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各自擔負)
갈라디아서 6:5
상동교회. 중앙교회
夫牛耕田馬服乘鷄司晨狗警盜, 物各有職務矣. 況人而無職務乎? 天下之事甚複雜, 而人若不負自己之職務, 則天下之事不復成矣. 故社會之退步, 人類之不平, 皆在此. 何人十指不動, 何人終日流汗? 主曰受苦重負者皆來我, 此言人皆有重負之意也. 非輕負也, 卽重負也. 無此負者非地上之人, 卽天上之人也. 重負者何也? 細思之則父爲子負, 子爲父負. 家爲己負, 國爲己負, 友亦爲己負, 妻爲夫負, 夫爲妻負, 人皆有此負, 而有勘當者, 有不勘當者, 此何故也? 人各思之曰, 我有如此重負者能勘當, 我無如此重負者不能勘當矣. 父而敎子者, 欲使勘當此負也, 國而敎民者, 欲使勘當此負也. 無此敎育者敗, 有此敎育者興. 世之人言曰, 甲有如此之重負而乙不必負也, 乙有如此之重負而丙不必負云. 各相忌避, 互相諱之, 有一人重負則一人誹之. 堯讓天下於許由, 許由恥而洗耳, 天下高之, 以爲淸高無比, 此何誤之甚也? 擔負有兩種, 靈的物的也. 保羅曰人君犯法則受聖神者引導云. 且曰我亦恐有此試驗云, 非但人犯罪也, 己亦犯法也. 於此對人之負, 對己之負也. 靈的違反是違反聖書之意也, 人有違反是己之違反也. 人之陷罪卽己之陷罪也. 是基督思想, 人有犯罪, 我岸視之而不救, 反爲嘲笑. 一人犯過, 反爲播揚于世, 使之不能擧頭, 是非基督之思想也. 不思繆綢之, 閉戶自撾乎? 一家族之不幸, 卽全家族之不幸也. 故負一人之不幸者, 一人之長也, 負一家之不幸者, 一家之長也. 負一國之不幸者, 卽一國之長也. 負全世界之不幸者, 卽全世界之長也. 但務靈負不務肉負不可, 但務肉負不務靈亦不可, 此道理常常備明而人常不明. 古人曰 遺子千金不如敎子一經亦此意也. 幷務靈肉, 生活完全是吾等之望也. 有負則人皆苦念而不復樂從者何也? 人皆自便而不知樂在苦中也. 又不知有負而能成人也. 紙鳶有尾故能飛, 上人有所務故能向上也. 年前一監督說敎曰 主負朝鮮人之負背欲曲矣. 朝鮮人能不欲負朝鮮之負乎? 깐듸氏唱스와라지, 印度卽印度人之印度也. 印度人衣印度人之物, 食印度人之物可也. 我朝鮮人能不欽企此까듸之敎訓乎? 文明自我判得而後能文明也. 自人而得之者, 非文明也. 彼藤蔓被古木, 人語曰 古木回春可乎? 假人之文明皆此類也. 此不知自己之罪也. 且隨分而負, 農而負農負, 商而負商負, 工而負工負可也. 不可躐等而負. 憂田畝者農夫也, 憂天下者堯舜也. 大衛出自牧羊, 大舜出自陶漁, 此是非自下而上昇耶? 隨分而務則如盈科之水終至洋洋之海, 此隨分而務也. 主責바리새인之罪惡者, 不務自己之責而以誰負之? 擔置肩也. 年前上海中人, 置重負於牛馬, 不堪重負而斃. 英哲責罰金者, 以不堪之重負, 負牛馬故也. 丙吉問牛喘眞宰相也. 故聖人推己及人. 主曰十里五里者以此也. 內衣外衣者以此也. 非但負自己之負也, 負他人之負此至愛也. 변아민兵士, 兼他兵之負而卽免死也. 主負世人之重負, 故爲全世人之救主, 깐듸負印度之重負, 故爲印度人之救主. 諸葛身拜漢相, 相如名重趙, 重亦以此也. 吾人當負吾人之負, 又負他人之負, 是主之敎訓也. 人當有重負, 不知有重負而, 坐而徒享富貴者, 卽吾主之罪人也. 故擔己之負, 又擔人之負而後可學耶蘇, 耶蘇受人之重而爲救主矣. 隨擔負之大小而評其人格, 諸葛身拜漢相, 故其人格爲漢之大人, 爲千古之偉人矣. 其故擔負至大故也. 願僉位擔何負乎? 今日朝鮮靑年將擔負重矣. 誰能救之乎? 主必救之矣.
일반적으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끌거나 태우고,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도둑을 지키는 것으로 만물은 각각 맡은 직무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직무가 없어서 되겠습니까? 천하의 일들은 매우 복잡한데 사람이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일은 다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퇴보와 인류의 불평도 다 여기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 손가락 꼼짝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종일 땀 흘려 일하여야 합니까?
