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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순천 실고를 거쳐 조례저수지를 지나 대동까지 연결되는 도로와 순천에서 광양을 거쳐
진상,하동까지 연결되는 도로 교차점의 윗쪽에 있었다.지금은 교회가 들어서 있다.
형님을 키우기 위해 기반을 잡은 하동군 화개면에서의 편안한 삶을 접고 순천으로 이사왔을
당시에는 비록 기와집이었으나 한 쪽으로 기울어져 큰 기둥으로 옆을 받쳐놓은 상태였다.
내가 5살 때였다.뿐만 아니라 비포장 도로 옆에 있어 아무리 통행차량이 적었던 시대라 할지라도
먼지가 날아들어 마루에는 항상 뿌옇게 먼지로 덮여 있어 앉을려면 수건이나 걸레로 엉덩이
면적만큼 먼지를 쫒아야 했다.소음도 심했으니 주거지로서는 아주 열악한 곳이었다.
길과 집 사이엔 작은 도랑이 있어 군데군데 그 도랑을 막아 물을 고이게 한 다음 수시로 신작로에
물을 뿌려 먼지나는 것을 맊으며 살았다.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밥이라도 먹을려면 반드시 물을
뿌리고 먹어야 했다.
담 안쪽엔 장독대와 평상이 있었는데 비록 먼지가 났지만 앞이 훤히 트여 여름엔 무척 시원했었다.
옆쪽으로는 전빵터 겸 부엌과 방 한칸 그리고 화장실을 품고있는 아랫채가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도 그 아랫채는 우리 형제들의 공부 방으로 씌였다.
나중에는 순천 실고가 순천공고로 바뀌면서 주,야간 학생이 많아지자 자취나 하숙방의 수요가
늘어났다.농사를 지어도 고생만 됐지 인건비도 안나올 정도였으므로 어머니는 고심끝에 그 아랫채를
헐고 블록과 스레트로 방을 여러개 들였다. 얼마 안되던 논을 팔아 지은 것이다.
자취방을 내 주는 댓가의 수입이 농사짓는 것보다 편하고 많다는 계산하에 스레트로 개조하여 방을 많이 만든 것이다.그 계산은 분명 맞아 떨어졌다.조례지구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본 채도 새마을 주택개량 융자를 받아 양옥으로 지었고 그 곳에서 40여년을 사는 동안 부속 건물이나 뒤안은 지었다 부쉈다 .어머님의 애환이 많이 깃든 집이었다.
화개의 맑은 개천에서는 '지소'라는게 있었다.닦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일로 논도 사고 밭도 사서 재산을 제법 불렸는데 어느날 보니 형이 인물도 잘생겼고 영리하여 큰 인물이
될 것 같더란다.
그래서 그곳의 안정된 삶을
접고 형을 공부 시키기 위해
모험을 하시기로 작정하셨단다.순천에 사시는 큰당숙의 힘을
빌어 순천으로 이사를 나왔으나 시골 전답 팔아봐야 순천에서
얻은 농토는 겨우 여덟마지기.
그것도 두지마을 앞이었고
나중에 신월쪽으로 나오다 보니
여섯마지기로 줄어버렸다.그러니 농사만으로 살 수가 없었고 틈틈히 벌어야 했다.
그래서 화개에서 만든 문종이(한지)를 싸게 사 와 팔 생각을 하셨고 결국 인근 장날마다 리어커에
문종이를 싣고 다니면서 파는 문종이 장사가 되셨던 것이다.그러나 신통챦았다.
사실 그런 수입 보다는 어머니의 달비장사,보따리 장사 수입이 더 나았다.
나라가 못 살수록 여자들이 돈을 버는 경우가 많다.지금 필리핀에서도 남자들의 일자리가 없어
여자들이 서비스 업에 종사하면서 가게를 꾸려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과거에 다 그랬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안해 본 일이 있었겠는가?내가 기억 하는 것만 해도 아버지는 광양에 가서 '하풍단'이라는 알약을 떼와서 다른 동네로 팔러 다니기도 했다.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다.나도 배가 아파도 하풍단,머리가 아파도 하풍단을 먹었으니까.
