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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국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읽고 -
2018. 10. 백란주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 말하는 까뮈의 말이 실감나는 오후, 김애란을 만났다. 그녀는 모순이었다. 나와 띠 동갑, 열두 살이나 어린 여자가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감성과 필력에 그녀의 내공이 궁금했다. 문체만큼 담담한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 중간 중간 청자들을 향해 웃기는 언어들을 뱉으면서 정작 그녀의 얼굴 근육은 너무도 정돈된 느낌이라 나는 또 다른 역설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열일곱 살, 스스로 조숙하다고 믿고 스무 살이 되면서 스스로 성숙하다 자만했다는 그녀 앞에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에너지를 느꼈다.
집이 아닌 방에 살았고, 방이 아닌 칸에 살았다는 그녀의 독백을 통해 나는 그녀의 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거꾸로 칸보다는 방에, 방보다는 집에 살았던 나의 시간과는 분명 다른 그녀의 삶이리라 미루어 짐작되었다.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문학은 만져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자신의 책이 나왔을 때 만져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 무형의 형태인 언어가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희열은 상상하는 자의 몫으로도 충분했다. 고통에 찬 사람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의 소리는 울음이나 신음 등의 사운드라며 나쁜 소식, 더 나쁜 소식 앞에서 농담으로 품위를 지킨다는 그녀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역설이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경험, 내 이야기를 그물 던지듯이 했다면 이제는 사회, 남의 이야기를 농사짓듯이 한다는 그녀를 보며 작가의 책무도 전해졌다. 글을 영글게 하는 그녀의 귀한 시간이 단편 한권 읽듯이 담담히 전해져 왔다.
그녀가 성장했다는 충남 서산, 시골이 주는 충만함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안다. 시골의 가장자리 감성은 나와 네가 아닌 우리가 된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일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아야 하고 오감으로 전해지는 사계절, 민감할 수밖에 없는 감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유년의 축복이 되는 곳이 시골이다.
‘바깥은 여름’ 누군가는 차가운 심장의 중심부에서 따뜻한 여름으로 구원해 나가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함인지, 들어가려 함인지 모를 경계에 서 있는 모호함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 7편의 단편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아픔에서 아직 머물러야 할 온도가 남아 있는 느낌이다. 자신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타인들의 잘못된 시선 속에서, 사고 속에서 견디거나 무너질 수 있는 서늘한 기온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했던 고통에 찬 사람들이 한다는 사람들의 소리, 울음이나 신음이 내게 전해졌던 <입동>에서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으며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 낸 일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꽃이 피는 것은 계절이 하는 일이고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것은 시간이 맡은 몫이었다. 작은 일상들이 모여서 행복이 되 듯 아이의 소중한 기억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나 또한 배워가고 있다. 나도 그녀의 말처럼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아가는 요즘이다. 벚꽃이 봄에만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벚나무 단풍이 이리도 고운 줄을 이제야 느끼는 아둔함을 드러낸다. 매일 벚나무 단풍 드는 것을 보면서 기적이고 사건이라 여겨지는 내 마음에 대해 묻는다. 두 번째 봄이 맞냐고.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 느껴질 때 나와 달리 자전하는 속도의 차이를 말할 것이다. 나의 고통에서는 더 더디게 지나가는 하루. 아마 내가 영우의 엄마였더라면 내겐 계속되는 백야현상이었을 것이다. 오십이 개월의 아이를 가슴에 묻는다는 것은 영원히 밤인 것 보다 너무 밝아서 눈을 감지도 못하게 나를 끌고 다니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타인들의 형식적인 공감에 대해 작가는 서술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버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 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들에 대한 느낌은 단지 추측이며 가정일 뿐이다. 탐정처럼 꼬투리를 빌미로 하나씩 접근해 간다. 타인의 아픔을 느끼고자 함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묘한 이중성으로 언제든 관심으로도 무관심으로도 전환 가능한 거리를 줄기만큼으로 뻗고 온다.
<침묵의 미래>는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가기 위해 스무고개를 넘어간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不在)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熱)이다.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로든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과 만나 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壽衣)을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렇게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쩌렁쩌렁한 모어(母語) 한복판에, 우주 한가운데 버려졌다는 걸 안다.
