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과 임진란(壬辰亂)의 2
선조(宣祖) 이에 애통소(哀痛紹)를 내리사 근왕병(勤王兵)을 부르시니 각지(各地)에 민병(民兵)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여 경기(京畿)(景氣)에 권율(權慄)과 경상(慶尙)에 곽재우(郭再祐)와 옥천(沃川)에 조헌(趙憲)과 장흥(長興)에 고경명(高敬命)과 함경(咸鏡)에 정문부(鄭文孚)와 묘향(妙香) 사승(寺僧)에 휴정(休靜)과 그 외 여러 민병(民兵)이 일어나 적병(敵兵)을 막았으며 또 전라(全羅)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은 구선(龜船)을 만들어 한산도(閑山島)에서 적함(敵艦) 수백척(數百隻)을 깨치니 동년(同年) 10월에 왕(王)이 드디어 환궁(還宮)하시고 또다시 명국(明國)에 원병(援兵)을 청(請)하여 명국(明國) 장수(長壽) 이여송(李如松)이 정병(精兵) 4만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쳐 빼앗고 행장(行長)을 추격(追擊)하다가 벽제관(碧蹄關)에서 견패(見敗)하였더니 마침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일병(日兵)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 일병(日兵)이 다 남해안(南海岸)으로 퇴거(退去)하였고 그 후에 명인(明人) 심유경(沈惟敬)의 주선(周旋)으로 화의(和議)가 일어나 왕복(往復)하기 4개년이라. 29년에 병신(丙申) 4월에 선명(鮮明) 두 나라 사신(使臣)이 일본(日本)에 건너가 담판(談判)한 결과(結果)로 일병(日兵)이 다 물러 가니라.
- 한글
선조 임금께서는 깊은 슬픔을 표현하시며 근왕병을 소집하셨습니다. 각지에서 민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도에는 권율이, 경상도에는 곽재우가, 옥천에는 조헌이, 장흥에는 고경명이, 함경도에는 정문부가, 묘향산 절승 휴정 등 여러 민병이 일어나 적병을 막았습니다.
또한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어 한산도에서 적선 수백 척을 격파했습니다. 그 해 10월, 임금께서 마침내 환궁하시고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습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정병 4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지만, 벽제관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권율이 행주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후퇴했습니다.
이후 명나라 신하 심유경의 중재로 화의가 성립되어, 4년간의 교섭 끝에 조선과 일본의 사신이 일본에서 담판한 결과 일본군이 모두 철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