했다.
적어도 우리끼리는 서로의 글을 냉정하게 평가하자고 했지만 그래도 비판은 서로에게 조심스러웠다.
글은 계속 쌓였다.
다만 이렇게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고만고만한 글을 쓰고 고만고만한 의견을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분위기였다.
그저 글쓰기를 꾸역꾸역하는 중일 뿐이었다.
크루들이 다섯 번째 모였을 때쯤 마침 1학기 종강모임이 있었다.
"저희 모임에 와주세요."
여섯 개 테이블을 길게 붙여 만든 자리의 한쪽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멤버들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계시던 교수님께 물었다.
흔쾌히 도와 주시겠다고 했다.
여섯 번째 모임에 바로 교수님을 초대하기로 했다. 주말은 시간이 어렵다고 했다. 일요일이던 모임 일정을 기꺼이 수요일로 옮겼다. 장소도 평소 모임을 진행하는 잠실이 아니라 교수님 편의를 조금 고려해서 시내로 잡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은 시내의 적당히 낡은 카페는 음악소리가 조금 컸지만 별도의 칸막이가 있는 공간이 있어서 모임을 진행하기에 좋았다.
두번째 만난 교수님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다.
"좋은 얘기, 잘 쓰셨어요 하는 얘기 말고 냉정한 의견을 주시는 게 더 도움이 됩니다."
한 크루의 의견이었다. 모두 좋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아마 그 말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로 멘트의 수위를 조절할까 고민했던 교수님이 어떤 기준을 잡으셨던 것은.
아니면 눈빛이 너무 의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그만 독립출판사를 직접 운영하시는 교수님은 편집자의 관점에서 의견을 주시겠다고 했다.
이번주와 지난주 올린 글들을 모두 읽었다면서 일단 몇 번째 모임인지를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매주 계속 새 글을 쓰는 것보다 한 편을 수정해 가면서 제대로 쓰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시를 쓰려는 이유가 있나요."
"소설을 쓰려는 이유가 있나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안 느껴져요."
"그냥 에세이에 대사를 쓴 거예요. 구성이 없으니 밋밋해요. 읽는 재미가 없어요."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아재개그 느낌이에요."
"나름 반전이 있는 소설이지만, 진행이 평면적이에요."
"타고난 이야기꾼이지만, 글은 다른데 이야기는 다 똑같아요. 소재 발굴이 필요해요."
평가자를 해본 사람은 안다. 무엇 무엇이지만이라고 함은 뒷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 전에 살짝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말이라는 것을.
왜 시를 쓰세요 라는 말은 아마 시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뜻이다.
왜 주인공을 여자로 설정하셨나요 라는 말은 글이 여자의 말투가 아니라는 뜻이다.
왜 소설을 쓰세요 라는 말은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밋밋하다는 뜻이다.
"소설이 기와 결만 있어요."
매운맛을 기대했는데 제대로 불닭볶음면 맛이다. 이 정도도 많이 걸러서 말씀하셨을 텐데.
살짝 그로기 상태가 왔다. 의기소침해졌다. 아마 1시간쯤.
근본 있는 글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
그래도 매운맛은 원래 중독된다. 게다가 참으로 고마운 매운맛이다.
자 이제 기승전결의 승과 전을 써볼까. 그런데 어떻게 쓰는 거지.
첫댓글 일기x사유 = 에세이
일기x대화 != 소설
에세이x대화 != 소설
에세이x스토리 = 소설
좋았던 점 : 스토리가 있는 에세이라 서사를 따라가며 읽었습니다. 글쓰기도 어렵지만, 합평도 정말 조심스럽고 어렵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그런 과정이 잘 묘사되서 좋았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깊이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신 글로 짐작됩니다. 꾸준해 써 나가시는 열정도 대단하시고요.
아쉬운 점 : 문창과에서 아쉬움을 많이 경험하신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열정과 노력이 이미지화 되어 눈을 떼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 자신도 글 속의 합평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듯 착각에 빠질정도로 긴장되기도 하고 흥미진진한 글이었습니다. " 진도는 계속해서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헛헛했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썼다. 격주로 모여서 합평 형식으로 글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욕심도 있고 의욕도 충만했다. 글쓰기를 꾸역꾸역하는 중일 뿐.." 이라고 하는 글에서 의욕도, 열정도 식어버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마음을 다잡는 동기부여가 되어 좋았습니다.
"오프사이드, 스트라이커, 보크, OTT시리즈, 크루..." 등과 같은 단어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나이 먹은 독자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 독자의 마음에 거부감 없는 언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또한 "고만 고만한 사람들이, 고만 고만한 글을 쓰고, 고만 고만한 의견을 나누는데..."의 문장을 읽으면서 두번째, 세번쨰의 반복된 글은 유사한 대체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여하시는 강의마다 열정과 즐거움이 엿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