소수 언어박물관에 사는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마지막 언어의 화자들을 바라보는 ‘나’ 이 단편을 이끌고 있는 ‘나’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오늘도 이곳에선 오래된 언어 하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보름에 한 번꼴로 일어나는 일이라 이제 놀라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렇 게 마지막 화자를 떠나 하늘로 오른 존재 중 하나가 나다. 나는 내 전생을 조각조각 떠올리며 저 아래, 누군가 버리고 간 이곳의 입장권을 굽어본다. 그것은 바람에 몸을 뒤집으며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질 나쁜 종이 위로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 흔들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로 답한다. 그게 우리의 직업이었으니까.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어느 부족의 언어는 성조가 수십 개다. 그들은 어느 열대지방에 사는, 빨갛고 쭈글쭈글한 멱을 가진, 화려한 희귀 새처럼 운다. 이방인의 귀엔 그저 “크, 크헉, 흐허, 헉”처럼 들리는 소리가 어떻게 수만 가지 문장으로 확장되는지 나도 알지 못한다. 어느 부족의 시제에는 전생(前生)과 환생(還生)이 들어간다. 그런 건 누가 정하고, 어떻게 설득하는지 다른 부족은 조금도 가늠 못한다. 어느 나라 동사는 백오십 번 이상 몸을 바꾼다. 그것은 프리즘에 닿은 빛처럼 여러 갈래로 꺾이며 굴절된다. 단어가 소리에 반사돼 정신에 무지개를 비춘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
그에게 모어(母語)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나누면 훨씬 신날 말.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고, 호소하는 그런 말들을…… 그는 짐승처럼 “크허, 흐어어, 흐억” 소리밖에 내지 못했지만 순간 나는 그가 부른 이름이 내 이름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우어어, 흐어어”하고 웅얼댈 때 그것은 빙하가 무너지는 풍경과 비슷했다. 수백만 년 이상 엄숙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얼음의 표정과 흡사했다. 그것은 무척 고요하고 장엄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였다.
오늘 내 화자를 떠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의 종착지는 신의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행성이 아니었다. 우리가 죽은 뒤 한번 더 죽게 되는 장소는 저기 먼 내세도, 우주도 아닌 지상의 공장이었다.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김애란의 다른 단편과는 결이 달랐다. ‘바깥은 여름’ 책 속에서 그녀의 가장 큰 모순의 증명서를 받은 <침묵의 미래>였다. 비단결 속에 삼베결이 들어 있는듯한 이 까칠함이 나를 유혹했다. 다른 이야기는 그녀가 말했던 타인과 나의 경험을 그물 던지듯이 썼다면 <침묵의 미래>는 농사짓듯이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농사짓듯이 쓴다는 그녀의 표현은 사회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말이란 때로는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 내 입을 통해 나간 말의 소유권은 화자인 내게 있는 듯 하지만 그 말의 기득권자인 청자에게 있을 때가 있다. 나의 의도와 달리 ‘오해’로 남았을 때, 그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설명이든 변명이든 해야 할 때 나는 그 말의 소유권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그때의 말은 차라리 공중분해 되거나 다수의 입들을 통하지 못하게 박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언어 속에서 무언의 압박으로 인해 침묵해야 할 때 나의 의도와 달리 해석 되어지는 공간. 그녀가 표현했던 ‘바위를 들어 올릴 때 빛을 보고 놀라 달아나는 벌레떼처럼 이곳에는 온갖 말들이 바글거린다.’ 말은 과잉공급 상태다.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말 속에 담겨진 생명을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했던 울음이나 신음의 변주곡이 되어야 그 말이 살아있었음을 느낀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나의 느낌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말하는 오래된 진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압류 딱지 마냥 더 이상 표현하거나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은 붉은 색의 멸(滅)의 중앙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보게 되며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과 의심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하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 고독, 그 결정(結晶)이 하도 고유해 이제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고독. 침묵의 미래에 갇혀 있는 모습이 고독이라 생각될 때 소리 없는 아우성 역설에 자승자박된 침묵의 미래가 그려졌다.
넘쳐나는 관심과 시선은 고독이란 코너로 몰아간다. 오해로 풀었다, 이해로 풀었다, 그들만의 방정식으로 해법을 찾다가 만신창이 된 언어만이 침묵의 언어박물관으로 기웃거리게 된다. 굳이 이해해 달라고 구걸하지 않기에 끝끝내 울대를 넘어 오르는 울음은 얼어붙어 있는 내 감정의 끝에 기록되는 영하(零下)의 온도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타고 뱉아졌을 때 타인들의 해석은 영상(零上)의 뜨거운 온도로 녹여버린다. ‘바깥은 여름’ 나와 다른 감정에 대한 이질감의 계절일 수도, 너무 차가운 고독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계절일 수도 있다.
김애란, 그녀가 엮어 놓은 7편의 계절은 여름의 경계에서 미닫이로 열 것인가, 여닫이로 열 것인가. 횡의 언어로 갈 것인가, 종의 언어로 갈 것인가. 비슷한 말로 반대말로 해석된 차이에서 ‘오해’와 ‘이해’의 관점은 그녀가 말했던 계절이 하는 일과 사건이 맡은 몫을 진실 되게 찾아야 하리라. 내가 끌고 가야 할 사소한 하루, 계절, 인생 속에서 내가 쏟아 낼 그 무엇들에 대한 소유권과 기득권은 늘 나를 방황과 침묵 속에서 끄집어내거나 밀어 넣기 때문이다.
그녀의 <침묵의 미래>는 글 자국을 어떻게 남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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