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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에녹의 승천은 영전인가 유배인가?>의 줄거리:
에녹의 승천이 영전입니까 아니면 귀양입니까? 질문을 바꾸어서, 에녹의 승천이 부럽습니까 아니면 두렵습니까? 지금 당장 승천하게 된다면 기꺼이 예!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것 저것 아쉬운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의 맥락에서 정의하자면 에녹의 승천이 부러워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승천이 부럽지 않으면 아직 나는 온전히 신앙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의 승천은 영전인가 유배인가?
(창5:1~32)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에녹의 승천은 영전인가 유배인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승천, 하늘로 올라간 거 아닙니까?
용이 승천한다, 이런 얘기에서도 우리가 느끼는 뉘앙스입니다만, 승천이라는 단어는 유배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안 맞잖아요, 영전이라는 말과도 아주 적합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동류의 개념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좋은 일이라는 거예요.
그런 게 승천인데 왜 유배일까 하고 물어보는 것일까.
그렇게 물어봐야만 됩니다.
에녹이 승천한 것은 영전이라든지, 좋은 일로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우리 마음의 실제 상태를 염두에 두면, 이것은 천국 유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겁니다.
이 질문을 바꿔보면 좀 더 실감이 날지 몰라요.
여러분, 에녹의 승천이 부러우세요? 아니면 두렵습니까.
지금 승천한다면 좋으세요, 두려우세요?
다시 한 번 질문해보죠.
같이 일하는 동료직원 중에 영업부 김 과장님이 있습니다, 그 김 과장이 함께 점심식사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복권을 샀어요.
나는 속으로 비웃었어요, 예수 안 믿으니까 사행심에 가득 차 저런 복권이나 사고 그런다고…
근데 그 복권이 20억에 당첨됐습니다.
20억 로또 당첨과 에녹의 승천, 어느 게 부럽습니까?
김 과장님이 20억 로또 당첨되면 아마도 위장병 생길 겁니다.
그 부러움과 부러움에서 나아가 원망과 화딱지가 나잖아요, 김 과장님이 특별히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내게서 없어진 것도 없는데 괜히 화딱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왜 에녹의 승천이 부럽지 않을까요?
승천이 뭡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20억 없던 사람이 20억 있는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부러워요.
김 과장이 부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약 오르고 부러워요.
근데 에녹이 하늘로 올라간 거, 별로 부럽지 않아요. 별 거 아닌 것 같아요.
여러분, 오늘 이 에녹의 이야기가 무지무지하게 중요하다는 걸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데려가셔서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앞의 4장에서 아벨과 에노스의 이야기와 함께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대학에 컨텐츠 학과라는 게 있어요.
역사적인 고전 문헌들을 살펴가면서, 그 속에서 현재 오늘 이 시대에 되살려서 창작 작품의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내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내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대장금’이에요, 대장금.
대장금에 관한 기록은 역사 기록 중에 ‘중종 때 왕의 건강을 담당했던 의녀가 있었다.’ 이 한 줄입니다.
요 한 줄을 가지고 온 세계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열광하게 했던 대장금이라는 대하드라마가 만들어졌던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승천했다고 하는 이 하나의 얘기가 구약성경 전체의 색깔을 바꿔버리는 얘깁니다.
그래서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 중 첫째가 아벨, 그 다음에 바로 에녹이 나오는 겁니다.
아벨의 제사, 에녹, 거기다가 히브리서에서 얘기하지 않은 에노스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의 의미까지 보태면, 이 세 사람의 등장으로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가 완전히 결정돼버립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구약에 나오는 선민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자세로 관계를 맺어야 되느냐,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본질적인 내용을 포함해야 되느냐, 하는 걸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녹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뭔가 깊이 생각하고 얻는 게 없다고 하면, 구약성경을 오해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자, 그게 뭔가 한번 살펴봅니다.
우선 에녹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부럽게 느껴지지 않는 상태부터 점검해봅니다.
보세요, 에녹이 단명한 겁니다, 물론 죽은 건 아니에요, 몸이 죽은 건 아니라서 단명하다는 말이 100% 적합한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지구상에서의 그의 생은 끝난 것 아닙니까.
