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물 선 김 영 하
재만과 형식은 대학시절,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그들은 ꡐ역사연구회ꡑ라는 별로 유서 깊지 않은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말이 좋아 역사연구회지 사실은 맑스, 레닌의 사적 유물론을 공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화염병을 제조하는 공장에 가까웠다. 그들처럼 정말 역사를 연구하는 데인 줄 알고 들어간 순진한 신입생들은 선배들로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역사를 알려면 직접 역사로 뛰어들어야 한다느니,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교정엔 꽃피는 봄이 찾아왔다. 그때쯤이면 언제나 ꡐ긴박한 정치정세가 청년학도의 투쟁을 요구하ꡑ고 있었고 그러면 신입생들은 ꡐ역사의 갈림길ꡑ에 서게된다. 선배들과 함께 가두로 나가든가 아니면 은근슬쩍 동아리를 빠져나가든가. 재만 같은 경우는 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나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같은 걸 읽고 토론하는 줄 알고 들어왔던 그는 선배들에 이끌려 나갔던 첫 번째 가투에서 어이없이 경찰에게 잡혀 집시볍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후, 이왕 이렇게 된 것 더욱 가열차게 투쟁하라는 선배들의 말을 뒤로 한 채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형식은 좀 달랐다. 그는 가두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동아리엔 끝까지 남아 있었다. 구박과 눈총 속에서도 꿋꿋이 나름의 역사연구를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구성과를 그것에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처음엔 논쟁도 벌이고 공박도 하던 다른 회원들은 그를 곧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회원들이 밖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있을 때 그는 동아리방에 홀로 책과 지도를 보며 연구를 계속 진척시켰고 자료가 더 필요하면 도서관에도 나타났다. 그와 재만은 도서관의 흡연자 휴게실에서 주로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형식은 재만을 앉혀놓고 장광설을 늘어놓곤 했다. 맑스, 레닌을 피해 도서관으로 도망친 재만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며 형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때는 그렇게 책만 파던 형식이었지만 졸업을 한 뒤에는 난데없는 독자 가두투쟁을 시작했다. 그의 돌출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정신분열증 초기라느니, 쇼맨십이라느니 여러 해석을 갖다붙였다. 누가 뭐라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마포구 공덕동에 살고 있던 그는 가족들의 감시가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오곤 했다. 그가 사라져도 가족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의 남자형제 중 한 명이 투덜거리며 광화문 네거리로 나가 약간의 탐문 끝에 그를 붙잡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가 노리는 것은 충무공이었다. 그는 광화문 네거리 동상 주변서 얼쩡거리다가 차량 통행이 뜸해지면 달려들어 기어올랐다. 가끔 올가미를 던져 동상의 목에 걸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러기엔 장군의 몸체가 너무 컸다. 수순은 대체로 비슷하다. 도깨비씨름이라도 하듯 동상과 대결하고 있는 그의 허리를 경찰이 달려와 붙든다. 그러면 그는 조금 저항하다 파출소까지 끌려간다. 그러곤 가족들이 찾아올 때까지 쳐박혀 있는 것이다. 경찰은 경찰대로 난감해지고 가족은 가족대로 민망해했다. 몇 번쯤 즉심에 넘겨져 벌금과 구류를 맞았지만 이순신 장군상을 향한 그의 집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왜 충무공동상에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파출소장은 자못 근엄한 얼굴로, ꡒ여긴 국가기간시설도 많고 외교공관들도 산재해 있으니 거 아드님 단속 좀 잘 하셔야겠습니다. 허, 충무공이면 민족의 영웅인데……ꡓ하면서 가족들에게 훈계를 했다.
대학시절, 동해에서 일본 꽁치잡이 어선 한 척이 침몰한 일이 있었다. 어부들은 하늘에서 황소 한 마리가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가라앉았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황소가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지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렇지만 일본 해상자 위대의 정보 파트에 어부들의 말을 신뢰한 해군 장교가 있었다. 어촌 태생인 그는 바다의 사나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상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ꡒ뱃사람들은 거짓말을 싫어합니다. 목숨을 뱃전에 내놓고 사는 사람들은 그런 유희를 즐기지 않습니다. 차라리 동해에 심심찮게 출몰하는 고래 핑계를 댔으면 댔지 하늘에서 소가 떨어졌다는, 아무도 안 믿을 그런 얘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ꡓ 그는 인공위성과 정찰기, 이지스함의 데이터를 교차 분석한 끝에 그 시각, 사할린으로 향하는 러시아 공군의 수송기 한 대가 그 지역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게다가 그 화물기가 어선 침몰지역 주변에서 지그재그로 궤적을 그리며 지나간 흔적도 위성사진을 통해 알아냈다. 일본은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러시아측에 조심스럽게 공군수송기와 어선 침몰 사이의 연관에 대해 문의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러시아 공군은 몇몇 지휘관을 문책하면서 자신들이 어선 침몰에 책임이 있음을 이례적으로 시인하였다. 시베리아 기지에 잠시 들러 급유를 받던 수송기의 승무원들이 활주로 근처 농촌에서 황소를 훔쳐 그것을 적재함에 실었는데 이 소가 그만 동해 상공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에 화물기의 무게중심이 이쪽 저쪽으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조종사는 화물칸의 해치를 열어 소를 바다로 떨구었는데 하필 800킬로그램이 넘는 그 황소가 일본 꽁치잡이 어선의 이물을 때린 것이었다. 러시아측은 일본 어선의 피해를 모두 배상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일본측의 조용한 처리를 요구했다. 일본 자위대의 정보수집 능력을 보여주는 이 일화를 재만에게 얘기해준 사람도 바로 형식이었다. 그는 일본의 재무장이야말로 제3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니 주변국들은 한시도 경계를 늦추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상한 친구 덕분에 재만은 예전에는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었던 광화문 네거리의 충무공동상을 차츰 눈여겨보게 되었다. 보통 다른 장군들은 기마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데 반해 이순신 장군은, 아마 수군이라서 그랬겠지만, 그저 우뚝 선 채로 남대문 방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그 뒤에 자리잡은 청와대를 등지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궁궐의 수문장같은 느낌이다. 그가 지키고 있는 건물에는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 교보생명, 한국통신, 미국문화원과 미대사관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건물로는 조선일보사, 서울신문사, 감리회관, 시청 등이 있다. 이순신 장군상을 사이에 두고 종로와 세종로가 교차하여 지나는데 우리나라에서 통행량이 많기로는 몇째 가라면 서러울 지점이다. 뭘 지키겠다면, 또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절묘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사실 상당히 멀쩡했을 때부터 형식은 이순신에 집착했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충무공동상의 건립부터가 친일파의 음모라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동상이며 인왕산에서 청와대, 경복궁, 광화문, 남대문을 잇는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들이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얼굴을 이순신 장군상에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립주체인 ꡐ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ꡑ의 회장은 한일수교의 막후, 김종필이었으며 첫 번째 헌납자는 바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타까기 마사오, 즉 박정희 전대통령이라고 은밀히 속삭였다.
ꡒ동상 정면의 글씨도 타까기 마사오의 친필이야. 그래도 뭔가 느낌이 안 온단 말이지?ꡓ
ꡒ글세.ꡓ
ꡒ허, 한번 잘 생각해봐. 참, 토요또미 히데요시가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ꡓ
ꡒ아니.ꡓ
재만은 금시초문이었다.
ꡒ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걸 한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단 말이지?ꡓ
ꡒ응.ꡓ
그는 절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ꡒ하지만 형식아, 그래도 조선총독부 건물도 완전히 해체되고…….ꡓ
ꡒ순진한 생각이야. 김영삼 정부가 왜 그렇게 황급하게 허둥지둥 조선총독부를 폭파해버렸는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단 말이지?ꡓ
무엇무엇 했단 말이지, 하면서 말을 끄는 것은 형식의 오랜 말버릇이었다.
ꡒ그거야 김영삼이 워낙…….ꡓ
그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재만의 말을 끊었다.
