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믿음(信)의 자유 / 갈라디아서 5:13
자유는 우리 생활에 생명과도 같이 소중합니다. 자유 없는 생활은 마치 죽음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살이와 같은 것입니다. 조선이 40년 동안 자유 없이 살아왔을 때 얼마나 고통이 많았겠습니까? 자유에 대한 인식이 서양이 동양에 비해 더 예민하고 발전된 것은, 종교가 이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기독교를 알고 있어서 사람들이 자유를 존중합니다. 반면 동양은 유교나 불교를 따르면서 자유의 가치를 모르므로, 절대주의가 성행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죄에서 자유하기 위함이며, 죽음에서의 자유도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다시 죄의 멍에에 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유는 선을 행하는 것도, 악을 행하는 것도 모두 자유입니다. 그래서 이 자유를 빌미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이며, 자신의 자유를 귀하게 여기는 동시에 타인의 자유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율법에는 자유가 없지만, 은혜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주님의 은혜 안에 살면 자유가 있습니다. 율법은 죄 있는 자를 정죄하려 하지만, 은혜는 죄 있는 자를 용서하려 합니다.
이제 은혜를 떠나 다시 율법을 지키려는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자유를 얻었다가 다시 속박으로 돌아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율법만을 따르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갈과 사라의 아들을 비유로 들어, 사라의 아들은 자유로운 자이지만 하갈의 아들은 자유가 없는 자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라의 아들과 같이 허락과 은혜와 사랑 가운데 자유하여,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그러니 죄의 멍에를 메고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는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이 자유를 가져오는 길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음까지 대신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랑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운 것과 같습니다. 허물과 죄가 있어도 사랑으로 가려지고 용서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육체의 기회를 얻어 범죄하지 말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에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부터 자유가 없었습니다. 탕자는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떠나는 순간부터 마귀가 달라붙어 탕자는 전혀 자유가 없었고 죄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뉘우치고 돌아설 때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랑 밖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잃은 자들에게 주 안에 굳게 서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굳게 서는 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정말 자유로운 국민은 황제가 있어도 전제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들어와 선전해봐야 우리의 생활보다 나을 리가 없습니다. 주의자들이 아무리 선전해도 백성들은 흔들리지 않아, 결국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내용이 튼튼하지 못하면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지만, 근본이 튼튼하고 자유롭고 행복하다면 결코 퇴보하여 야만을 배우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