또 서면과 광양 사이에 있는 진등재로 봉용을 캐러 다니기도 했고 할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침술로
밭곡식을 얻어 먹기도 했다.아버지가 침술을 독학으로 익힐 무렵 조례마을의 허경만 의원 할머니를 식물인간에서 회생시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몇 년 더 하시고 돌아가시게 했던 공적도 있으셔서 주변은 물론 경상도,심지어 인천에서까지 침을 맞으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침술은 80년대 후반부터 그곳 높은 한질을 떠나올 때까지 빛을 발했는데 면허가 없어 요금은 주는
대로 받았으나 손님이 많아 시골 노인 수입으로는 쏠쏠했다.
순천장도 웃장과 아랫장이 5일 주기로 섰다.그 사이에는 광양장이 있다.아버지는 리어커에 문종이를 종류별로 싣고 빗자루등 생필품도 몇가지 얹어
장마다 쫒아 다녔는데 광양 장날은 거리가 멀어
새벽에 출발 하셨다.
그런데 방학이면 심심해서였는지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셔서 겨울 추운 새벽에 계실로 짠 큰 수건으로 머리부터 칭칭 감고 때로는 밀고 때로는 타면서
머나먼 광양장까지 따라 다녔다.
정말 싫은 때도 많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맘이 약해 거부를 못하고 따라 다녔다.그나마 점심 때 장터에서
먹을 단팥죽(팥칼국수) 생각을 하면 위로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 생각하신다고 가끔
곰탕이나 국밥을 사주셨다. 하지만 난 노랑내 나는 곰탕보다 팥죽이 훨씬 좋았다.
고객의 수준과 니즈(needs)에 맞게 공급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데 공급자가 자기 기준에 맞췄기에 고객만족을 기대하기가 힘든 것이다.
순천에서 광양 갈 때 초입은 지금도 내리막인데 바꿔 말하면
광양에서 순천으로 오는 길은 오르막이다.그것도 꽤나 길다.
그 곳을 지나오기가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달빛이 밝은 날에 술취한 엿장수가 앞에 지나 갔는지 길바닥에 군데군데 엿가락이 떨어져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그것을 주워 먹으며 거리감각 없이 재미있게
순천까지 왔던 기억이 난다.어머니의 고생은 차마 글로 쓸 수가
없을 정도라서 생략한다.
어쨋든 이런 부모님들의 고생 덕택으로 형은 차관급까지 성공적인 공직생활을 하여 부모님 기대에 부응했고 7남매중 4명을 대학
졸업 시켰으니 화개를 떠나올 때 목표는 최소한 80%는 달성
하셨다고 생각한다.다만 화개에서 편안한 삶을 사실 수 있었을텐데
자식들을 위해 사서 고생하신 것이 좀 안타깝고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한정적인 경제력 때문에 딸이라는 이유로 희생한 누나나 순서를 잘못 타고나 부모님 뒷바라지를 받지못한 바로 아래 동생에게는 한없이 미안한 생각이 든다.우리집 내력을 쓰자면 책 한 권도 쓰겠지만 이쯤에서 대강 줄인다.
실고로 들어가는 길과 광양가는 길 사에에는
'하꼬방'이 하나 있었다.도랑 위에다 판자집을 지은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무허가 판자집인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하꼬방'은 판잣집을 일본말로 그렇게 부르는게 아닌가 싶다.그 하꼬방이라 불렸던 집은
주인이 참 많이 바뀌었고 그 주인들 모두 가난한
삶을 여러 방법으로 지탱하며 살아 가는
사람들이었다.하꼬방은 바닥이 판자였고 그 아래로는 도랑물이 흘렀다.방은 두 칸이 있었고 작은
부엌이 있었는데 그 하꼬방 옆이자 실고 들어가는 길 아래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처음 주인은 홀로된 아주머니가 아들 하나 딸 둘을 데리고 살았으며 생계수단으로
막걸리를 팔았다.그 하꼬방은 지금 기준으로라면 실내포장마차였던 것이다.