ꡒ조선총독부 건물엔 일본이 조선 전역에 감춰놓은 금괴와 군사시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있었어. 뿐만 아니라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박아놓은 쇠말뚝의 위치도 기록돼 있었지. 아, 그리고 그들의 아시아 지배전략을 상세히 기술한 문서도 다수 보관돼 있었어. 그런 걸 몰랐단 말이지, 하.ꡓ
ꡒ그 지도만 찾으면 되겠네?ꡓ
ꡒ아니야. 그것들은 모두 건축물의 내부에 숨겨져 있었는데 문제는 도대체 어느 돌 속에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도 당시의 진해를 하나하나 깨가면서 그것들을 찾고 있어. 강원도 홍천의 채석장에서.ꡓ
물론 형식의 얘기를 진지하게 여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혹 진도와 제주도의 보물을 찾는다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곤 했으나 그때마다 그는 좋은 말로 타일러 그들을 되돌려보냈다. 그들은 일제가 철수하면서 포탄 탄피에 금괴를 넣어 진도 앞바다 바위섬 아래에 파묻고 떠났다고 주장했지만 형식은 건축공학도답게 차근차근 그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주었다. 당시 일본의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바닷속 바위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그 엄청난 양의 금괴를 숨긴 후 다시 집채만한 바위를 얹어놓는다는 것은 마치 해녀를 인어공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지도를 펼쳐놓고 그들이 말한 위치를 붉은 싸인펜으로 표시해놓았다.
ꡒ불가능하다면서 표시는 왜 하는 거야?ꡓ
ꡒ거긴 금괴가 있는 곳이 아니야. 그 사람들, 뭔가 주워듣긴 했는데 잘못 들은 거야. 자, 진도에서 광화문까지 일직선으로 선을 그어봐.ꡓ
형식은 10만분의 1지도를 책상 위에 넓게 펼쳤다. 재만은 T자를 이용해 연필로 선을 그었다.
ꡒ다 그었는데.ꡓ
ꡒ그 선을 따라가며 놈들이 쇠말뚝을 박았을 거야. 진도의 그 지점이 시발점이야. 그걸 표시해둔 거야. 전설이라는 게 그냥 생겨나는 법이 없거든. 그렇게 해서 서쪽의 기를 누르고 부산영도에서부터 또 광화문까지 박아서 동쪽의 기를 누른 거야. 봐, 정확히 이등변삼각형이 되지 않냐? 지독한 놈들.ꡓ
재만으로 말하자면 그런 유의 얘기들을 전혀 신봉하지 않는 축이었다. 쇠말뚝을 박는다고 정기가 눌러지나? 그럼 전국의 산맥들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고압선 철탑들은 다 무언가. 게다가 메이지유신을 거쳐 탈아입구의 한길로 매진하던 근대 일본이 그런 주술적인 일에 국력을 쏟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나라가, 여인네들 쇠비녀까지 공출해간 나라가, 무슨 여력이 남아 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고 다녔겠는가. 또 설령 어느 미친 일본인이 쇠말뚝을 박고 다녔다 해도 고작 그런 쇠붙이 몇 자루에 눌릴 정기라면 그게 과연 그렇게 신성한 것일까.
그로부터 몇 년 후 찬바람이 쌩쌩 불던 어느 겨울 새벽, 드디어 형식은 그토록 염원하던 이순신 동상정복에 성공했다. 사다리 하나 없이 어떻게 그가 그 높은 동상에 오를 수 있었는지가 모두에게 의문이었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동상 등반에 성공한 그는 태극기로 장군의 얼굴을 가리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희붐하게 먼동이 터 오자 일찍 집을 나선 사람들의 자동차들이 그가 서 있는 동상 옆을 스쳐 종로와 세종로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동상 위에 올라 있는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초조해진 그는 장군의 얼굴을 가린 대형태극기를 풀어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호대기중인 몇 대의 자동차에서 운전자들이 목을 빼고 동상 위의 그를 올려다보았다. 몇몇은 경찰이나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잠시 후, 사다리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경찰차와 함께 광화문 네거리에 도착했다. 그는 태극기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다시 가린 후, 밧줄로 장군의 목과 제 허리를 결박하였다. 그와는 이미 안면이 있는 배불뚝이 경찰관이 동상 아래에서 메가폰으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ꡒ야, 이형식이, 너 안 내려와?ꡓ
그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ꡒ민족정기 압살하는 친일조각 철거하라!ꡓ
ꡒ강토의 심장부에 토요또미가 웬말이냐!ꡓ
배불뚝이 경찰관이 소방관들에게 사다리를 올리라고 지시하자 소방관 두 명과 경찰관 한 명이 올라탄 사다리가 천천히 동상의 머리 부분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구경하는 운전자들 때문에 광화문 일대엔 이른 새벽부터 교통체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눈 비비고 스튜디오로 출근한 교통방송의 리포터는 프로듀서가 건네주는 메모를 나른하게 읽어 내렸다.
ꡒ네. 지금 통신원 제보 들어와 있는데요, 광화문 네거리 충무공동상에 시민 한 분이 올라가 시위를 벌이고 있어 네거리 일대 대단히 혼잡하다는 김길운 통신원의 제보입니다. 세종로, 종로 양방향 모두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으니 우회 바란다는 제보였습니다.ꡓ
그는 세 명과 몸싸움을 벌렸지만 결국 팔이 뒤로 꺾인 패로 사다리차에 옮겨졌다. 소방관들은 동상의 목 부분에 걸린 밧줄과 얼굴을 씌운 태극기도 신속하게 철거하였다. 그는 종로경찰서로 실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심문은 곧 형식의 기이한 역사 강의로 변질되었다. 경찰관들은 일본의 세계정복음모에 대해 귀가 아프도록 듣다가 결국 조서 작성을 포기하고 즉심으로 념겼다.
그가 동상에 올라가 있던 바로 그 시간, 재만은 갓 들어간 직장으로 차를 몰고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통방송 리포터의 멘크를 듣는 순간 그는 그 장본인이 바로 형식임을 알았다. 그 자식, 여전하구만. 그는 혀를 차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광화문 네거리가 다시 정상 소통되고 있다는 짤막한 멘트말고는 더 이상 그 사건의 뒷이야기는 없었다.
그 후 형식은 가끔 몇몇 동창모임의 술안주로나 등장하다가 몇 년 후 완전히 화제에서 사라져버렸다. 재만은 새로 사귄 사람들과 주식시장의 동향, 여배우들의 가슴크기, 스톡옵션에 대해 떠들며 17년 간 숙성시킨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켰다. 호시절이었다. 주가는 치솟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친구들의 이름이 경제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재만은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여의도에 있는 외국계 컨설팅회사로 옮겨 그 한해에만 2억 가까운 돈을 벌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수백억대의 스톡옵션을 손에 쥐는 또래의 사내들을 볼 때마다 이러다 기회란 기회는 다른 놈들이 다 채가는 게 아닌가싶어 그는 초조했다.
그 무렵 그는 종종 호텔에서 동업자들과 아침을 먹었다. 업계의 부침과 정부의 정책동향에 대해 소곤거리고 발레파킹해두었던 차를 받아 타고 직장으로 나갔다.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밤에는 호텔 피트니스쎈터에서 달리기를 했다. 거한 술자리들이 이어지면서 자연히 단골 룸살롱도 생겼다. 마듬들과는 누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고 술자리가 파하면 해장국까지 얻어먹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마담들은 명절이 되면 ꡐ돈 많이 버리라ꡑ는 덕담에 얹어 구찌 지갑이나 캐시미어 목도리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해에 걸혼정보회사가 주선해준 여자와 결혼도 했지만 하도 바쁠 때여서 언제 어디서 했는지 기억도 못할 지경이었다. 컨설팅 업무 외에도 그는 주식과 채권, 달러로 자기 나름의 포토폴리오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 동향을 체크하려면 하루 24시간도 모자랐다 그의 새벽은 막 폐장한 뉴욕 증권시장의 각종 지수들로 시작됐다. 부팅하는 시간도 아까워 컴퓨터는 언제나 켜놓은 상태였다.
그가 형식을 다시 만난 것은 그 호시절의 막바지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던 아침모임에서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꼬박꼬박 참가해오던 그 모임이 비로소 수백억이 오가는 실제 작전에서 산뜻하게 한 게임을 해치운 직후였다. 신생 증권회사로 스카우트되어간 트레이더 하나가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과거에도 증권시장에서 작전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린 전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도 그는 언제나처럼 자본금이 거의 잠식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소규모 상장기업을 노려 주식을 매집하기 시작했고 그가 관여하고 잇던 여러 정보모임에 은근슬쩍 작전의 개시를 알렸다.
ꡒ지나치게 저평가 된 물건이 있어 한번 밀어보려구요. 딱 열흘만 뺑뺑이 한번 돌려보죠.ꡓ
아무도 조작이니 작전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각자 동원가능한 물량을 그가 지시한 종목에 묻고 그의 퇴각신호를 기다렸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그 종목만 연달아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사흘째가 되자 개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막판엔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던 그 지방섬유업치의 주가가 웬만한 우량기업을 뺨쳤다. 그들은 투자액의 평균 열 배가 넘는 차익을 남겼다. 간 작은 이는 여드레째, 간이 좀 큰 이는 열흘째 손을 털었다. 심지어 그들이 단골로 다니던 룸살롱의 마담도 세 배를 남겼다. 곧 주가는 폭락했고 개미들은 깡통을 찼다.