이걸 어떻게 우리가 실감할 수 있나 하면, 5장의 족보를 쭉 읽어보면 거의가 9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이 900세라고 쳐요, 마지막 부분에 보면 700세 대를 산 사람도 있지만.
대략 900세를 평균으로 치고 그걸 오늘날의 나이로 80이라고 쳐요.
그래서 그 옛날의 평균 나이 900을 오늘날의 80세의 나이로 환원시켜 계산하면, 에녹이 승천할 때의 나이 365세는 대략 32세 정도 됩니다, 30세 초반 정도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에녹의 삶이 30세 초반에 끝난 거예요.
세상의 삶만 염두에 두고 얘기하면 요절한 겁니다.
몸이 죽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는 없어진 거예요.
이래서 우리가 이 에녹의 승천을 바람직한 걸로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제일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잖아요.
자식이 30세인데, 하나님께서 나한테 물으시기를 ‘내가 네 자식을 승천시켜줄까?’ 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유, 승천은 좋은 일이고 뜻은 고맙지만 그래도 조금 더 이 세상에서 얻을 것 얻고 살다가 가게 해주세요!’ 이러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의문점이 뭐냐 하면, 본문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독보적인 공로가 드러났다고 그러면, 당연히 이 땅 위에서 무병장수의 축복의 기본바탕 위에다 개인적이고 가정적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경제적 측면에서 문화적 측면에서 모든 방면에서 안정과 평강과 형통과 성공을 누려야, 이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으로서 마땅한 것 아닙니까?
아니, 동행했는데 요즘 식으로 말해 30대 초반에 이 땅을 떠나야 된다고 그러면, 에녹은 괜한 짓 한 것 아닐까요?
괜히 혼자서 별나게 다른 사람 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데, 하나님과 철저하게 동행했다가 남들 다 평균 900세를 사는 동안에 혼자 3분의 1밖에 못살고 이 땅을 떠나게 된 거잖아요.
부럽지 않을 것 같아요.
승천시켜주신다고 그러면 오히려 두려울 거 같아요.
이 땅을 떠나는 승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다 뒤로 하고 떠나야 된다고 하는 이 승천, 이게 과연 은총입니까 아니면 하늘로 유배당하는 것입니까?
왠지 천국 유배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천국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는 걸,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 머리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입으로 고백까지 할 겁니다.
천국에서 한 순간이 지상에서의 최고의 순간보다 더 낫다는 것을 입을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지금이라도 곧 그 좋은 천국으로 승천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면, ‘아멘!’ 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한 우리 신앙의 현실이지요.
여러분, 예수님 믿는다는 것을 여러 방면으로 표현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맥락상 믿음을 표현하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승천을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로 좋은 일로 마음이 느끼는 상태, 승천을 진심으로 부러워할 수 있는 상태,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 계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 계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 계심을 아는 것과 다르다.
천국도 마찬가지에요, 천국이 있음을 믿는 것과 천국이 있음을 아는 것은 다르다.
천국이 있음을 믿지 않으면서 천국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교묘한 영지주의라고 얘기했었습니다. 그건 영지주의에요.
왜냐하면 천국이 있는 걸 아는 것으로써 내가 믿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이건 잘못된 거죠. 이건 영지주의에요, 영지주의.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가 믿는다고 착각하는 거, 이게 이상한 영지주의죠.
천국이 있는 것을 믿는다는 얘기는, 천국에 마음이 가 닿아있다는 얘깁니다.
마음이 가 닿아있다는 얘기는 천국을 실제로 지금 제일 먼저 좋아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지금 동시대에 엄청나게 많은 사실들이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모든 사실들은 나의 현실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에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내 이해타산과 관계없기 때문에.
마음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승천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천국에 마음을 주지 않으므로 천국이 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이 현실이 아닌 이유는 천국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에요.
천국은 사실이지만 현실이 아니에요.
왜 마음을 주지 않습니까?
천국에 계신 분들 중에 그 누구도 우리가 마음으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육체가 있는 곳을 떠나 어디로든지 다 갈 수가 있어요.
근데 어디로 가는지 잘 살펴보면, 다 그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 있는 쪽으로 가게 돼있습니다.