제일 맏이 아들이었는데 그 분은 나중 건축 기술자가 되어 우리 집을 지어주었었다.
그 아래 큰 딸은 일찌감찌 서울로 올라가 목욕탕 때밀이를 한다고 들었다.그 아래 딸은 나보다 2년
위던가? 내가 학교 다닐 때 광만이 누나 뒤를 이어 급사 일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학교 구내방송을 하는데 내가 원고를 국어책 읽듯이 하자 쇼프로그램의 아나운서처럼 목소리를 높여 "안녕히 계십시요"라고 시범까지 보여줬던 생각이 난다.이름은 ㅇㅅ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 가서 돈을 번다던 큰 딸이 노랑머리 아이를 낳아 낙향을 하여 엄마의 절규속에 한동안 칩거하다 나중에는 내놓고 키웠다.그 꼬마 이름이 아마 '미진'이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계기는 1960년 피임약이 개발 되고서 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남녀관계의 책임은 임신이라는 상태로 오로지 여자의 책임이 되었다.
손가락질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남자가 떠나면 애기 육아도 도맡아야 했다.
임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합리한 결혼을 해야 했고 또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육아때문에 경제활동 능력을 상실하여 구타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그런데 피임약의 등장으로 임신에서 자유로와진 여자들의 입지가 훨씬 강화되어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이며 IT산업 발달등 산업 체계도 여성들의 능력을 요구하고 있어 향후 여성들은 60년대
이전의 남성들이 누려왔던 우월적 지위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맏딸 ㅇㅈ 누나도 없는집 큰 딸로서 살림 밑천 역할을 하다가 결국 임신의 책임을 혼자 떠앉은 채
혼혈아 하나를 얻고 보편적인 인생행로를 험난한 길로 바꿔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람기가 있어서 그런 일이 생긴게 아니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했던 그시대 우리
누나들의 삶이였기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두 번째 살았던 사람은 서울에서 내려온 과부였다. ㅅㄱ 이라는 딸과 ㅇㅅ 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광양 가는 쪽 연동마을에 사시는 허씨 아저씨가 드나들면서 63년생 ㅅㅈ 라는 딸을 하나 낳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ㅇㅅ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ㅅㄱ이라는 딸은 서울로 식모살이를 보내고
ㅇㅅ이라는 아들은 우리집에 맡겨놓은 채
우리 어머니와 달비장사를 비롯 보따리
방물장사를 다니셨다.
ㅇㅅ 이라는 친구는 나보다 두 살인가
위였는데 먹성이 좋아 없던 시절이라 흉거리가 되기도 했다.ㅇㅅ이 엄마는 기분파라 수입이
있으면 모으기 보다는 써버리는 사람이라
집에 돌아 오면 당시 먹기 힘들었던 닭도
삶아주고 돼지껍질도 볶아 주는 등 ㅇㅅ이와 ㅅㅈ를 잘 먹였다.
사실 우리집에서 밥을 먹는 기간은 눈치밥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돌아오면 보통 이웃들이 먹어보지 못하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으니 기쁨은
두 배였을 것이다.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ㅇㅅ이가 닭다리를 거리에 까지 가지고
나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먹고싶어 '소병'이 난 적도 있다.'소병'이라는 용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영양실조에서 오는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어서 오는 병'을 그렇게 불렀다.
'달비'장사란 아주머니들이 시골마을을 돌아 다니며 여인네들의 머리를 잘라다
가발 공장에 넘기는 장사였다.당시는 파마가 어색하던 시대였고 대개의 여자들은 낭자를 틀어
비녀를 꼿던 시절이었기에 머리를 사기가 쉬웠다고 한다.그 때에는 짧은 머리를 한다거나 파마를
하는 것은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즉 보편적인 일이 아니었기에 이웃들이 흉을 볼까봐 선뜻 하지를 못했다고 한다.어쨋든 그 벌이가
남자들 수입보다 나아서 우리 동네 엄마들은 거의 모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달비장사를 다녔었다.