그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캡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들의 리더는 조용히 근신하며 다음 때를 기다렸다. 조찬모임도 당분간 중단되었다. 모두들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여운을 즐겼다. 나머지 멤버들 역시 조용히 본업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작전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터라 일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연봉보다 더 큰 돈을 단 며칠만에 벌었으니 하루하루의 일상이 문득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었다. 그런 몇 주가 지난 후, 캡틴이 오랜 침묵을 깨고 그들을 호출한 것이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니 아르마니니 하는 번드르르한 양복을 빼입은 그들은 강남에 새로 개장한 특급호텔에서 만났다. 그새 승용차를 바꾼 성질 급한 치들도 있었다. 미소수프를 떠먹으며 한 펀드매니저가 정부의 시장 규제에 대해 비아냥거렸다.
ꡒ시장의 실패? 웃기고 있네. 공무원들 괴롭겠어. 자기들도 안 믿는 걸 떠들고 있으니 말이야. 뒷구멍으로는 주식 받아 챙기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면서 마이크만 들이대면 무슨 헛소리들을 그렇게 해대는지.ꡓ
ꡒ걔네들 오락가락하면 우리야 좋지. 그런데 저 자리 왜 비어 있지? 누가 더 오나?ꡓ
바로 그때 팔에 냅킨을 걸친 웨이터가 누군가를 안내해 그들의 테이블로 데려왔다. 닥스의 체크무늬 정장에 무늬 없는 타이를 받쳐입은 그는 바로 이형식이었다. 그의 장장은 새 것 같긴 했으나 어딘가 부적절해 보였다. 그는 재만을 보더니 과장되게 팔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엉거주춤 일어나 한사람씩 인사를 나누었다.
ꡒ너, 여기 있다는 말 벌써 들었다. 세상 좁구나.ꡓ
재만은 형식의 돌연한 출현에 놀라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활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ꡒ사람 놀래키는 재주는 여전하구만.ꡓ
ꡒ둘이 구면이라며?ꡓ
캡틴이 그를 자리에 앉히며 웃었다. 다른 멤버들도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캡틴이 초대했고 재만도 구면이니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캡틴이 그를 소개했다.
ꡒ미리 얘기하려고 하다가 사업 성격상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모셨어요.ꡓ
형식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닥스 정장에서 광화문 네거리의 미치광이를 연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는 인삼차를 시켰다. 그리고 명함을 돌렸다. 명함에는 ꡐ보물선닷컴ꡑ이라는 회사의 이름과 인터넷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ꡐCEO'라는, 그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직함이 붙어 있었다.
인삼차를 홀짝이며 그는 준비해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ꡒ지난번 요 호텔 2층에서 한번 설명회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희 회사는 그야말로 벤처 중의 벤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벤처의 원조라고도 부르지요. 탁 까놓고 말씀드리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찾고 있습니다.ꡓ
벌써 두 명 정도는 흥미를 잃고 손목시계를 보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재만 쪽으로 슬쩍 ꡐ도대체 저 사람 누구냐ꡑ는 시선을 쏘아보냈다. 재만이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그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한번 시작되면 그 끝을 모른다는 것을 재만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형식은 태연했다.
ꡒ타이타닉은 다들 보셨겠지요? 그거 보시면서 무슨 생각들 하셨습니까? 이야, 그림 좋구나? 여러분들이 여배우 가슴이나 보면서 침을 흘릴 때, 누군가는 타이타닉호에 들어가서 골동품이며 보석들을 쓸어온단 말입니다. 이런 배가 몇 척이나 있을까요? 수도 없어요. 1622년, 누에스뜨라 쎄뇨라 데 아또차호, 플로리다 서남쪽에서 허리케인 만나 침몰한 스페인 범선이죠. 1985년에 정확한 위치가 나왔는데 그 안에 무려 3억 달러어치의 금화가 있다는 겁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1857년 캐롤라이나 해안에서 260킬로미터 떨어진 해역에서 침몰한 미국 증기선이 있어요. 이름하여 쎈트럴 아메리카호, 여기서만 10억 달러어치 보물이 나왔습니다. 1993년 7월에는 아바나 앞바다에 침몰한 스페인 범선에서 자그마치 441개의 다이아몬드하고 200만 달러어치 보물이 쏟아졌지요. 자, 그런데 우리가 말도 안 통하는 미국이며 쿠바에 가서 이런 것을 캐낼 수 있겠습니까? 하려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ꡓ
그는 조용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조금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전라남북도 전도를 펼쳤다.
ꡒ자, 여기가 군산입니다. 그 앞바다, 바로 요기, 말도와 비안도, 보이시죠? 바로 여기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화물선과 군용병원선이 각각 침몰했다 이겁니다.ꡓ
ꡒ화물선과 병원선이요? 뭘 싣고 있었는데요?ꡓ
외환딜러 하나가 관심을 보였다.
ꡒ병원선에 뭐 대단한 게 있었나 싶으신 거지요? 이 병원선은 1945년 5월 8일,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731부대, 다들 아실 겁니다. 바로 이 부대 소속이었다는 겁니다. 병원선으로 위장했지만 이 배에는 만주와 조선에서 약탈한 금괴 100여톤이 실려 있었는데 그만 미군 B29의 폭격을 받아 군산 앞바다 말도 부근에서 침몰했습니다. 이 자료는 일본의 쿠마모또 대학 도서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더군요. 비안도 앞바다에 침몰한 배는 화물선인데 그건 같은 해 6월 13일입니다. 887톤급 화물선이었는데 그 안에는 금 9톤, 돈이 아니라 톤입니다. 은 30톤, 구리 300톤이 실려 있었는데 이 역시 미군기의 폭격으로 그만 고스란히 가라앉았죠. 그렇지만 일본 해군은 이걸 인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 후엔 전쟁이 끝나버렸고 결국 아무도 손을 못 댄 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죠.ꡓ
청산유수였다. 한두 번 떠든 솜씨가 아니었다. 하긴, 아무리 터무니 없는 소리라도 그가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사람들릉 자기도 모르는 새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말을 꺼내는 동시에 그것을 진심으로 믿어버리는 사람에게서만 풍겨나오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아마 사기꾼이 되었어도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멤버 중의 하나인, 증권 트레이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ꡒ그럼 그걸 여태 아무도 몰랐단 말입니까?ꡓ
ꡒ충남 장항 쪽 어부들치고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항제련소에서 근무하던 일본인들로부터 들었다는 노인네들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전직 장관 한사람이 배하고 사람을 사서 시도도 해본 모양인데 워낙 돈도 많이 들고 해서 결국 모두 손을 들고 말았지요.ꡓ
ꡒ그럼 이사장님은 뭐 뾰족한 수라도……?ꡓ
ꡒ다른 사람들은 장항 어부들이 눈대중으로 찍어준 데다 무조건 잠수부 꼬라박아서 봉사 문고리라도 잡겠지 하면서 뒤져왔지만 지금이 어떤 시댑니까? 정보화 시대 아닙니까? 저는 철저히 자료에 근거해서 접근했습니다.ꡓ
그는 가방에서 일본어로 된 복사물들을 꺼내 쏟아놓았다. 흐릿한 지도와 문서들이 흰 테이블보 위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ꡒ일본은 기록의 나라죠. 그놈들은 뭐든지 다 적습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해군성의 자료입니다. 위치까지 정확히 찍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수심도 낮아 집중적으로 탐사하면 몇 달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ꡓ
ꡒ그런데 왜 하필 우리한테 오신 겁니까? 우리는 투자자가 아니라, 말하자면 중개인들인데요. 물주들을 찾아가셔야지.ꡓ
그제야 캡틴이 나섰다.
ꡒ뭐 우리가 다리를 놓을 수도 있는 거닊k. 어WOTems 이사장님, 오늘 말ᄊma 고맙습니다. 저희들끼리 한번 최대한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고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돕겠습니다.ꡓ
형식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ꡒ고맙습니다. 일본놈들이 약탈해간 재물을 되찾는 거니까. 역사적인 의미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간다. 재만아.ꡓ
그는 재만의 어깨를 툭 쳤다. 재만은 그를 따라나갔다.
