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의 간증문으로 중요해진 구원의 정의
지난 5월 2일에 공개된 박진영 씨의 간증문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가 유명 연예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통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지목한 ‘구원파’와 관련된 문제제기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한 사람의 종교는 그 사람의 자유다. 누가 무슨 종교를 갖든지 어떤
사상을 가지든지 그것은 자유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개인 고유의 영역이다. 그래서 지금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은 ‘마녀사냥’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나는 이번 일로 기독교회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도 건강한 토론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종교가
우리 시대에 왜 필요한가?’
또는
‘종교는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면 이 일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왜 구원파를 경계하는지, 왜 구원파는 그토록 구원을 강조하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파도 기성교회도 서로 같은 성경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바른 구원론과 바른 신앙에 대해서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구원파의 박옥수 목사가 올해 부활절에 한 설교를 들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일이 헛일이 되게 살지 말자!”고
말한다. 그것은 구원에 대하여 죄 사함의 확신도 없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확신도 없이 살아가는 기성교회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지적이 아닐까?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왜 그리스도인은 늘 죄 짐에 눌려 살며, 끊임없는 죄책감 속에서 사는가 하는 문제제기다. 이는 기성교회에서
소위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쉽게 말하자면, 구원파 신도와 기성교회 신도를
비교해 볼 때, 누가 더 구원의 감격과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기성교회는 구원의 확신과 죄 사함의 감격 속에 살고자 하는 구원파를 향하여 무엇을 우려하는가?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은 거룩한 행실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데, 구원의
확신과 죄 사함의 확신만을 강조하면서 윤리를 배제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구원 받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았으니 앞으로 무슨 죄를 저질러도 나는 구원 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위험한 가르침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리라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요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바른 구원론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나는 지난 해 즉, 2017년 5월~6월에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여덟 차례 설교를 한 바 있다.
아래의
주소를 클릭하면 그 설교를 읽을 수 있다:
http://cafe.daum.net/Wellspring/VOL1/12
구원파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구원이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위의
설교를 읽으면서 같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더욱 건강하고 풍성한 생각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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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생각해볼 문제는, 성경은 무슨 책이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이 정감록은 아니다. 성경은 율법이나 훈계만
가득 있는 법전도 아니다. 성경은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
성경이 현대과학을 말하거나 국제정세에 대한 비밀을 암시하는 어떤 비밀의 책으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2016년 3월부터 5월까지 ‘성경이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한 바 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걸친 성경의 이야기를 열 개의 설교로 나누어 다룬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먼저 알고 읽는다면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8장에는 에디오피아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이 성경을 읽으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라고
전도자 빌립에게 한 말이 나온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아 신뢰할만한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서로 생각을 나누고 독서를 하는 등의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알아가려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다룬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설교 시리즈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물론 이것도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한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소개하는 글:
http://cafe.daum.net/Wellspring/V1q1/25
하나님의
경륜 시리즈 설교안 전체:
http://cafe.daum.net/Wellspring/V1q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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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생각해 볼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기독교회 안에 속한 종파는 많다. 로마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개신교회, 영국성공회 등의 네 가지 주요 종파 안에 많은 분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교단(denomin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그룹은 다른 그룹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도 한다. 로마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을 형제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각 사람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018년 2월~3월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설교한 바 있다.
이 시리즈 설교는 5개로 구성되며 신학자 한스 큉의 책, ‘그리스도교’의
앞부분을 주로 참고했다. 한스 큉은 종교간의 대화가 없이는 세계 평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 각 종교가 자기 종교의 근본을 탐구할 것을 주문한다. 나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엽말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틀리다 하면 우리는 영원히 분열을 멈출 수 없을 것이며, 기독교회의 소임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건전한 토론도 이번 기회에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http://cafe.daum.net/Wellspring/VZaQ/20
가수 박진영의 간증문으로 부상하는 구원의 정의에 대한 논의.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