주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내게 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사람은 모두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가벼운 짐이 아니고 무거운 짐입니다. 이러한 짐이 없는 자는 지상의 사람이 아니고 바로 천상의 사람입니다.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자식의 짐이 되고, 자식은 아버지의 짐이 됩니다. 집은 자기의 짐이 되며, 나라도 자기의 짐이 되고, 친구도 자기의 짐이 됩니다. 그리고 처는 남편의 짐이 되고, 남편은 아내의 짐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이런 짐이 있는데 감당할 만한 것도 있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은 각각 생각하기를 ‘이러한 무거운 짐을 나는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도 하고, ‘나는 이러한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가르치는 데 이러한 짐을 감당하도록 하려고 하고, 나라에서 백성을 가르치는데 이러한 짐을 감당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교육이 없으면 실패하고 이러한 교육이 있으면 일어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갑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이 있으나, 을은 그것을 질 필요가 없고, 을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이 있으나, 병은 그 짐을 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각각 서로 그 짐 지기를 기피하고, 서로 자기 짐이 아니라고 숨깁니다.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으면 한 사람은 비방합니다. 옛날 성군인 요(堯) 임금이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양보하려 했더니, 허유는 그 소리를 들은 귀까지 더러워졌다고 하며 귀를 씻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높였으며, 비교할 수 없이 청렴하고 고상한 사람으로 여겼으니 이 얼마나 심한 잘못입니까?
져야 할 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것과 물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나도 이러한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하였습니다. 비단 남의 범죄뿐만 아니라 자신도 역시 죄를 짓습니다. 여기에서 남의 짐을 대하는 것은 자기의 짐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영적인 위반은 바로 <성경>의 뜻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위반이 있으면 그것은 바로 자기의 위반입니다. 남이 죄에 빠지면 바로 자기가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상입니다.
남이 범죄를 하면 나는 거만하게 보고 구원해 주지 않고 도리어비웃으며, 한 사람이 과오를 범하면 도리어 세상에 드러내어 알려서그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들 수도 없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사상이 아닙니다. 도와주고 고쳐주려고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스스로에게 종아리나 치겠습니까?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불행하면 전 가족이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불행을 짐 지는사람은 그 사람의 어른이고, 한 가족의 불행을 짐 지는 자는 그 집의 어른입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불행을 짐 지는 자는 바로 그 나라의 어른이고, 전 세계의 불행을 짐 지는 자는 바로 전 세계의 어른입니다,
그런데 다만 영적인 짐만 힘쓰고 육체적인 짐은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도리는 항상 분명한 것인데 사람이 늘 분명하게 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자식에게 천금의 재산을 남겨 주는 것이 <경서> 한 권을 남겨 주는 것만 같지 못 하다’라고 한 것이 역시 이 뜻입니다. 영과 육을 아울러 힘써서 생활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바람입니다.
짐이 있으면 사람들은 다 괴롭게 생각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은 모두 자신이 편하려고 만 하며 즐거움이 고통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고, 또 짐이 있어야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종이로 만든 연이 꼬리가 있기 때문에 날 수 있고, 위에 있는 사람은 힘쓴 바가 있으므로 위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연전에 한 감독이 설교하기를 ‘주님은 조선 사람의 짐을 지느라고 등이 굽어지려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이 조선의 짐을 지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간디는 반영(反英) 자치 운동인 ‘스와라지’를 부르짖기를 ‘인도는 바로 인도 사람의 인도이니, 인도인은 인도 사람의 옷을 입고, 인도 사람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이 이 간디의 교훈을 흠앙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문명은 나로부터 판단하여 얻은 뒤에 문명이 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얻은 것은 내 문명이 아닙니다. 저 칡넝쿨이 고목을 둘러쌌다고 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목이 살았다’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남의 문명을 빌리는 것이 다 이런 것들입니다. 이는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분수에 따라 짐을 져야 합니다.
농사꾼은 농사의 짐을 지고, 장사꾼은 장사의 짐을 지며, 공업인은 공업의 짐을 지는 것이 옳고 분수를 뛰어 넘어서 짐을 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답을 걱정하는 이는 농부이고, 천하를 걱정하는 이는 요순과 같은 성군입니다. 다윗은 양을 모는 목동에서 나왔고, 순임금은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일을 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이런 것이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수에 따라 힘쓴다는 것은 마치 물이 깊은 웅덩이를 채우고 점점 나아가 마침내 넓고 넓은 바다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분수에 따라 힘쓰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리새인의 죄악을 나무란 것은 자기의 책무를 힘쓰지 않는데 누가 그 책임을 지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짐을 진다는 것은 짐을 어께에 메는 것입니다.
연전에 상해의 중국 사람이 소와 말에게 무거운 짐을 실어 소와 말은 그 짐을 견디지 못하여 죽었습니다. 영철(英哲?)이 벌금을 물린 것은 견딜 수 없는 짐을 소와 말에게 실은 까닭입니다. 중국 한(漢) 왕조의 재상 병길(丙吉)이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보고 ‘이 소가 몇 리나 걸었느냐’고 물은 것 때문에 참으로 훌륭한 재상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의 처지를 미루어 남을 배려하는 데까지 미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비단 자기의 짐을 질 뿐만 아니라 타인의 짐을 지는 것은 지극한 사랑입니다. 벤자민 병사가 다른 병사의 짐을 아울러 지고 피로에 못 이겨 졸다가 사형 판정을 받았으나 이 사실을 안 대통령에 의해 사형이 사면되었습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지셨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짐을 져야 하고 또 타인의 짐도 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사람에게는 당연히 무거운 짐이 있는데 무거운 짐이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앉아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바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짐을 지고, 또 남의 짐도 진 뒤에야 가히 예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는 남의 무거운 짐을 지심으로 구주가 되셨습니다.
짐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인격이 평가됩니다. 제갈량은 한 왕조의 정승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인격은 한 왕조의 대인(大人)이 되고, 천고의 위인이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진 짐이 지극히 컸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어떤 짐을 지겠습니까? 오늘날 조선 청년은 장차 질 짐이 무겁습니다. 누가 능히 구원하여 주겠습니까? 주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여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