부산에 애인이 있습니까? 몸은 서울에 있으면서 마음이 부산에 가있습니다.
은행에 내 돈이 잔뜩 있어서 마음이 든든합니까?
그러면 언제나 마음이 그 돈에 가있는 겁니다.
마음이 해외의 풍경이 좋은 곳에 가있습니까? 그곳에 가서 휴가를 보낼 것에 마음이 다 가있는 거예요.
아니면, 미래에 내가 이룰 꿈과 비전에 가있습니까? 좋아하기 때문에 가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천국으로의 승천을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천국에 마음이 가있지 않기 때문에.
왜 천국에 마음이 가있지 않습니까?
천국에 계신 분들 중에 그 누구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믿음이 아니죠.
뭐가 믿음이 아니라고요? 승천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근데 문제는 승천이 부럽지 않잖아요?
승천이 부럽지 않으면 내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제일 좋은 일이 승천이라고 생각하고 확신이 들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게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지금 내가 승천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라는 것을 마음에 확신하고 느끼고 그렇게 바랄 수 없으면, 절대로 이 땅에서 될 수 없는 일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얘깁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해서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가지고 하늘에 가 머물고 있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동행하므로 승천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는 에녹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제일 좋아해서 하늘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동행이 가능했고, 그렇게 동행한 에녹을 하나님께서 더 길게 이 땅에 두시기가 아까워서 데려가셨다는 얘기에요.
세월호 참사가 아직도 우리에게 아픔이지만, 그중에 하나님께 마음을 둔 젊은이나 일반 피해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더 길게 있어봐야 좋은 일이라고 생겨봐야 하늘에서 가장 안 좋은 순간보다도 못한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아까우셔서 데려가신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계십니까?
지금 나이가 많으세요? 저희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십니다.
참 이게 이율배반적이죠? 어머니가 오래오래 사시기를 원합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에녹 같은 경우 30세 초반에 데려가셨습니다.
세상에 놔두기가 아까워서 일찍 데려가신 거예요.
그러니 이거 어느 것을 바라야 될지 모르는 거죠.
내 자식이 일찍 죽었다, 말씀드렸듯이 최연소 천국 합격입니다. 근데 안 기뻐요.
물론 같이 있었다가 없어진 것에 대한 슬픔은 있을 수 있지만, 이것도 이율배반적이죠.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러질 않아요.
자, 이 동행과 연관 지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게 뭡니까?
하늘을 실지로 내 현실로 느끼면서 마음을 거기에 두는 일이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좋은 것이 있다고 믿어지는 거예요.
근데 이 땅에 좋은 것이 있고 그것을 가지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어지는 이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 여기서 아벨의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에노스라는 뜻이 뭐라고요?
똑같이 아담이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아담과 에노스의 다른 점은 죽음을 포함하고 있고 병들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인데 죽음을 담고 있는 사람이고, 병든 사람이고 부패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있어서 이 세상 어느 것에 마음이 붙는 상태, 이게 바로 죽음의 상태고, 부패한 상태고 병든 상태라는 걸 아는 겁니다, 에노스는.
이걸 알아서 마음을 이 땅에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땅에 두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벨의 제사가 드려져야 됩니다.
그 아벨의 제사와 같은 마음가짐, 나는 이 땅에서 자꾸 좋은 것을 찾아가는 마음의 성향이 원죄적 성향이고 죽음의 성향, 부패의 성향, 병든 성향임을 알아서 아벨의 제사를 통해 자꾸 죽임으로써 마음을 하늘에 두는 자, 이 사람이 이 땅에서 동행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에녹과 같이 승천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현실로 느끼고 있으면서 지금이라도 하늘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그것은 곧 우리 마음이 이 세상에 좋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들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주님께로 마음을 보내드리고 있느냐를 묻는 거고.
그럴 때 동행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동행과 승천, 이게 연결이 되고 가능하려면 에노스와 같은 자아의식 - 내 속에 죽음이 있고 내 속에 부패와 원죄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병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내가 사랑하고 붙잡는 모든 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고, 내가 붙잡는 것까지 함께 망한다는 그런 자아의식 - 속에서 아벨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에녹과 같은 동행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이 땅에서 육체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있고 하나님과 평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평행한다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과의 만남의 지점이 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진행한다는 얘기에요.
