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계반령(鷄盤領)의 역(役)
고구려(高句麗)와 부여(扶餘) 사이에는 국교(國交)가 자못 험악(險惡)한지라.
부여(扶餘)는 나라 된 지 오래 이고 또 지세(地勢) 험고(險固)함을 믿고 새로 일어난 구려국(句麗國)을 업신여기더니
유리왕(瑠璃王) 28년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자를 보내어 부여(扶餘)를 섬기라 위협하거늘 왕(王)이 겸손한 말로 대답하였더니
왕(王)의 아들 무휼(無恤)이 스스로 부여사자(扶餘使者)를 보고 누란(累卵)의 비유(比喩)로써 꾸짖어 말하되 부여왕(扶餘王)이 듣고 크게 군사를 발(發)하여 침노하거늘
무휼(無恤)이 기계(奇計)를 베풀어 계반령(鷄盤領)에서 크게 이기니 부여왕(扶餘王)이 도망하여 가니라.
그 후 태무신왕(太武神王)(무휼(無恤)) 4년에 비류수상(沸流水上)에서 또 싸워 괴유(怪由)의 꾀로서 부여왕(扶餘王)을 끌어 부여국남(夫餘國南)에 이르니 부여(扶餘)의 병마(兵馬)가 다 진흙에 빠진바 되었거늘
왕(王)이 괴유(怪由)로 하여금 대소왕(帶素王)을 사로잡아 머리를 베이고 돌아오니 이후부터 구려(句麗)와 부여(扶餘)는 서로 용납지 못하여 전쟁(戰爭)이 쉬일 날이 없었느니라.
<한글>
제12과 계반령의 전투
고구려와 부여 사이의 국교가 매우 험악했다. 부여는 나라된 지 오래되고 지세가 험준하여 새로 일어난 고구려국을 업신여겼다.
유리왕 28년에 부여왕 대소가 사자를 보내 부여를 섬기라 위협하자 왕이 겸손한 말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왕의 아들 무휼이 부여 사자를 보고 누란의 비유로 꾸짖었고, 부여왕이 크게 군사를 발동하여 침략하였다.
무휼이 기계를 베풀어 계반령에서 크게 이기니 부여왕이 도망갔다.
그 후 무휼(태무신왕) 4년에 비류수상에서 또 싸워 괴유의 계략으로 부여왕을 남부여까지 끌고 가니 부여 병마가 진흙에 빠졌다.
왕이 괴유로 하여금 대소왕의 목을 베게 하였고, 이후 고구려와 부여는 서로 용납지 못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