ꡒ언제부터 이거 시작한 거야?ꡓ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ꡒ좀 됐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도 어디 맨입으로 되냐? 쇠말뚝만 뽑아서는 될 일도 아니야. 적이 가진 것으로 적을 치는 거지. 이게 바로 마오식 전술이란 말이지.ꡓ
재만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멤버들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ꡒ나도 그렇지만 저 사람들, 이 바닥의 귀신들이야. 너 잘못하면 뼈도 못 추려.ꡓ
ꡒ걱정 마.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야.ꡓ
또 연락하자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후, 형식은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재만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캡틴은 그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재만에게 물었다.
ꡒ대학 때 친했다면서?ꡓ
ꡒ워낙 엉뚱한 놈이라서. 한마디로 괴짜야. 근데 졸업하고 나선 잘 못 봤지.ꡓ
ꡒ자 다 이메일로 돌릴 테니 그 핸드아웃들은 그만 보시고. 내 생각에 영 허황한 스토리는 아니야. 지금도 신안 앞바다에서 도자기는 많이 나오잖아? 그거야 유물이니까 국가 소유지만 금은 다르거든. 공유수면 점용허가하고 뭐지, 아, 매장발굴허가 받아서 발굴하면 사업자 것이 된단 말이야. 그런데 왜 우리 쪽에서 이걸 하느냐? 자본주의 좋다는 게 뭐랴? 자기 돈 가지고 사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냐.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보물선닷컴만 띄우면 된다는 거야. 증자하고 광고 치고 분위기 띄우면 자본은 금세 들어와.ꡓ
ꡒ상장시킬 수 있을까?ꡓ
누군가가 회의적으로 받았다. 사령관이 목소리를 낮췄다.
ꡒ상장회사 하나를 치자구. 작은 걸로. 건설 쪽이면 좋지. 하나 잡아서 보물선닷컴과 M&A시킨 후에……ꡓ
그쯤 되자 모두들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들을 끄덕였다. 그 다음은 보나마나 작전이었다. 어쩌면 보물은 나오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작전은 작전인데 그 제료가 보물인 작전이었다. 형식은 얼굴마담이 되어 사업설명회 때마다 나타나 일제가 남기고 간 보물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할 것이다. 물론 그건 서론이고 본론에 들어가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제시하며 보물선사업의 천문학적 수익성에 대해 떠들어댈 것이다. 몇조원의 가치를 지닌 금괴들이 인양되는 날엔 그 사업에 투자한 모든 사람들이 경마의 999배당보다 더 큰 이익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을,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폼 나게 보여줄 것이다. 일이 뜻대로만 된다면 형식은 어쩌면 아시아판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다. 보물선을 정말 찾은 사람이야 전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으니까. 그러나 만약 보물을 찾지 못한다면? 쇠고랑을 찰 수도 있었다.
그 날 밤 재만은 가벼운 죄의식으로 잠시 뒤척였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어쩌면 정말 보물이 쏟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꼭 죄악의 상황을 생각할 필요는 없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도 형식이잖아. 우리는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 고위험 고수익 종목에 투자하는 거야. 어느 정도 이익이 실현되면 현금 보유비율을 늘리고 적절히 위험을 분산하는 것뿐이야. 그건 사업의 기초라고.
다음달이 되자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캡틴은 작은 회사를 하나 등록한 후에 지방 중소도시에 기반을 둔 부실건설회사 하나를 사들였다. 형식은 거수기 이사회의 의결에 따라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그 후 화려한 사업설명회를 가졌다. 유명 연예인들이 동원돼 바람을 잡았다. 시골 할아버지들까지 지팡이 짚고 몰려오는 대성황이었다. 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일부 기자들이 보물선사업에 관한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고 그 기사를 ke아 주간지들은 더 낭만적인 판본으로 바꾸어나갔다.
태평양전쟁, 731부대, B29, 금괴, 난파선…… 이 이야기엔 낯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친숙한 것이었다. 스포츠신문의 만화나 대중소설에서 자주 보던 장치들이었다. 충무공동상의 모델이 사실은 토요또미 히데요시라는 이야기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지만 B29의 폭격으로 침몰한 금괴 운반선 이야기는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기자들은 좀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가미라기 시작했다. 판 타블로이드 주간지는 ꡒ일본 해군의 퇴역 장교 모리나가씨는 얼마 전 임종을 앞두고 그동안 자신을 돌아준 한국인 안마사에게 평생을 간직해온 비밀을 털어놓았다. 직감적으로 고백의 진실성을 감지한 안마사는 고향인 광주로 돌아와 점술가인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결국 점술가 짐씨는 수소문 끝에 일제 유물 전문가인 이형석씨를 소개받아 만나게되고……ꡓ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일본군 퇴역 장교의 유언이라는 드라마틱한 일화까지 곁들여져 이 이야기는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주가는 백 배가 넘게 치솟았지만 보물선이라는 재료가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금융당국의 의심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여의도와 테헤란로를 오가며 느긋하게 전광판의 단풍잎이나 감상하고 있는 동안에 형식은 비안도 앞바다에 띄워놓은 바지선에서 아예 살고 있었다. 현장을 찾는 투자자들은 통통배에 올라 형식의 열정에 찬 설명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보물 발굴은 시간문제 같았다. 투자자들은 자시 발치에서 출렁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그 아래엣서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누런 금덩이들을 상상했다. 오줌을 지리고 싶을 정도로 짜릿한 상상이었다. 그런 투자자들에게 형식은 타이타닉호의 인양을 맡았던 미국의 수중탐사 전문업체가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꼭 곁들였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 본사가 아니라 자회사격인 캐나다 트레저써치사가 참여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1급 잠수사 3명과 12명의 수중탐사 전문요원들이 날마다 황해의 흐린 물 속으로 뛰어들어 대륙붕 위에 앉혀있을 731부대의 병원선과 화물선을 찾아다녔다. 바지선과 통통배에선 언제나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 ꡐMy Heart Will Go On'을 열창하는 쎌린느 디옹의 목소리가 직직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지 못한 투자자들은 아예 군산이나 장항에 방을 얻어 상주하며 발굴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 사이에 주가는 이미 수백 배나 상승하여 드디어 여러 기관에서 투자자들에게 조심스럽게 경고 메시지를 발하고 있었다.
형식은 TV에도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이 텁수룩한 지리산 산장 주인 같은 풍모로 그는 보물선의 꿈과 희망을 역설했다. ꡒ꿈이 사라진 시대, 아직도 꿈을 찾아 청춘을 바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만나볼 이형식씨가 바로 그분입니다.ꡓ 리포터들은 어린 새처럼 발랄하게 나풀거리며 그의 동정을 전했다. ꡒ아니, 수염은 안 깎으세요?ꡓ 호들갑도 떨었다. 화면 속의 형식은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등뒤에 후광처럼 깔린 어떤 초조함이 재만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번지수도 없는 바닷속을 뒤지는 일의 허황함이 그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재만은 다른 멤버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 건설회사의 지분을 깨끗이 팔아치웠다. 뒤늦게 보물선 소식을 듣고 몰려와 대기하던 매수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문을 내고 매도물량을 소화했다. 물량은 금세 소진되었다. 재만은 그 돈으로 평소 가지고 싶었던 231마력의 3.0리터급 재규어를 사들였다. 시속 100킬로미터에 다다르는데 7.9초밖에 걸리지 않는 상시 4륜구동에 6기통짜리 꿈의 자동차였다. 남상적이면서 부드러운 디자인과 엔진의 폭발적인 힘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러나 그 멋진 자동차를 사고도 즐길 시간이 없었다. 고작 테헤란로와 여의도를 단조롭게 오갈 뿐이었다. 낮엔 차가 너무 많았고 밤중에는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가 그의 질주본능을 억눌렀다. 그렇게 비싼 차를 샀는데도 그에겐 너무나 많은 돈이 남았다.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는 어느새 임신 중이었다.
ꡒ너무한 거 아냐?ꡓ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아내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재만은 그녀를 갤러리아 명품관으로 데리고 가 업장의 숍마스터들이 주차장까지 쇼핑백을 들고 배웅 나올 정도로 엄청난 쇼핑을 해치웠다.