동행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께 안기든 하나님께 업히든 하나님과 함께 가는 걸 말합니다.
비유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마음을 하늘나라에 계신 하나님께 둠으로써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흐르고 있는 힘으로 살아가는 전철 같은 거예요.
전철은 레일에 제3의 라인을 같다 붙이는데 그게 전기선이에요.
그 전기선으로 발전소로부터 전기가 흐르고 있는 동안에 전동차는 레일을 따라 움직여갑니다.
바로 이 레일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러면 무슨 힘으로 그 하나님의 뜻의 레일을 달립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으로 달립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평행하는 삶이 있어요.
앞장에서의 라멕,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의 아버지 라멕과 앞장에서의 라멕은 다른 사람이애요.
앞장에서의 라멕처럼 평행하는 삶이 있는데, 그 삶은 디젤기관차 같은 거예요.
디젤기관차라는 것은 전동차와는 다르게 연료 즉, 에너지원을 자기 안에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너지가 다 없어지는 걸 고갈된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노아를 낳고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셔서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살기가 너무 힘든데, 노아가 나의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왜 힘들어요? 인간의 삶이 왜 힘듭니까?
디젤기관차처럼 내 안에서 삶의 에너지를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깔아놓으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정해진 그 레일을 가려고 하지 않고, 맨땅을 기차가 달려가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맨땅을 달리는 기차가.
그리고 자체 안에 에너지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힘을 내가 끄집어내야 되기 때문에, 자가발전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이 뭡니까?
내가 고갈되었다, 탈진해버린다, 재충전, 수고로움, 이게 다 타락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마음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전류가 흐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을 때, 하나님이 깔아놓으신 레일 위에 얹혀 지고, 얹혀 져서 레일 위로 달리는 힘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하늘로 안 올라가느냐?
하나님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 땅에 있는 것을 가지면 좋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으니까.
이것이 에노스라고 하는 이름이 말하는 대로, 이 땅에서 자꾸 소원이 생기고 이 땅을 향해 소원이 생기는 것 자체가 과녁이 빗나간 것이고, 유전 죄의 체질 때문에 생기는 죽음이고 부패고 병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아벨의 제사와 같은 십자가의 제사를 통해서 이 땅에 대해서 자꾸 끌어당기려는 마음이 죽어버려야 하늘이 현실로 느껴지는데, 이 아벨의 제사 같은 십자가의 제사를 생활화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하늘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승천이 유배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아니? 웬 30세에 승천? 내가 50이 넘고 60이 돼도 승천이라면 거부해요, 좀 더~ 내가 이제까지 이루지 못한 것도 이루고, 한이라도 풀고 갑시다.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에너지가 주어지지 않고 뜻이 주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묘하지요?
그러니까 아벨과 에노스와 에녹, 이 세 사람의 조합 속에서 구약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행간의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는 현미경이 주어지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비교적 천국에 대한 개념이 희박합니다.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에녹이 승천함을 통해서, 그리고 승천을 부러워하기 위해서 에노스와 같은 자아의식이 있어야 하고, 아벨과 같은 제사가 날마다 드려져야 된다는 이 구조 속에서 구약성경의 의미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아! 이 에녹의 이야기는 정말 중종 때 한 의녀가 임금의 건강을 담당했다는 한 줄의 이야기가 대장금이라는 큰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과 같은 의미 아닙니까?
에녹의 승천!
내가 지금 부러워하고 있는가, 두려워하고 있는가?
승천이 영전으로 느껴지는가, 아니면 유배로 느껴지는가, 한번 점검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머리로는 아는데 입으로 시인까지 할 수는 있는데, 지금 당장 천국으로 오라 하면 왠지 꺼려지는 이 마음, 아직도 유전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벨의 제사인 십자가의 제사를 생활화함으로써 에노스의 자아의식이 날마다 작용하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에녹처럼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하루하루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우리의 현 위치를 볼 수 있게 하여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히 나그네로의 마음가짐 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