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溟州(今 江陵)
溟州(今 江陵)
三国史에 新羅 宜德王이 薨하거늘 無子라. 群臣이 의논하여 族子 周元을 세우고자 할 때 周元의 집이 京北 二十里에 있었다.
마침 큰비가 쏫아져 閼川이 漲하여 건널 수 없게 되니 或이 말하되 天이 周元을 立고자 아니라 하고 이에 上大等이 의논하되 前王의 弟 敬信이 德望이 높고 人君의 体가 있다하니 衆議翕 然하여 맞아 세웠더니 조금 있다가 비가 그쳤다. 国人이 다 万歲를 불렀다.
周元이 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溟州에 移居하고 朝会하지 않더니 後 二年에 周元을 封하여 溟州 郡王을 삼고 溟州와 翼領과 三陟과 斤乙於와 蔚珍 等地를 떼어 食邑을 삼으니 溟州는 이제 江陵이다.
鷄林真骨大王親
九雉分供左海浜
寂憶如花池上女
魚書遠寄倦遊人
鷄林真骨은 大王의 親이라
九雉를 左海浜에서 分供하더라.
寂히 생각하는 꽃같은 池上女는
魚書를 멀리 倦遊人에게 寄하도다.
真骨은 新羅의 王族을 말함이니 国王은 第一骨이라 하고 貴族은 第二骨이라 하다.
三国史에 新羅 斯多含의 系는 真骨에서 나왔다 하니 新羅의 用人은 骨品을 論하였다. 九雉는 文獻備考에 新羅의 法에 王이 날마다 飯米三斗와 雄雉九首를 用하였다.
魚書는 新羅 溪州曲에 말하기를 古에 書生이 있어 遊学하더니 溟州에 至하여 一良家의 女를 보니 姿色이 아름다웠다.
書生이 항상 侍로서 뜻을 보내니 女는 말하기를 婦人은 人을 妄徙치 않으니 貴公의 科挙함을 기다려 父母의 命이 있으면 可할 것입니다. 生이 곧 京師에 돌아와 拳業을 익혔다.
女의 家는 쟝차 婿를 納할 때 女는 平日에 항상 池에 臨하여 魚를 養하더니 魚가 警咳소리를 들으면 반듯시 나와서 소리를 들었다.
女魚에게 말하되 좀 汝를 養함이 오래니 마땅히 내 뜻을 알라 하고 帛書를 던지니 一大魚가 있어 뛰어 나와 書를 含하고 悠々히 가더라.
生이 京師에 있어 一日에 父母를 為하여 饌을 갖출 때 생선을 사가지고 돌아 와서 배를 헤치니 帛書가 있었다. 놀라며 이상히 여겨 父에게 書를 올리고 곧 女家에 가니 婿가 임의 門에 미쳤다.
生이 書로써 女家에 보이고 드디어 此曲을 노래하니 女의 父母 이상히 여기어 말하기를 이는精誠에 감동하였오 人力의 能할 바 아니라하고 그 婿를 보내고 生을 納하였다.
彊界志에 말하되 新羅 王의 아우 無月郎의 두 아달이 있으니 長은 周元이고 次는 敬信이고 母는 溟州人이라. 蓮花峯下에 居하므로 号를 蓮花夫人이라 하였다.
차차 周元이 溟州에 封함에 夫人이 周元에게 있었다. 溟州曲은 곧 蓮花夫人의 事이고 書生은 곧 無月郎이었다.
- 한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의덕왕이 승하셨는데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왕족 주원을 세우려 할 때, 주원의 집이 경북 20리에 있었다.
마침 큰비가 내려 황천강이 불어나 건너기 힘들어지자 어떤 이가 "하늘이 주원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신들이 의논하기를 전왕의 동생 경신이 덕망이 높고 임금의 자격이 있다 하여 모두가 동의해 경신을 왕위에 올렸더니 잠시 후 비가 그쳤다. 국인들이 다 만세를 불렀다.
주원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명주로 이주하고 조회에 나오지 않더니, 2년 후 주원에게 명주 군왕의 작위를 내리고 명주, 익령, 삼척, 근을어(평해)를 식읍으로 삼았다. 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계림진골은 대왕의 친족이라
구제를 좌해변에서 나누어 제물로 삼았지.
고요히 생각하는 꽃같은 지상여인은
어서를 멀리 있는 지친 유람인에게 부쳤다네.
진골은 신라 왕족을 말하는데 국왕은 제1골, 귀족은 제2골이라 불렀다. 삼국사기에 신라 사다함의 계통이 진골에서 나왔다고 하니 신라에서는 골품을 따졌다.
문헌비고에 신라 법에 왕이 매일 쌀 3되와 수꽃 9마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서는 신라 계주곡에 있었는데 옛적에 서생 하나가 유학길에 명주에 이르러 한 양가의 여인을 보니 자태와 용모가 아름답더라.
서생이 항상 시중을 들며 마음을 보냈지만 여인은 "부인은 함부로 사람을 좇지 않으니 공의 과거 급제를 기다려 부모의 명이 있으면 가할 것"이라 했다. 서생이 곧 경사로 돌아와 업을 닦았다.
그 여인 집안에서는 사위를 맞이할 때마다 여인이 평소에 연못가에 나가 고기를 기르곤 했는데, 고기들이 기침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나와 소리를 듣곤 했다.
여인이 고기에게 "너희를 오래 기른 만큼 내 뜻을 알겠지"라며 검은 글씨를 던졌더니 큰 고기 한 마리가 나와 그 글을 문 채 천천히 떠나갔다.
서생이 경사에서 어느 날 부모를 위해 잔치 음식을 마련하고 생선을 사와 배를 가른 뒤 그 글을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아버지께 올리고는 여인 집으로 갔더니 마침 사위가 그 문에 도착했던 것이다.
서생이 그 글을 보이자 여인 부모는 "이는 정성에 감동한 것이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며 사위는 돌려보내고 서생을 사위로 삼았다.
강계지에 신라 왕의 아우 무월랑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주원, 차남이 경신이고 모친은 명주 사람이라 하며 연화봉 아래에 살아 연화부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차차 주원이 명주에 봉해지자 부인도 주원에게 있었다. 명주가는 바로 연화부인의 이야기이고 서생은 무월랑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