ꡒ자기 이렇게 많이 벌어? 보물선을 찾는다더니, 그거 찾은 거야?ꡓ
ꡒ아니.ꡓ
ꡒ21세기에 보물선이라니. 하여간 남자들은 다 애라니까.ꡓ
ꡒ내가 그걸 믿는다고 생각해?ꡓ
ꡒ그럼? 아, 벌써 다 걷어들였구나?ꡓ
ꡒ당연하지.ꡓ
ꡒ역시 자기는 똑똑해.ꡓ
아내는 살짝 불룩해진 배에 손을 올려놓고 행복해하다가 문득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ꡒ그러다 진짜 찾으면 어쩌려고? 얘기는 그럴듯하던데.ꡓ
ꡒ애기 너무 좋아하지 마. 너무 그럴듯하면 일단 의심해봐야 돼. 진짜는 어딘가 어설프다구. 아귀가 딱딱 맞으면 십중팔구 소설이거나 사기야.ꡓ
그렇게 말하고 재규어의 시동을 걸었다. 그의 아내는 모른다. 금괴 100톤을 실은 보물선이 정말 발견된다 해도 뒤늦게 뛰어들어 상투잡은 주주들의 전체 투자액을 상회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이미 보물선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몇 배나 되는 돈을 키보드 몇 번 두드려 벌었다는 것을. 그녀는 그런 추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좀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보물선의 전설을 믿는 사람, 직접 보물을 찾겠다고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 그리고 그걸 재료로 돈을 버는, 재만 같은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나 이런 구조가 있다. 경주에 가면 신라 고분에 관한 전설을 떠드는 할아버지들이 있다. 그걸 듣고 밤을 낮 삼아 야산 여기저기를 몸소 쇠꼬챙이로 쑤시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결국 돈을 버는 것은 중개상인 나까마들과 인사동에 앉아 쌍화차를 시켜먹는 노회한 골동품 가게 주인들뿐이다.
형식이 바지 시장으로 있는 한생건설의 주가총액은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금괴 100톤의 가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전형적인 폭탄돌리기였다 재만은 홍차에 꼬냑을 부어 들이켰다. 아마 내일이면 주가가 갑자기 빠지기 시작한 것을 안 투자자들이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하겠지. 조바심을 내며 회사로 몰려가 도대체 언제가 돼야 그 전설의 보물선이 인양되는 거냐고 따져물을 것이다. 개미들 중 몇몇은 언론사에 제보할지도 모른다. 자기 무덤을 파는 지이지만 그들은 결국 그렇게 한다. 군산 앞바다에 시사프로그램 제작진이 나타나 아무 것도 없는 망망대해를 찍어가면 그걸로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회사는 성난 투자자들에 점거당해 업무가 마비될 것이다. 하다못해 삭아빠진 일본군 철모라도 하나 보여주면 모를까.
그 날 밤 재만은 전례 없이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민소매 옷을 입은 여자가 나타나 그에게 자기 겨드랑이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겨드랑이엔 털이 무성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겨드랑이를 들이밀려 이 털을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연신 물었다. 그는 여성용 면도기가 있으니 그걸로 밀어버리면 될 일이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여자는 마이동풍으로 그를 따라다니며 도대체 이 무성한 털을 어쩌면 좋으냐. 이것 때문에 소매 없는 옷을 입을 수가 없노라, 하소연했다. 그녀에게서 달아나다 보니 어느새 광화문 네거리였다. 광화문 네거리는 붉은 옷을 입은 인파로 가득했다. 벌써 월드컵인가? 그는 겨드랑이에 털이 무성한 여인으로부터 도망친 데 안도하며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일순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붉은 옷을 입었는데 자신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럴 수가, 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함성이 울려퍼졌다. 인파는 끝이 없었다. 붉은 옷을 입은 남녀들은 모두 그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쫒겨 광장의 한가운데로 밀려갔다. 그런데 거기 거대한 동상이 우뚝 선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엔 충무공 대신 형식이 칼자루를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형식아, 나야. 겨드랑이에 털 난 여자가 재주를 부려 내 옷을 빼앗아갔거든. 나 좀 숨겨주라. 그는 팔을 뻗어 재만을 석대 위로 올려주었다. 재만은 형식과 함께 광화문 네거리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군중들이 모두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식이 속삭였다. 내 기분 알겠지? 올라오면 근사하다구. 재만은 부끄러움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형식이 장군의 갑옷을 그에게 둘러주었다. 너는 꼭 아르마딜로 같구나. 형식이 킬킬 거리며 재만을 놀려댔다.
재만은 잠에서 깨어나 축축이 젖은 등을 시트로 닦았다. 그의 아내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여섯시였다. 재만은 불길한 기분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뉴욕 증권시장의 동향을 체크했다. 미국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다우지수와 나스닥지수가 소폭상승했다. 나쁠 게 없었다. 그린스펀이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간밤, 세계는 평온했다.
그 날 아침, 그가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울렸다. 수염이 텁수룩한 이상한 사람이 아래에 와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식이 분명했다.
ꡒ올려보내시죠.ꡓ
잠시 후 형식은 사무실로 올라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짠내가 확 풍겼다.
ꡒ인삼차 있을까?ꡓ
ꡒ유자차가 어때?ꡓ
ꡒ좋지.ꡓ
그는 유자를 듬뿍 넣은 차를 스푼으로 휘휘 저어 후루룩 마셨다.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ꡒ어떻게, 뭐가 좀 보여?ꡓ
그는 유자를 건져 입에 넣고 씹으며 씩 웃었다.
ꡒ다 알면서.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란 말이지.ꡓ
형식이 앞으로 겪을 수난에 생각이 미치자 재만은 문득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는 업계의 룰을 조금만 어기기로 했다.
ꡒ그걸 알면서도 그 추운데서 짠물을 먹고 있단 말이냐? 야, 그만 손털고 어디 조용한 데라도 가 있지 그래.ꡓ
ꡒ손 털면?ꡓ
ꡒ뭐 다른 일이 있겠지. 이거 올해 안으로 보물선 안 나오면 투자자들이 가만 안 있을걸.ꡓ
ꡒ뭐, 감방에나 가겠지. 그나저나 너희들한테 손해를 끼치게 돼 미안하다. 내 말만 믿고 그렇게 거액을 끌어들였는데…… 나는 밥주발 하나도 못 건져내고 있단 말이지.ꡓ
ꡒ우리 걱정은 하지 마. 우리야 뭐.ꡓ
꿈에서처럼 재만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ꡒ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ꡓ
그리곤 또 침묵이었다. 썰렁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재만이 그 옛날의 충무공동상 얘기를 꺼냈다.
ꡒ지금은 반미운동하는 애들이 자주 올라간대. 미대사관도 가깝고 광화문이하는 상징성도 있고. 그래서 경비가 엄청 강화됐다더군. 너야 새벽에 올라갔지만 걔들은 사다리 타고 대낮에 올라가니 차도 밀리고 부목 효과도 만점이지. 그나저나 그때 너, 정말 웃겼어. 우리끼리 모이면 가끔 그 얘기 해. 거 있잖아. 니가 이순신이 토요또미 히데요시라며…….ꡓ
ꡒ그건 진짜다.ꡓ
형식은 심각했다. 재만은 손바닥으로 볼을 비볐다.
ꡒ내가 이렇게 돈 몇 푼 벌자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다 그걸 밝히려고 그러는 거다.ꡓ
형식은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보물선이 목표가 아니고 여전히 충무공동상이 목표라고. 그리고 그 동상과 조선총독부를 둘러싼 일본의 재침략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 지향이라고.
ꡒ내 이름도 매스컴도 타고 해서 좀 알려졌고 이제 보물선만 나오면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 거란 말이지. 그러면 그 돈으로 재단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파헤쳐볼 생각이다. 어쨌든 내일부터는 새로운 탐색법을 도입하려고 해. 탐사선 한 척 더 투입하고 잠수부도 대여섯 더 넣어서 쌍끌이로 훑어볼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조금만 참아달란 말이지. 더도 말고 일년만.ꡓ
재만은 이미 자기 지분을 다 팔아치웠다는 얘기는 끝내 꺼내지 못했다. 형식은 재만의 손을 굳게 쥐고는 다시 장항으로 내려간다며 사무실을 나섰다. 재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떠난 지 일주일만에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그때까지도 개미들은 보물선만 발견되면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며 손절매를 하지 않고 버텼다. 다시 일주일이 더 지나자 반토막에서 또 반토막이 났다. 한생건설의 직원들은 아직도 인양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자료를 언론에 뿌렸지만 발빠른 경제지들은 이미 ꡐ보물선 소동의 전말ꡑ 따위의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ꡐ꿈ꡑ은 ꡐ소동ꡑ이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면 ꡐ소동ꡑ은 ꡐ사기극ꡑ이 될 것이었다.
며칠 후 투자자들이 장항 앞바다로 몰려갔다. 비안도와 말도 근처를 뒤지던 그들은 잠수부들로부터 며칠 전부터 탐색작업이 중단됐고 형식은 밤을 틈타 육지로 달아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밀린 임금과 선박 대여료를 받지 못한 어촌계원들에게 오히려 붙들려 있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ꡒ주주라며 회사 주인이 아니요?ꡓ 어부들은 그들의 떡살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재만과 멤버들은 여전히 주기적으로 새벽같이 만나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들은 보물선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들소에 누가 눈길을 주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캡틴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을 꺼냈다.
