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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保守)’를 참칭하지 마라!
인천일보 논설위원
[IAEA 사무총장 “오염수? 난 마시고 수영도 가능…한국은 북핵 더 걱정해야”]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다. 가관이다. 한 나라를 찾은 나그네의 내정간섭 발언이 오만하다. IAEA 사무총장은 물질이란 이해관계가 얽혀 그렇다 쳐도 이 말을 그대로 보도하는 보수 언론과 그를 추앙하는 국민의 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제 아무리 보수 언론, 보수 정당이라 해도 나라의 자존심은 지켜야하지 않나.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나그네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하여, ‘보수’라는 말을 짚어보려 한다. 우리에게 보수가 있는가? 보수란 “(1)새로운 것을 적극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함, (2)보전하여 지킴”이다. 따라서 보수의 가치는 국가, 혹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보수는 공동체로서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공감능력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공동체’만 지키려 하니, 이른바 공감의 반경이 너무 구심력으로 작동하여 ‘수구세력(守舊勢力)’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그들만을 위한 행동이니 전체 공동체로 볼 때는 상식 이하이다. 재래의 풍습이나 정통도 아니요, 또 무엇을 보전하여 지킨다는 의미와도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보수는 이 변하는 세상을 보전하여 지켜야 한다. 보수가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이유다. 변하는 세상에서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유지하려면 변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보수는 요지부동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과 국힘을 ‘보수’라 하면 안 된다. 보수라는 말을 외람되이 쓰는 ‘참칭(僭稱,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름)’이기 때문이다.
보수든 진보든 나라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꾀하려는 공감력이 있을 때만 성립하는 용어이다. 언론사 사주의 이익, 물질에 포위된 언론과 대의기관으로서 국가 공동체와 공감능력이 없는 정당은 그들만의 ‘사리사욕 집단’일 뿐이다. 어떻게 ‘보수’가 되겠는가.
현재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드는 게 모두 보수를 참칭하는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서다. 저런 보수를 참칭하는 자들은 이 땅을 지나가는 나그네나 이 땅에 기생(寄生)하는 적폐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보신만을 위하는 자는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결코 한 나라, 한 민족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물론 자칭 ‘진보(進步)’도 자유롭지 않다. 대한민국은 극단의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한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이에 동의한다. 우리와 비슷한 경제력을 지닌 나라의 보수는 국가 공동체를 지향하여 사회적 균형, 질서를 중시하여 배분에 가치를 둔다.
대한민국의 진보 기치를 내건 정당도 유럽 보수 정당 측에도 못 든다. 예를 들자면 독일의 보수라 자임하는 기독교민주연합은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로 정강정책에서 대학 등록금 면제, 대학 생활비 지원, …주거 문제까지 국민의 삶 일체를 국가 책임으로 명시화 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주인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어느 민족사회든지 그 사회의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패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권리를 다른 사람이 가지게 됩니다. 나로부터 여러분은 각각 우리 자신이 이 민족사회의 참주인인가 아닌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민족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선생의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다.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는 우리 근대 역사가 만들어 낸 비극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6.25 포성이 멈춘 지도 반백년이 넘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보수와 진보’, 정확히 말하면 ‘수구와 보수’에 지나지 않는 언론과 정당은 더 이상 그 이름을 참칭하지 마라! 보수와 진보가 제 이름값을 하려면, 이 땅의 책임감을 지닌 주인이 되려면, 모두 뼈를 깎는 각오로 ‘보수(補修,낡은 것을 보충하여 수선함)’를 해야만 한다.