ㅇㅅ이 엄마는 목소리가 허스키보이스였고 혼자사는 과수댁이 되다보니 거친 면이 있었다.
달비장사를 갔다 돌아오면 연동에 사시는 허씨 출입이 잦아진다.당시 귀하다는 자전거로 움직이는 분이셨는데 어느날 한 길과 방앗간 뒷담장 사이로 흐르는 도랑에서 왕소금에 방금 잡은 닭 간을
잘근잘근 씹으며 담배를 하나 물고 닭을 손질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 분의 본 처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용납이 됐던 것 같다. ㅅㄱ누나는 서울에서 식모를 살다가 자주 내려 왔는데 손버릇이 나빠 쫒겨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동네에서도 쌀을 훔쳐 튀밥을 튀겨먹고 그랬다.
약 4~5년 정도 살다가 연동 사시는 허씨와의 사이에 예쁜 딸을 하나 얻었는데 그 얘가 서너살 때쯤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고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효주"양 유괴사건이 일어 났다.
나중에 잡힌 범인이 그 때 우리집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자랐던 ㅇㅅ이였다.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다.커나온 환경과 성장 후 환경등이 그런 일을 저질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험하게 살아온신 그의어머니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도 지금 50대 중반이 됐고 막내 딸도 40대
후반이 됐으니 세월 참 빠르다.다행히 유괴 살인이 아니라서 중형은 면했었을 것이다.
세번째 살았던 사람은 특이한 부부였다.남자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인태리이자 인물도 좋았는데
직업은 부근 시골장을 돌며 동냥을 하는 사람이었다.그래서 그 집에는 생선을 비롯 음식 재료가
항상 풍성했다.하지만 그의 부인은 잘 씻지를 않고 집 밖에를 잘 나오지 않으며 모든 옷은 털어서
입지 절대로 빨아서 입는 법이 없었다.그리고 애도 없었다.대신 '재동이'라 불리우는 커다란 황구를 키웠는데 아주 순하고 잘 먹여서 체격도 좋았고 영리하여 길가에 살면서도 차에 치이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숫캐라 동네마다 다니면서 좋은 종자를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가끔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리면 그 여자는 따발총처럼 말을 뱉는데 요약하면 '재워주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면
되냐?'는 것이였다.남자의 요구대로 잠자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남자는 이웃들에게 항상 웃으며 잘 대해 줬는데 장터에서
동냥을 할 때 잘 안주는 상인들에게는 험상궂게 돌변한다고 했다.
그 분은 초상집 마다 쫒아 다니며 만장을 써주고 술과 밥을 얻어 먹으며 궂은 일을 다 도와 주었다.
하여튼 별난 인생이었다. 어느 여름날 재동이라는 개는 나간지 며칠이 지나도 안들어 오자
아주머니는 몸져 누었다.아마도 튼실하고 순해서 누군가가 복날을 전후하여 잡아 먹었을 것이라고 동네사람들도 그 아주머니도 생각했다.
한 참 후 그 집은 무허가 건물로서 철거 되면서 그 부부도 어디론가 떠나갔다.
하꼬방 다음에는 우물이 있었고 사철나무와 잡목 울타리를 친 마루가 높은 집이 있었다.
그 곳에는 할머니 혼자 살고 계셨는데 샘 가에 사는 할머니라고 하여 우리들은 "새미가 할매"라고
불렀다.그 할머니는 흰 머리를 쪽지어 비녀로 찌르고, 항상 몸베차림으로 턱을 15도 정도로 올리고 반쯤 구부러진 등에다 뒷짐을 지고 다니셨는데 혼자 해먹기가 싫어서인지 아니면 양식을 아끼려고 그러셨는지 꼭 끼니 때만 되면 남의 집에 마실을 다니셨다.
그 때 인심으로는 끼니 때 손님이 오면 반드시 나눠 먹었었다.내가 더울 때 힘이 없어 고개를
들러메고 다니면 어머니께서는 새미가에 할머니처럼 콧구멍 속이 다 보인다'고 놀리셨다.