ꡒ혹시 한생 이사장 전화 받은 사람 있어?ꡓ
ꡒ지금 수배중이잖아? 투자자들이 사기로 걸었다던데? 그게 어떻게 사기야? 보물선이 있다고 정말로 믿었다면 사기가 아니지. 하여간 우리나라는 뭐든지 힘으로 다 밀어붙이려고 든다니까. 그 우격다짐들하고는…….ꡓ
홍콩계 투자회사의 펀드매니저 하나가 혀를 쯧쯧 찼다.
ꡒ누가 아니래. 이사장도 떳떳하게 나와서 변호사 고용해서 붙으면 승산있지. 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정말로 믿었다면 사기가 아니지. 참 아까워. 열정이 대단한 친구였는데…….ꡓ
재만은 입맛을 잃었다. 역겨웠다. 그는 찬찬히 면면들을 둘러보았다. 저 철면피들. 수천 명의 재산을 간단하게 꿀꺽하고도 아침이면 호텔 식당의 메로구이를 집요하게 발라먹는 저 놀라운 식욕, 추악한 욕망. 문제는 재만도 그들과 전적으로 같은 종자라는 데 있었다. 그제야 재만은 동업자들에게 철저히 냉소적인 조지 쏘로스의 심정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희대의 국제투기꾼을 생각하다보니 재만의 결론은 다소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ꡐ그러니까, 네놈들 돈까지 다 긁어모아 쏘로스 같은 최강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정의는 승자의 것이니까. 그 다음에 기부도 하고 자선사업도 벌이고 미술관도 세우자. 헤지펀드나 투기자본에 기생하는 너희 같은 한탕주의자들은 상상도 못할 꿈이지. 체 게바라가 뭐라던?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안 하던?ꡑ 모든 자기반성도 결국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쪽으로 귀결시키고 마는 것은 이 계통에 들어온 이후 생겨난 재만의 습성이었다. 캡틴이 주변을 살핀 후 말을 이었다.
ꡒ글쎄. 한생 이사장이 갑자기 전화해서 도피자금을 대달라는 거야.ꡓ
ꡒ우리야 이제 주주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ꡓ
ꡒ나도 그랬지. 주식회사가 뭐냐. 주주의 유한책임 아니냐. 그런데 이미 우리는 그 주주조차 아닌데 왜 이러느냐. 그랬더니 인간적인 정리로 닥 한 장만 도와달라더군.ꡓ
옆자리의 펀드매니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ꡒ억? 그 인간 돌았구만.ꡓ
캡틴이 씩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ꡒ아니. 백.ꡓ
순간 모두들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ꡒ그 인간, 급했구만. 줬어?ꡓ
ꡒ그거야 안 줄 수 있나. 좀 안됐잖아?ꡓ
그가 디저트로 나온 오렌지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자 그제야 시침을 떼고 있던 구 명이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ꡒ사실 나도 좀 넣어줬어. 근데 그날따라 통장에 현금이 없어서 나는 백 좀 밑으로 밀어줬지.ꡓ
ꡒ짜다 짜. 나는 그래도 세 자리 딱 채워서 보냈다.ꡓ
다들 쿡쿡 웃으며 디저트로 나온 녹차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재만은 약간 뽀로통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의 표면을 긁었다. 그는 궁금했다. 왜 자신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을까. 그는 그 대목에서 일말의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깟 백 만원을 빌리려고 저 파렴치한들한테 굽실거리다니. 그는 계산을 치르고 먼저 자리에서 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 수십 통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중에 제목이 없는 이메일 하나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열어보니 이형식의 메일이었다. 그는 전국의 피씨방을 전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ꡐ면목이 없다. 투자자들을 어떻게 보냐ꡑ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ꡐ여유가 있으면 몇 푼만 좀 꾸어달라ꡑ고 청했다. 당장 방이라도 구해야 할 텐데 공덕동에는 투자자들이 죽치고 있으니 손을 벌리기가 어렵다고 했다. 아직 탐사사업에 미련이 남았는지 자신에게 1년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반드시 찾아낼 자신이 있다고도 했다. 금괴를 싣고 오던 배가 침몰했는데, 그리고 그 뒤로 누구도 인양한 기록이 없는데, 그 배가 도대체 어디로 갔겠느냐는 것이다. 진실한 우정과 금은 변치 않는다고 그는 적었다. 재만은 홈뱅킹 화면에 백 만원이라고 입력하려다가 그거 집어넣고 우쭐대던 캡틴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을 바꿔 삼백 만원을 적어넣었다. 그리고 분명 승산이 있으니 변호사를 선임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라고 충고해주었다. 답장은 없었다.
그 후 몇 달간은 폭풍의 나날이었다. 재만들과도 잘 알고 지내던 벤처업계의 기란아와 그의 후원자였던 한 여성사업가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때는 동업자였던 30대 벤처기업가와 60대 여성사업가는 졸지에 맞고소를 벌이며 몰락해갔다. 그것은 벤처랠리의 종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벤처기업의 수익모델이 없네. 벤처육성기금을 유용한 기업이 있네. 주가조작을 벌였네. 각종 스캔들이 사흘이 멀다하고 재만의 조찬 정보모임도 중단되었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하드디스크에 담신 이메일도 씨디룸에 복사해 은행 개인금고에 보관했다. 아직까지 보물선 사건과 관련된 멤버는 하나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그전에 가담한, 아무 재료도 없이 머니게임으로만 주가를 밀어올린 작전들이 이런 대세하락 국면엔 더 위험했다.
코스닥지수도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벤처붐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가 되었다. 테헤란로와 여의도의 빌딩들에 빈 사무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재만은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MBA 유학을 떠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물론 대찬성이었다. 파란 잔디가 깔린 마당에서 남편을 배웅하고 자신은 렉서스를 몰고 쇼핑몰에 가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녀의 작은 꿈이었다. 돈도 충분했다. 다른 멤버들도 그들식 용어로 말하자면, 현금 보유를 늘리고 보수적 포지션을 유지하면서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 정도가 벤처캐피털에 밀어 넣었던 투자금을 약간 떼였을 뿐, 나머지는 건재했다. 그들은 그 순간 그 치열한 전쟁터의 우세종이었다. 그들은 손절매에 냉정했고 자잘한 인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지저분한 쪽과는 거래를 트지 않았고 어디에도 어설픈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증권감독기구는 그들에겐 눈먼 장님과 같았다.
투자금을 건질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보물선사업의 소액주주들은 바지 시장이 달아난 한생건설로부터 발굴권을 빼앗아 자체적으로 탐사에 나서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은 묘하다. 일단 발굴권을 빼앗자 보물선은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회의적인 자들은 파문 당했다. 그들은 새로 전라북도에 연고를 둔 선설업체를 선정하고 더 많은 돈을 끌어와 투자했다. 그들은 이미 들어간 걸 회수하려면 더 밀어 넣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을 팔고 가게를 처분한 사람들이 눈이 벌개진 채 바지선 위에서 밤을 지샜다.
재만은 그런 소동을 자기 집 소파에 앉아 TV화면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유학준비에 지친 아내도 위로할 겸 결혼 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나섰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와이였다. 두 사람 모두에게 정말 오랜만의 휴가였다. 그의 아내는 한껏 들떠 있었다.
ꡒ그거 알아? 워커홀릭들 중에 고액 연봉자가 그렇게 많대.ꡓ
ꡒ그래?ꡓ
ꡒ많이 벌다보니 쉬는 시간도 돈으로 계산이 되는 거야. 일주일 쉬고 수천 날린다고 생각하면 누가 편히 쉴 수 있겠어? 그러니까 죽어라고 일하는 거지. 당신처럼.ꡓ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평일에, 그것도 주식과 채권 시장이 돌아가고 있는 주중에 쉰다는 건 재만에겐 너무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이 세계를 떠날 생각이었다. 업계 전체가 침체기여서 놀아도 별 타격이 없는 시절이 된 것이었다. 오히려 채권과 우량주에 조금 묻어둔 뒤, 훗날을 기약하면서 MBA를 통해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와 아내는 하와이의 이 섬 저 섬을 전전하며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
도착한 첫날은 코하라 해변 검은 용암지대에 자리잡은 마우나라니 리조트에 짐을 풀자마자 라운딩을 시작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신의 작품이라는 프랜시스 에이치 엘아이 브라운 코스에서 아내와 함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클럽을 휘둘렀다. 의외로 아내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매일 골프연습장에 나가고 머리 올린 뒤로는 한 달이 멀다하고 필드에 나가더니 때로는 재만보다 훨씬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퍼팅의 섬세함에서 재만은 아내의 적수가 아니었다. 18홀 라운딩을 마친 후에는 바닷가의 야외식당에서 하와이 전통무용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다음날에는 코스를 바꿔 라운딩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해변과 계곡들을 탐사하며 시간을 보냈고 저녁엔 유람선에 올라 섬 주변을 돌며 식사를 했다. 달빛이 교교히 내리비치는 갑판에서 재만은 낭만적인 분위기에 빠져 모처럼 아내의 귓속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ꡒ행복이란 게 참 별거 아니야. 열심히 일한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 뭐 그런 거 아닐까?ꡓ
아내는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재만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ꡒ맞아. 나도 행복해.ꡓ
갑판에는 다정한 노부부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의 아내가 부러운 듯 말했다.
