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박국 2:4, 또 로마서 1:17, 또 히브리서 10:38
상동교회, 정동교회
1931. 6. 14.
◇信仰敎人之武器也, 兵士不持武器而出戰則必敗, 敎人不持信仰而出世則敗. 吾人生活要素信仰也, 凡事不以信仰而行則罪也. 此主之訓也, 信仰又如楯干, 能禦火箭, 環我一身而攻擊者火箭也. 非信何能制之也? 彼山間僧侶時時念佛, 而若霎時離去則信之生活危險矣. 余入金剛山宿山寺, 僧侶終夜念佛, 終日念佛, 我敎人也, 尙不如彼僧甚愧矣. 吾等畏世如虎者無信故也. 世如海人如舟, 舟離水則不能行, 舟行藉水, 然舟不入水中故不行. 吾等涉世如涉海, 吾離世則天堂也. 入世則地獄也. 吾等藉世而行, 以信仰爲舟, 搖搖而去, 洋洋而過, 不使覆沒可也. ◇或思爲敎人則, 主使吾家族平安, 心地愉快, 是信仰生活也. 此誤解也. 此信仰生活中爲一部分可也. 非生活全部也. 生活分各項而看之則, 有各樣也. 有苦有樂, 有喜有悲, 有安有危, 是吾生活全部也. 譬如飮食, 或甘或酸或辛, 皆飮食之味也. 五味具存謂之全味也. 吾生活亦然, 非但五味有各味, 不可故一矣. 此間信仰爲主, 苦亦信樂亦信悲亦信, 是謂之義人, 亦敎人也. ◇主非使我平安者也, 卽使渡世者也. 主在風海謂之曰渡海云, 不使避風避濤者也. 使之晏然渡海者也. 海雖險不渡何爲, 世雖險不涉何爲也? 避此者僧侶也, 仙人也, 獨善之儒者也. 不看篤信之요셥乎? 見憎于兄輩而不欲避之, 見投于井而亦不欲避之, 又投于獄而亦不欲避之, 所在無不以信仰克之, 故主使요셥晏然渡世也. 吾等當憑此而學, 如惡識則曰此主傳我之信, 如遇疾風則風使我疾行, 如此則曰此義人也. 亦敎人也. ◇且於此爲知信, 爲寶信, 골二章三節. 曰其中有知慧, 有寶貨云, 多積信仰之經驗, 則我靈生光, 爲寶爲智, 保羅曰我知處患亂, 知處危險, 知處豐備, 又曰賜我能力者之內, 我無所不能云, 此豈非知乎? 豈非寶乎? 吾人於此常常得力以行, 不墜於罪也. 每看信者之經歷有各種, 考其理由, 或爲就職而信, 或爲得勢而信, 信之理由皆不適當. 阿峴聖經學院生一人, 工夫二個年退學, 自院考其行, 爲潛行潔之地, 久待其悔改而不改, 故退學矣. 吾等之信非爲世事以信也. 爲吾生命, 爲吾道理, 千眞萬眞不可不信也. 故於信仰, 不必付薄弱之理由也. 有寶信智信而後爲義人也. 且敎人也. 有眞正之信則必如鷲鳥之更起. 一日秋空鷲鳥快飛.
믿음은 교인의 무기입니다. 병사가 무기를 가지지 않고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패하게 됩니다. 교인이 신앙을 가지지 않고 출세한다면 패하고 맙니다. 우리의 생활요소는 믿음입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믿음은 또 방패와 같아서 불화살[火箭]도 막을 수 있습니다. 내 몸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것은 불화살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산 속의 승려가 염불을 하는데 만약 잠시라도 그 염불하는 일을 떠나면 신앙생활이 위험합니다. 내가 금강산에 들어가 산사(山寺)에서 잔 일이 있었는데 그 절의 승려는 밤새도록 염불하고 종일동안 염불하였습니다. 나는 교인으로서 오히려 저 승려만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바다와 같고 사람은 배와 같습니다. 배가 물을 떠나면 갈 수가 없습니다. 배는 물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배가 물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헤쳐 가는 것은 마치 바다를 헤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천당(天堂)입니다. 세상으로 들어가면 지옥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바탕으로 하여 살아가자면 믿음으로 배를 삼아 흔들흔들 가기도 하고 거침없이 가기도 하여 그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는 교인이 되면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평안하게 해 주고 마음을 유쾌하게 해 줄 것이므로 이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오해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의 일부분이지만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생활을 여러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본다면 각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으며, 편안과 위험이 있으니 이것이 우리의 생활 전부입니다. 음식에 비유한다면 혹은 달고 짜고 시고 하는 것이 다 음식의 맛입니다. 다섯 가지 맛인 오미(五味)가 다 있어야 전체의 맛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활도 이와 같아서 오미에는 각각의 맛이 있으면 아니 되므로 한 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을 위주로 하게 되면 고통스러워도 믿고 즐거워도 믿고 슬퍼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의인(義人)이라고 이르고 또한 교인이라고 이릅니다.
주님은 나를 평안하게 하는 이가 아니고, 세상을 건너게 하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 있을 때 ‘바다를 건너가자’고 하셨는데 바람을 피하고 파도를 피하게 하지 않고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바다가 아무리 험하여도 건너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피하는 이는 승려들이고, 신선(仙人)들이고, 혼자만 착한 일을 하는 독선(獨善)의 유자(儒者)들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요셉을 보지 않았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고, 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역시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 옥에 갇히었으나 역시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는 곳에서 신앙으로 극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요셉을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이것에 의지하여 배우되 만일 악한 지식을 가지거든 주님께서 나에게 신앙을 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일 빠른 바람을 만나거든 바람으로 하여금 나를 빨리 가도록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것을 말하기를 ‘의인(義人)이라고 하고 또한 교인이라고 합니다.
또한 여기에서 믿음을 아는 것과 믿음의 보화를 보게 됩니다. 골로새서 2:3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경험을 많이 쌓은즉 나의 영혼에 빛이 비취어 보배가 되고 지혜가 됩니다. 바울이 ‘나는 환란에 처할 줄도 알고, 위험에 처할 줄도 알고, 풍족하게 갖추어진 곳에 처할 줄도 안다’고 하였고, 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아는 것이 아니며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늘 힘을 얻어 행하게 되며 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매양 신자의 경력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음을 보는데 그 이유를 상고해보면 어떤 이는 취직을 위하여 믿고, 어떤 이는 권세를 잡으려고 믿습니다. 이는 신앙의 이유로는 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아현(阿峴)성경학원의 학생 한 사람이 공부한 지 두 해에 퇴학을 당했는데 학원에서 그의 행적을 살펴보기 위하여 은밀히 결백해야할 곳에 가서 그의 회개(悔改)를 오래도록 기다려 보았으나 회개하지 않으므로 퇴학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세상사를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위하고 우리 도리를 위하여서입니다. 천 가지 만 가지 진리를 믿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엷고 하찮은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보배로운 믿음과 지혜로운 믿음이 있은 뒤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독수리와 같이 다시 일어나서 가을 하늘에 상쾌하게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