그러면서 코는 항상 아래로 쓰다듬어야 한다며 남자는 코가 잘생겨야 미남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코를 잡아당기는 버릇이 생겼고 그래서인지 지금 내 얼굴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 코가 되었다.그 좋은 경험을 내 자식들에게 전파시켜 주었는데 실천을 안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새미가에 할머니는 쥐를 잡아서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쥐고기로 돈 안드는 고기맛을 보셨던 것같다.할머니는 아들이 없었고 따님들은 생목 본동네
웃돔이라 불리는 산자락 쪽에 붙은 생목에서 살았고 가끔 들렸었다.내 또래인 할머니 외손녀도
있었다.그 집에도 방 한칸을 세 내서 사는 모녀가 있었다.당시 처녀였던 성순이 누님은 아마
지금 쯤 7순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이자 당시에도
할머니였던 분은 머리에 양철
다라를 이고 다니며 매일 아침
서는 역전장과 5일만에 서는
아랫장에서 생선을 떼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반찬은 항상
팔다 남은 생선이었기에 성순이
누나가 가장 먹고싶은 음식은
김치라는 말을 들었다.
그 시대에는 그랬다.돈이 들어가는 물건은 거의 사지 않고 안하거나
안먹거나 안입으며 견뎠다.
해가 진 후에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큰 다라를 항상 머리에 이고 퇴근(?)하시는 할머니 모습이
생생하다.나중에 성순이 누님과 어머니는 큰아들이 서울에서 돈을 벌어와 생목 길가에 집을 사서
편안한 생활을 하셨고 새미가의 할머니는 집을 팔아 생목 딸네 집으로 합쳤다.
그 집에는 어부인 아버지를 풍랑으로 잃은 3남1녀, 4남매를 둔 아주머니가 여천군에서 이사를
오셨다. 성은 윤씨였는데 끝자가 '근'자 돌림이었다.ㄱ근,ㅈ근,ㅅ근이었고 막내는 ㅅㅈ 였을 것이다.ㄱ근이는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양복점을 다닐 때 이사를
왔었다.그 아주머니는 우리집과 담을 함께쓰던 박센의 친여동생이었다.
그래서 오빠집에 많이 의지하며 살았으나 모두가 가난해서 물질적인 도움은 크게 받지 못했던 것
같다.ㅈ근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라 같이 많이 놀았다.달리기를 잘했던 기억이고 앞산과 뒷산을
뛰어다니며 함께한 시간이 많았던 친구다.걔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자개일을
배운다고 했다.장난삼아 쏜 화살이 그 친구 눈아래 꼿혀 시껍했던 적이 있었으나 아무 일없이
지나갔다.그 아래 ㅅ근이는 공부를 잘해서 순천고 후배가 됐다는 것까지 안다.
아주머니는 가끔 시댁식구들이 사는 여천쪽으로 가서 건어물을 얻어 오셨다.
먹을게 없던 시절이었기에 ㅈ근이랑 ㅅ근이는 멸치와 고록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고
난 맛잇게 얻어 먹었었다.고록이 꼴두기 새끼라는 것은 어른이 돼서야 알았지만 멸치보다
상위 식품이었던 것은 분명했다.가끔 한 줌씩 얻어다 여름에 물말은 보리밥에 고추장을 찍어 함께
먹으면 꿀맛이었다.
나중엔 그 아주머니에게 신이 내렸다며 무당이 되셨는데 다음에 쓸 그 옆집 아주머니도 신이 내린
것을 보면 아마도 생계를 위한 가짜 무당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난 현남이 우리동네지만 사범학교 다니던 시절에 운동을 지나 생목고개를 많이 넘나들었네요. 이글에서 말한 동네가 생목에서 사범학교(현재-실업고교)로 가는 중간에 길죽히 띄엄띄엄 자리잡은 그 동네를 말하는 것인지?
총무이사의 글솜씨가 좋아서 기억을 더듬어가기가 수월하지만 그래도 나이탓인지 가물가물합니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