ꡒ저렇게 늙어야 할 텐데.ꡓ
ꡒ그러지 뭐.ꡓ
ꡒ이혼율이 엄청 높아졌대.ꡓ
ꡒ그러게.ꡓ
ꡒ자기 돈 좀 있다고 바람피고 그러면 죽는다.ꡓ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찔러오자 재만은 씩 웃어 보이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심, 사람의 일을 누가 알랴. 생각하고 있었다.
5박 6일의 달콤한 휴가는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골프와 유람, 식도락, 그리고 느긋한 낮잠으로 보낸 시간들이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 올라 하와이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들이 올라탄 국적기는 몇 시간 후 사뿐히 인천공항의 활주로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둘은 차례를 기다려 입국심사를 받았다. 검사는 이상하게 오래 걸렸다. 담당자가 잠깐만 기다리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섯 명의 남자가 담당자를 따라 나타났다.
ꡒ김재만씨 되시죠?ꡓ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들은 재만을 데리고 바로 VIP통로로 빠져나갔다. 이런 대접을 받기는 처음이었지만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혹시 여권에 무슨 문제가 있나? 별 생각을 다해봤지만 또렷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놀란 그의 아내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남자들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 중 하나가 정중하게 아내를 데리고 짐 찾는 곳으로 안내했다. 위압적인 자세로 보아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어떤 작전이 걸려든 거지? 금감원인가? 아니면…….
ꡒ이형식씨 아시죠?ꡓ
보물선이구나!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다. 그 일은 이미 깨끗이 정리된 건이었다. 그들말고도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이 뒤늦게 머니게임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딱히 그들이 작전을 걸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그 사업 초기에 투자를 했을 뿐이었다. 사업이 유망하다고 생각해서 투자했고 나중에 그 전망이 불투명해져 철수한 것이었다.
ꡒ대학 동창입니다. 그게 전붑니다.ꡓ
ꡒ저희하고 잠깐 바람이나 쐬시죠.ꡓ
ꡒ글쎄요, 제 변호사와 얘기를 해봐야겠는데요.ꡓ
ꡒ가서 부르시죠. 시간 드리겠습니다. 사안이 긴박해서요.ꡓ
그들은 재만을 검은색 중형차에 태워 공항을 빠져나갔다. 차는 20분쯤 달리다 멈추었다. 도착한 곳은 경찰서라기보다는 무역회사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재만이 초조하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사이 남색 폴로셔츠를 받쳐입은 남자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재만은 지레 앞질러나갔다.
ꡒ아니, 이형식이 무슨 일 저질렀습니까?ꡓ
폴로셔츠는 서류를 뒤적였다.
ꡒ아마 외국에 계셔서 모르셨을 텐데요.ꡓ
그는 서류철 속에서 사진을 찾아 들이밀었다. 사진에는 광화문 네거리의 충무공동상이 찍혀있었다. 무슨 서울시 홍보잡지 같은 데서 오래낸 사진 같았다. 재만은 뚫어지게 사진을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었다. 그냥 동상이었다. 재만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폴로셔츠가 다른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충무공동상이, 마치 구소련 몰락 이후의 레닌 동상처럼 칼자루를 쥔 채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동상 남쪽의, 본래는 거북선 모형이 있어야 할 곳엔 커다란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리고 동상을 받치고 있는 석대도 검게 그을린 채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ꡒ이형식은 현재 충무공동상 폭파테러사건의 용의자로 수배중입니다. 나흘 전 새벽 네 시경, 누군가가 광산에서 훔친 다이너마이트로 충무공동상을 날려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변 우범자와 동일 범죄 전과자들을 중심으로 탐문한 결과 이형식이 범인이라고 추정하고 현재 투적 중에 있습니다. 이형식은 이전에도 몇 차례 충무공동상이 토요또미 히테요시 동상이다, 우기면서 훼손한 바 있고 종로경찰서에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이것.ꡓ 폴로셔츠는 비디오를 데크에 넣고 리모컨으로 TV의 스위치를 켰다. 흐릿한 화면의 폐쇄회로 TV에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동상 밑에 무언가를 놓고, 라이터를 치지직, 불을 붙이더니 황급히 길을 건너 달아났다. 잠시 뒤를 돌아보는 그는, 분명 이형식이었다. 주황색 불빛이 번쩍이더니 잠시 후, 화면이 심하게 흔들렸다.
ꡒ자, 폭발입니다.ꡓ
폴로셔츠가 부연했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예상보다 엄청난 폭발음에 겁을 집어먹은 듯, 손으로 귀를 막은 이형식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ꡒ이형식이 맞지요?ꡓ
ꡒ네 걸음걸이이며 머리모양이며 형식이가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제 눈은 못 속입니다. 아니, 어떻게, 세상에 저런 일을…….ꡓ
ꡒ분명하지요?ꡓ
폴로셔츠는 재차 물었다. 괜히 겁먹었다는 생각에 재만은 자신도 모르게 휴,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여독도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ꡒ네. 이형식이 맞습니다.ꡓ
폴로셔츠는 말없이 노트북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겨댔다.
ꡒ이제 가도 됩니까?ꡓ
폴로셔츠는 고개를 들어 재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ꡒ가도 되냐구요? 이형식이 어디 있습니까?ꡓ
폴로셔츠가 물었다. 재만은 눈을 동그렇게 떴다. 폴로셔츠는 재만 앞으로 예금통장 사본을 들이밀었다. 예금주는 이형식이었다.
ꡒ이 삼백. 이거 무슨 돈입니까?ꡓ
재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본을 살폈다.
ꡒ아, 이거요? 그냥 생활이 어렵다고 메일이 왔길래 용돈이나 하라고 보내준 겁니다.ꡓ
ꡒ이형식이가 사기죄로 기소중지 중인 거 알고 있었죠?ꡓ
ꡒ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ꡓ
ꡒ마지막으로 이형식이가 김재만씨 찾아왔을 때, 인삼차 마시면서 충무공동상이 자기 목표라고 말했지요?ꡓ
도대체 이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재만은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ꡒ그게 그, 인삼차가 아니라 유자찹니다. 예, 제가 그 부분은 확실히 기억을 합니다. 저희 회사에는 인삼차가 없습니다. 그리고, 네, 밎습니다. 충무공동상이 목표다. 뭐 그런 헛소리를 듣기는 했습니다.ꡓ
ꡒ그리고 얼마 후 이형식이 이메일을 보내 자금지원을 요청해왔지요?ꡓ
ꡒ저, 그건 충무공동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순수한…….ꡓ
ꡒ그런데 그날 오후 바로 삼백만원을 입금해주셨지요? 왜 그러셨습니까?ꡓ
ꡒ네. 하지만 그건……ꡓ
ꡒ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 도난당한 게 바로 그 다음날입니다. 물론 알고 계셨겠지요?ꡓ
ꡒ이것 보세요. 내가 미쳤다고 충무공동상 폭파하는 일에 돈을 댑니까? 내가 누군지 아실 거 아닙니까? 저처럼 신원 확실한 고액연봉자가 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일에 손을 대겠습니까?ꡓ
ꡒ이형식은 언제 처음 만나셨습니까?ꡓ
폴로셔츠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느긋하고 차분했다.
