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임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페르세포네가 그 상자에다 아름다움을 가득 채워 주거든 가지고 오되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절대로 그 상자 뚜껑을 열어서도 안 되고, 안을 들여다보아서도 안 된다. 어떻게 하든 여신들의 아름다움이라는 보물에 호기심을 품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명심하도록 하라.」
이 충고에 힘을 얻은 프쉬케는 그 목소리의 임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서 무사히 하데스 나라에 이르러 페르세포네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프쉬케는 페르세포네가 권하는 편한 자리, 맛있는 음식을 사양하고 오직 거친 빵으로 식사를 대신한 뒤 왕비에게 아프로디테의 부탁을 전했다. 곧 그 상자는, 귀한 보물이 담겨 뚜껑이 닫힌 채 프쉬케 손으로 돌아왔다. 프쉬케는 가던 길을 되짚어 이승으로 돌아와, 다시 태양 아래로 설 수 있게 된 것을 신들에게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렇게 위험한 일이 막상 끝나고 보니 프쉬케는 그 상자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신들의 아름다움을 나르는 내가 아니냐? 이걸 조금 내 얼굴에 찍어 발라 사랑하는 지아비에게 잘 보이고자 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프쉬케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조심스럽게 그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웬걸 그 안에는 아름다움은 없고 오직 저승 세계의 잠, 스튁스의 잠만 가득 들어 있다가, 뚜껑이 열리자 일시에 몰려나와 프쉬케를 덮쳤다. 프쉬케는 길 한가운데 쓰러져 잠들고 말았다. 느끼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잠만 자는 시체가 된 것이다.
그 즈음 에로스는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있었다. 사랑하는 프쉬케 생각에 견딜 수가 없어서 에로스는 자기 방 창틈을 통해 바깥으로 날아나왔는데, 그곳이 마침 프쉬케가 쓰러져 있는 곳이었다.
에로스는 프쉬케를 덮친 잠을 다시 수습하여 상자 안에 넣고는 화살 끝으로 살짝 건드려 잠든 프쉬케를 깨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호기심 때문에 하마터면 또 한 번 신세를 망칠 뻔했구나. 일어나 내 어머니께서 분부하신 일을 마저 하여라.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에로스는 하늘을 가르는 번개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제우스 앞으로 날아가 불쌍한 프쉬케를 어여삐 여겨 줄 것을 주청했다. 제우스는 에로스의 주청에 일리가 있음을 아는지라 이 두 연인을 위해 열심히 아프로디테를 설득했다.
마침내 아프로디테도 박해의 손길을 거두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어 프쉬케를 데려오게 했다. 천상의 회의에 열석(列席)시키기 위해서였다. 프쉬케가 도착하자 제우스는 신식(神食)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쉬케여, 이것을 마시고 불사(不死)를 얻으라. 그러면 에로스도 이 인연을 끊지 못할 것인즉, 이 혼인이 영원하리라.」
에로스와 프쉬케는 이렇게 해서 부부로 맺어졌다. 이 둘 사이에서 이윽고 딸이 태어났으니 이 딸이 바로 〈기쁨〉이다.
에로스와 프쉬케 전설은 우의적(寓意的)인 이야기로 들린다. 프쉬케(Psyche)는 그리스 어로 〈나비〉라는 뜻인데, 이 말은 〈영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하기야 영혼의 불멸성을 설명하는 데 나비만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나비는 꾸물꾸물 배로 기어다니는 애벌레 생활을 마친 뒤 자기가 누워 있던 묘지(번데기)에서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날아나와 날빛 속을 너울너울 춤추거나 더없이 향기롭고 감미로운 봄날의 정기를 마시고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쉬케는 곧 인간의 영혼이어서, 괴로움과 불행을 통하여 정화된 뒤에야 이같이 참으로 순수한 행복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회화나 조각에서 프쉬케는 흔히 나비 날개가 달린 처녀로 표현되는데 그 옆에는 에로스가 있기 마련이다. 이로써 이 둘은 갖가지 모습으로 우의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밀턴은 『코무스』 마지막 부분에서 이 에로스와 프쉬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1004~1011행).
저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천상에 올라가,
오래 힘겨운 고역을 치른 뒤 황홀한 모습으로 실신해 있는
사랑하는 프쉬케를 껴안았다.
이윽고 신들도 이들의 소원을 허락하여
프쉬케를 에로스의 영원한 신부로 점지했다.
그리고 프쉬케의 아름다운 몸에서
〈젊음〉과 〈기쁨〉이라는 은혜받은 쌍둥이가 태어나게 해준 것이다.
제우스의 서약에 따라.
에로스와 프쉬케 이야기의 우의(寓意)는 하비의 아름다운 시에도 나타나 있다.
옛날, 이성이, 공상이 그린 날개를 빌고
진리의 명징한 강이 황금 사상(砂床)을 흐를 즈음
인간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묶어
그 고귀하고 신비로운 일을 시로 읊었다.
저 아름답고 장엄한 프쉬케의 이야기도 그랬다.
방랑하는 프쉬케, 꿈을 얻어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는 에로스 숭배자
천상에 사는 그를 하릴없이 지상에서 찾아다니던 자의 이야기도!
저 도시에서, 저 샘가에서, 희끄무레한 동굴 안 돌틈에서
소나무 신전 안에서, 정적이 앉아 벽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저 달빛에 젖은 산 위에서도
새끼 품은 비둘기가 사는 음침한 숲에서도
프쉬케는 에로스가 부르는 아득한 소리의 메아리를 듣고
이르는 곳에서마다 그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둘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저 지상에 출몰하여 지상을 위태롭게 하는
유령 같은 의혹과 불안이
죄와 눈물의 자식인 저 프쉬케와
신의 아들인 저 빛나는 정령 에로스 사이에 끼여들었으므로.
그러나 이윽고 사랑하고 그리는 그녀의 혼과 눈물 젖은 시선이
그에게, 천상에서밖에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알게 하니,
그 지친 마음에 날개를 얻은
그녀는 마침내 천국에서 에로스의 신부가 될 수 있었다.
첫댓글 청라님!!!
그리스 로마 신화 넘 좋아요
잠시 학생 기분으로 읽고 있어요
신화의 신들이 가물가물하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네요
올리시는 수고로움에 존경심을 보내요
감사합니다
만지화 님, 감사합니다.
저 또한 새롭게 공부하는 재미로 하고 있습니다.
[신화]는 예술을 이해하고 즐기는 첫 관문이라 믿습니다.
여기에 성서를 첨가하면 금상첨화이지요.
특히 회화나 클래식에서는 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어주시고 응원글 달아주심에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