ꡒ대학교 일학년 때…….ꡓ
ꡒ두 사람이 전공이 다른데 어디서 만나셨지요? 그렇지요. 역사연구회에서 만나셨죠. 아시다시피 상당히 과격한 모임이죠. 그는 거기 핵심멤버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기였고. 듣자하니 아주 친한 사이였다고 하던데, 그때 이형식한테 포섭된 거 아닙니까?ꡓ
ꡒ포섭이라니요. 그 자식은 미친놈입니다.ꡓ
ꡒ미친 사람한테 왜 삼백만원을 주고 한생건설 대표이사 선출 때 이사의 한사람으로서 표를 던지셨습니까? 만약 미친 사람인 줄 알고 대표이사 선임에 동의했다면 주주들한테 사기를 친 건데, 아닙니까? 경제전문가니 잘 아실 거 아닙니까?ꡓ
ꡒ……변호사를 불러주십시오.ꡓ
ꡒ그러지요. 삼백만원 준 것도 시인하셨고 충무공동상 폭파기도도, 사전에 인지했노라, 진술도 해주셨고, 헙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집에 가시기는 좀 어려우실 겁니다. 일단 우리는 영장신청 들어갑니다. 변호사 오거든 영장실질심사 한번 상의해보십시오.ꡓ
평소 알고 지내던 정변호사가 도착하자 재만은 그의 핸드폰을 빌려 우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생각보다 충무공동상 폭파사건은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성웅 이순신의 동상이 폭파되었다는 데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의 아내는 충격을 받아 누워 버렸고 그가 그 일에 관련되었을 줄은 꿈에도 모르는 그의 부모들은 그가 그 사건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자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만이 통화를 끝내자 변호사는 조용히 멤버들의 동향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형식에게 도피자금을 빌려준 전원이 소환되어 주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 만원을 넘게 송금한 사람들은 일단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중이었고 그 중에서 삼백 만원으로 최고액을 기록한 재만은 주범으로 몰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정보원측에선 이 사건을 국가혼란을 노린 일종의 테러로 보고 있으며 폭파테러에 쓰인 자금의 출처를 철저히 캐고 있다고 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친일파 조직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부터 무정부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제야 재만은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ꡒ그럼 여기가 국정원입니까?ꡓ
ꡒ어, 데려올 때 얘기 안 했던가요? 국정원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옛날처럼 통닭구이니 칠성판이니 이런 거 안 합니다. 이 친구들, 보시다시피 젠틀해요. 어쨌거나 일단 이형식이 그 사람이 잡혀야 당신도 옴짝달싹할 수 있을 겁니다. 잡아서 정신감정해서 미친놈으로 판명되면 좀 수월해지겠지만, 이게 워낙 지금 화제의 사건이라……. 세상에 충무공동상을 다이나마이트로 날려버리다니. 지금 난리 났어요.ꡓ
ꡒ그러게 미친놈이죠. 충무공동상의 모델이 토요또미 히데요시라고 믿고 있는 놈입니다. 아, 어쩌다 그런 자식과 안면을 터가지고…….ꡓ
변호사는 의례적인 말로 재만을 위로하고는 영장실질심사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하와이에서 입고 온 발랄한 옷차림 그대로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국정원은 차 소리 하나 안 들리고 고요했다. 혹시 옆방에서 고문하는 소리가 들려오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가끔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울리는 차임벨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고요한 방에서 그는 이형식의 행방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수만 가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국정원만큼이나 그도 형식의 행방이 궁금했다. 그렇지만 그가 잡힌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관련된 보물선 사업의 투자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물선사업의 전모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잡혀도 걱정, 안 잡혀도 걱정이었다. 제발 어디 가서 뒈져라, 이 웬수야. 재만은 빌고 또 빌었다.
영장실질심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속 수감되었다. 재판부는, 비록 사건 당시 재만이 국내에는 없었다고 하나 폭발물 구입 직전 명백한 사유도 없이 사업상 아무 관계도 없는 용의자에게 돈을 송금한 사실이 분명하고 그에 대한 변호인측의 해명도 불충분한 점, 사건 직전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여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검찰측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재만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금액도 적을뿐더러 도주의 우려가 적다고 판단, 모두 풀려났다. 재만은 영장실질심사에서 멤버들과 조우했다. 재만은 탄식했다.
ꡒ하, 돈 삼 백에 감방갈 줄이야.ꡓ
캡틴이 이를 갈며 말했다.
ꡒ그런 또라이 새끼가. 고생 좀 해. 우리가 어떻게 손 좀 써볼게.ꡓ
캡틴은 법정 앞에 대기해 놓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금융계의 잘나가는 일단의 30대들이 충무공동상 폭파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 사건은 그 엉뚱함 때문에 금융감독기관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금감원은 경찰과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내사에 들어갔다. 언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캡틴과 다른 멤버들은 인신의 구속은 간신히 면했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언론의 집요한 추적까지 따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의 소속 회사에서도 사유서를 요구했다. 고객의 신뢰를 먹고사는 금융기업에서 그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잇따른 벤처비리의 끝물이었고 회사는 문제아들을 받아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언론과 금감원의 추적은 계속되었다. 며칠 후, 한 경제지가 ꡐ보물선과 충무공, 그 기이한 커넥션ꡑ이라는 기사를 터트렸다.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너무도 상세한 정보로 가득한, 그야말로 그대로 갖다가 공소장으로 써도 될 내용이었다. 단지 정확한 날짜가 빠져있을 뿐이었다.
신문에는 사기꾼들의 돈을 환수해 충무공동상 재건립에 써야 한다는 독자투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가방에 달러를 가득 담아 공항을 빠져나가려던 캡틴이 검거됐다. 그때까지도 이형식의 행방은 묘연했다. 잡히지 않는 범인 대신에 그들이 언론과 대중의 표적이 되었다. 금감원과 검찰은 그들이 관련된 모든 금융거래를 샅샅이 뒤졌다. 비교적 정상적인 거래까지도 작전의 혐의를 받았다. 결국 그들은 다시 영장실질심사에 직면했다. 이번 실질심사는 훨씬 혹독했고 거의 빠져나간 자가 없었다. 주가조작은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악질범죄라고 판사는 감정을 실어 말했다. 캡틴은 항변했다.
ꡒ선의의 투자라구요? 그런 사람이 어딨습니까? 오직 정보에 어두운 투자자가 있을 뿐입니다.ꡓ
판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구속영장을 집행하라고 판결했다. 캡틴과 멤버들은 줄줄이 구치소로 떠났다. 떠나는 길에 보물선사업의 투자자들이 몰려와 달걀을 던졌다. 캡틴의 머리통은 달걀로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자 투자자들은 캡틴과 멤버들의 집에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
그 후에도 이형식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는 소식도 있고 베트남에서 사업을 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아주 드물게는 거제도 일대에서 다른 사람들이 포기한 야마시따 보물선을 찾는다는 얘기도 들렸다. 지리산 일대에서 쇠말뚝을 뽑고 있는 그를 보았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흘러다녔다 그때마다 검거전담반이 급파되어 이형식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그들의 돈으로 세워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충무공동상은 새로 건립되었다. 동상은 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거의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다. 동상이 복원되자 사람들은 충무공동상 폭파사건과 보물선소동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집단적 망각에 기여한 것은 바로 비행기 두 대가 뉴욕의 월드스트리트쎈터에 충돌하는 사건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텔레비전에서는 하루종일 거대한 건물의 붕괴장면이 반복재생되었다. 고층건물로 출근하는 모든 사람들이 밤마다 뒤숭숭한 꿈자리로 뒤척이던 어느 날 새벽, 한 남자가 광화문 교보문고 옆, ꡐ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ꡑ라고 씌어진 담벼락 앞에서 새로 지은 말끔한 충무공동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 청소를 하던 환경미화원이 그의 발치께를 플라스틱 빗자루로 쓸고 지나갔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워물며 충무공동상을 노려보았다. 미화원이 그를 힐끗 쳐다보자 그는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가 충무공동상을 지날 때 그는 기사에게 물었다.
ꡒ혹시 저 충무공동상의 모델이 토요또미 히데요시라는 얘기, 못 들으셨어요?ꡓ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ꡒ에이, 설마. 저거 이번에 새로 지은 건데, 혹시 옛날 거 얘기하시는 거 아니우?ꡓ
ꡒ옛날 건 그랬답니까?ꡓ
ꡒ뭐 어디서 그런 얘기 들은 것 같기도 하고.ꡓ
ꡒ그럼 충남 장항의 보물선 얘기는 혹시 못 들어보셨어요?ꡓ
ꡒ그건 못 들어봤는데? 그치만 요즘 세상에 보물선이 어딨습니까?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보내는 세상 아닙니까?ꡓ
ꡒ하하, 그런가요.ꡓ
중년의 택시기사는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보다는 그 다음해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라디오의 볼륨을 서서히 키웠다. 라디오에선 한 시사평론가가 나와 지역주의 극복과 알 카에다에 대해 떠들어댔다. 택시가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그는 검은색 가죽가방을 들고 뚜벅뚜벅 호남선 방면으로 걸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